# 42
#42화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16)
―응? 더위 먹었냐? 무슨 헛소리를…….
그러더니 잠시 동안 폰이 조용하다. 불안한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다시 폰에서 살짝 올라간 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네, 진짜.
―흐음…… 진짜?
―네, 진짜.
―요 맹랑한 것!
아마 PC방에 있었으면 바로 헤드락을 걸지 않았을까? 이걸 그리워할 줄이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말할 타이밍이 애매해서요.
그러면서 그간 내가 RTP 때문에 겪은 고충들을 이야기해줬다. 이걸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처음이다. 유혜선 팀장도 그냥 검사 결과만 알지…… 내가 그동안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전혀 모르니까.
―흐음. 이거 참…… 이런 건 소주 한잔하면서 들어야 하는 이야기인데. 어디냐? 집이지? 나와! 한잔하자. 아니다. 내가 간다. 술 뭐 좋아하냐?
―맥주면 다 좋아해요.
―오케이! 접수. 맥주에 소주 좀 타면 되겠네. 좀 기다려. 사장님한테 말해놓고 갈게. 오늘은 쉬어야겠다.
맥주라고 했는데 금세 소맥으로 종류가 변하네. 주는 대로 마셔야겠지? 그렇다면 안주라도…….
―저 치킨 좋아해요.
―뭐라고? 안 들려!
안 들리는 척하시네.
―그냥 술만 사 오세요. 치킨 한 마리 시켜둘게요.
―아? 치킨? 내가 귀가 좀 안 좋아서.
내가 시킨다니까 금세 다시 들린단다. 한 치도 빈틈도 없으시구만.
***
띵동―
울리는 벨에 문을 열어주니 재중이 형이 술을 양손 가득 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여. 집 좋은데?”
“뭐, 그냥 오래된 집인데요.”
“예의상 해본 소리였는데. 그래도 좋긴 하네. 자자. 얼음 있어? 이거는 냉동실에 좀 넣어두고.”
마실 소주와 맥주만 빼놓고 바로 냉장고에 넣어놓고 다시 거실에 앉았다.
안주는 그냥 집에 있는 냉동식품들을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꺼내왔다.
“너희 집 무슨 마트 하냐? 뭔 냉동식품이 종류별로 다 나와?”
“편의점 하고 냉장고에 들은 게 똑같을걸요?”
“뭐, 혼자 사는 인생이 다 똑같지. 우리 집도 비슷해. 자자 들이키고.”
그 짧은 시간에 이미 맥주에 소주를 말아서 앞에 딱 가져다 놓고 술부터 먹인다.
이미, 오기 전에 잠시 접속해서 오늘은 접속을 못 한다고 방패전사에게 말해둔 상태다. 술 마시면 못 들어가니까.
이 얼마 만에 마시는 맥주인가! 소주가 좀 섞이긴 했다만…… 시원하게 목을 쏘는 이 느낌…… 살아 있는 기분이다.
거의 3주를 못 마셨네.
강제로 금주행이었는데 오늘 하루는 잊자.
TV 소리를 배경 삼아 재중이 형과 몇 잔 더 주거니 받거니 하니까 치킨이 도착해서 쫘악 벌여 놓고 술판을 벌였다.
“아우! 그러니까 걔가 얼마나 까탈스럽냐면.”
재중이 형이 새로 온 알바 여자애의 뒷담화를 한다고 정신이 없으시다.
이거 이제 보니 자기가 술 마시고 싶어서 온 거구만. 좋은 기회를 제공했네. 내가.
“그래서, RTP가 얼만데?”
“으음, 공식적인 걸로요? 비공식적인 걸로요?”
“뭐, 그런 것도 따로 있어? 둘 다 해봐.”
“공식적인 걸로는 500요. 비공식적인 걸로는.”
이걸 말해야 하나? 모르겠다. 이왕 시작한 거.
“……걸로는?”
“……600요. 기계가 안 좋아서 더 측정을 못 한다네요.”
“진짜?”
“VRS 회사에 가서 측정한 거니까 아마?”
“하! 미쳤네.”
말을 끝내고는 재중이 형이 잠시 눈을 감고는 뭔가를 생각한다. 그러더니 조금 진중해진 톤으로 말을 꺼냈다.
“너 내일부터 당장 서버 옮겨.”
“네? 그게 무슨?”
“거기서 놀 수준이 아냐. 이미. 진작 말하지, 이거 구상해둔 걸 전부 뒤집어야 하나.”
그렇게 말하더니 혼자 뭔가를 생각하는지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구상한 것? 뭘 말하는 걸까.
“형, 제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세요?”
그 말에 재중이 형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이상해야 하냐?”
“아뇨.”
“RTP가 낮은 게 오히려 문제지. 예전이야 활용을 못 해서 그렇다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잖아? 4세대가 나오고부터 이제 높은 걸 이상하게 보는 인간들은 이 업계에 아무도 없어. 앞으로 그간 잠들어 있던 용들이 대거 뛰쳐나올 거다. 너만 한 놈은 절대 없겠지만.”
“그런가요?”
“뭐, 그렇지. 근데 너 어떻게 들어가냐?”
“네?”
“VRS. 지금 세대 수준으로는 감당이 안 될 건데?”
“아. 그건.”
유혜선 팀장과 있었던 일을 하나씩 썰을 풀어주니까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호오? 그래서 그 커스텀 VRS는 어디에 있고?
내가 방 한 곳을 가리키니 금세 일어나서 쪼르르 가본다.
“이건 굉장한데? RTP 억제기에, 거의 프로게이머 용인데?”
“그걸 알아요?”
“그럼, 당연히 알지. 너 내가 3세대 때 어떻게 활동했을 거라 생각하냐?”
3세대면 거의 300P에서 350P인데, 저 말은? 그간 신경을 안 썼는데 그러고 보니 저것도 이상하네.
“형도 혹시?”
“어. 나도 꽤 높아. 너 정도는 아니지만. 좀 집중하면 지금 기기들 한계까지 가능은 한데 오래 지속하긴 힘들지만. 거의 600대면 상상이 안 가는데? 그 팀장 말로는 600대도 아득히 넘어간다는 거 아냐?”
그러면서 나를 위, 아래로 슬쩍슬쩍 쳐다본다.
유혜선 팀장이 전에 프로게이머용으로 개발됐다고 했는데 확실히 RTP 억제기에 대해서 알고 있겠네.
그러면서 다시 로스트 스카이 이야기로 넘어갔다.
“웬만하면 지금쯤 옮기는 게 나아.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서 옮기려고 하면 그땐 나도 답이 없어. 니가 아무리 RTP가 높아도 렙 차이가 몇십 단위가 넘게 나버리면 따라오다가 지쳐버리니까. 초기라서 레벨 업도 빠른 편이고 옮기려면 지금이 적기다.”
재중이 형이 술잔을 입안으로 기울이면서 마저 말을 잇는다.
“예전에야 그냥 취미 생활 정도로 여겼고 나도 그냥 너 재미로 하는 정도라서 그냥 둔 건데. 너 그 RTP를 가지고 취미 생활하면 진짜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어.”
좀 진지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가? 하긴, 요즘 벌어들이는 것을 보면 이 생활에 대한 인식도 점점 바뀌는 중이기도 하다.
“뭐, 아르쉴라 서버에서 커도 딱히 상관은 없긴 해. 그 서버에선 너를 1:1로 상대할 만한 인간들도 거의 없을 거고. 어쩌면 혼자 무쌍을 찍을 수도 있겠네. 근데 이 가상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한 사회다. 경쟁이 없으면 관심이 시들해져. 스토리텔링이 없는 서버는 그만큼 미디어, 광고 등의 관심도 줄어들고. 그냥 서로 즐기는 게임일 뿐이지.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할 말은 없는 데.”
재중이 형이 바라보는 가상현실은 저런 세상인가?
“그림을 길게 봐라. 그 RTP로 봐서는 이 업계에서 쉽게 내려갈 수가 없을걸? 그러면 그중에서도 최고가 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아? 최고의 경쟁 상대들이 있는 격전지에서 날뛰어 봐. 무대는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그리고 나하고 게임하면 재밌을 것 같지 않냐?”
그러면서 내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쨍― 하면서 건배하더니 바로 원샷으로 넘긴다.
뭐, 너무 끌리는 말이라서 어떻게 할 말도 없네.
나도 그대로 술잔을 기울여 원샷을 했다. 술맛이 괜찮네.
“일단, 콜이라는 거네?”
“형, 혹시 제가 몇 명 데리고 넘어가면 그 사람들까지 케어해 줄 수 있어요?”
“응? 누구? 몇 명인데? 잘 해?”
몇 명보다는 잘하는 것에 더 집중해서 물어보는데?
뭐, 내 입장에서만 보면 다들 잘 해 보이긴 하는데 잘하든 못하든 내가 넘어가야 한다면 난 무조건 데리고 갈 생각이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아르쉴라 서버에 남아야 한다면 그쪽으로도 생각해볼 일이고.
“자리는 있긴 해요?”
“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뭔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하니까 일단은 패스하고.
“네 명인데 제가 보기에는 잘해 보여요. 시작부터 쭉 손발을 맞추기도 했고.”
“뭐, 가상에서 네 감각은 거의 절대적이니까 보기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내 말에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 더 물어보지도 않는다. 내 말만 듣고 끝인가? 너무 쉬운 거 아냐?
“끝이에요?”
“어, 말했잖아. 네 감각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데 물어봐야 뭐하겠냐. 맞다면 맞는 거야. 대신, 친분 때문에 억지로 데리고 오는 건 안 된다? 나도 어중이떠중이 막 데리고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건 아닌데, 뭐, 안 되면 저희끼리 따로 빠져야죠.”
“알았으니까 걱정 말고 넘어오기나 해.”
그러고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워준다. 나만 넘어가면 다 오케이라는 건가?
“일단 의견을 물어봐야 알겠지만 넘어온다고 치면 레벨 업은요?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일단 장비는 다 지원해 줄 거야. 퀘스트도 요즘 정체 구간도 없고. 병행해서 쭉 치고 올라오면 네가 3주간 올린 건 일주일이면 복구될 걸? 너 첨에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었잖아. 거기다가 풀타임으로 접속도 못 했고. 시작부터 제대로 장비 차고 하면 더 쉽지. 그거 감안하면 일주일. 근데 장비는 뭐 차고 다녔냐? 비슷하게는 구해줄 수 있는데.”
그 말에 잠시 고민.
어차피 말할 거 다 말해야겠다. 일단 우리가 재구입하는 식이 되겠지만. 당장 필요한 것들은 돈이 있어도 못 구하니까.
“트윈 헤드 워 울프 플레임 소드, 아이스 소드, 라이트 소드 인챈트도 있고요, 워 울프 풀셋에 악세 네 개랑 우리 팀 중에 트윈 헤드 워 울프 스태프, 라지 쉴드, 오크 족장 글레이브 랑…….”
한참을 얘기하는데 재중이 형이 손을 들어 막는다.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는데?
“너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냐? 그게 왜 다 있어?”
그러게요. 하다 보니 이렇게 모였네요.
“오크 족장도 잡고 트윈 헤드 워 울프도 잡고.”
“너 혹시 그거 너희 지역 최초로 잡은 거냐? 그거 밖엔 답 안 나오는데.”
“네, 그게 어떻게 한 거냐면…….”
이왕 말해주는 걸 다 말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 한배를 타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이 상실이네. 그걸 너희가 했어? 오크 족장 패치돼서 우리가 얼마나 피똥 쌌는데 어휴. 거기다가 프로텍트 쉴드 중첩도 너희 작품이고? 미치겠네, 진짜.”
“좀 저희가 남다르게 놀긴 했죠.”
“좀이 아닌데? 뭐, 덕분에 우리가 잊혀진 고성을 그걸로 먹었으니까 고마워해야 하나? 그거 덕분인지 지금 아주 날아다니거든. 참 생각도 못 한 곳에서 다 튀어나오네. 술 마시다 이렇게 놀란 것도 첨이다.”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그걸로 퉁 치죠?”
그간 정보만 받아써서 좀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저 정도 이득을 안겨줬으면 괜찮지 않으려나?
“어휴, 그것도 그새 챙겨 먹냐? 퉁 치는 걸로 하고 장비는 좋아. 내가 다 구해준다. 없으면 사서라도 구해줄 테니까.”
“그렇게까진 안 해도.”
“거의 다 있는 거니까 몇 개만 구하면 돼. 너희들 클 때 써야 하는 것도 길드 창고에 있으니까 그것도 대여해주고.”
일단 지원은 확실하네.
“장비 보니까 꽤 높은 곳에서 사냥 중이겠네. 어디야? 외성 2구역?”
“아뇨, 1구역요.”
“다섯 명이 1구역을 돌아다녀? 아무리 네가 커버한다고 해도 나머지가 안 받혀주면 거기서는 사냥 안 되는데. 오케이! 다 데리고 넘어와. 따로 실력 테스트 같은 건 안 해도 되겠네.”
지금 1구역에서 사냥 중인 것만으로도 그냥 커트라인 자동 통과인가?
“보자. 그 정도면 하루에 백만 정도 나오려나.”
“네? 아뇨, 저희가 평균적으로 거의 육십만 정도?”
뭐지? 돈 단위가 다르네?
“역시 차이가 좀 나네. 너희 서버랑 우리 서버. 봐라. 같은 시간을 달려도 버는 것도 다르지?”
할 말이 없네. 이 정도로 차이가 나나?
“솔직히 너까지는 몰라도 네가 말한 다른 네 명의 그동안의 수익을 내가 보전해 주긴 힘들겠지. 현금으로 치면 천만 단위가 넘어가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를 투자하라면 난 손들 수밖에 없고. 이건, 그 사람들 선택이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장비를 구해주는 것까지는 몰라도.”
나도 그 정도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당장이야 손해를 보겠지만 길게 보면 넘어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버는 단위도 다르고, 거기다 내 사냥 정보의 대부분은 재중이 형에게서 나오는 것도 있다. 옆에 있으면 배울 것도 많을 거고.
자…….
일단 제안은 다 들었고 이제 어쩐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까지 해주면서 날 데리고 갈 생각일 줄은 전혀 몰랐거든. 이건 뭐, 지금 내 입장에서 보면 차표 다 끊어주고 일단 오기만 하라는 수준과 비슷하다.
내일 접속하면 우리 팀원들과 할 이야기가 엄청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