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화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15)
“진짜 그건 너무 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적들 사이로 뛰어들다니.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쁜소녀가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고, 방패전사는 넋 나간 모습으로 나에게 따진다.
아…… 이건 걱정하는 건지 뭐라 하는 건지 구분하기 좀 어렵네. 걱정하는 것 맞지?
“미리 말씀이라도 하고 하시지. 저희가 얼마나 놀란 지 아세요?”
챠밍도 비슷하네. 표정이 정말 형용하기 힘들다. 걱정 반, 안도 반. 꾸중 반.
“그래도 잘 됐잖아요.”
“아니, 그게 문제가…… 어휴.”
내 말에 방패전사가 뒷목을 잡는다.
원맨쇼를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집 밖에도 못 나가게 묶어둘 것 같아서 일단 여기서 말을 끝냈다. 될 것 같아서 한 거긴 한데 주변에서 보기에는 미친 짓 같았나 보다.
내 원맨쇼를 기점으로 완전히 우리 쪽으로 형세가 넘어가면서 어느 정도 버티던 켈베로스 길드원들이 전부 귀환을 타고 도망을 가버렸다.
다 사라지고 이제는 전장 정리만 남은 상태다. 주변을 쭉 둘러보니 사람들이 빛으로 변해 떨어뜨린 아이템만 바닥에 줄줄이 널려 있다.
전리품은 모아서 템을 떨군 사람들부터 먼저 복구해 준다는데 이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넘어가고.
난데없이 갑자기 길마가 불러서 쟁에 참여하는 것은 일단 길드에 속해 있으니 어쩔 수 없으려나? 그렇게 떨군 템은 가능하다면 보상해줘야겠지. 아니면 불평이 엄청날 것이다.
그렇게 떨어뜨린 아이템을 보상해 주고 남은 것은 녹화 영상을 보고 활약에 따라 분배해서 개인 우편으로 넣어준다고 한다. 솔직히 이건 많이 귀찮은 일이니까 굳이 나서서 하고 싶진 않고. 영상이 있으니 속이고 그러진 못할 것 같아서 일단 이것은 넘어갔다.
지금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당장 어떻게 하라고 하기도 힘들고. 이건 신용의 문제이려나. 길드라는 이름값.
그리고 이것도 이겼으니 망정이지 졌으면 아이템, 돈 등 손해가 막심했을지도 모르겠네.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지 않은 템들이 드랍 됐으니까. 쟁 한번 하면 허리가 휘청휘청해지겠는데?
켈베로스 애들은 이거 복구하려면 진짜 생고생할 걸로 보인다. 뭐, 그건 내가 알바는 아니지.
“다행히 제가 늦지 않은 것 같네요.”
“뭐, 딱 좋은 때 오셨죠. 무슨 슈퍼 히어로도 아니고 어떻게 그 타이밍에 나타납니까.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 왕자님이라니.”
방패전사가 이제 부럽다는 듯 이야기하는데 옆에서 챠밍이 괜히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니까 금세 입을 다문다.
나르샤도 옆에서 좀 가라앉은 눈빛으로 방패전사를 공격하니 방패전사가 바로 자라목이 되어서 뒤로 빠진다.
“아깐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했네요. 고마워요.”
챠밍이 다가와서는 공손히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기가 좋다.
“감사까지 들을 정도는 아닌데요. 제가 아까 급해서 본의 아니게 손을 좀 댔는데 괜찮으신가요?”
챠밍이 아까의 상황을 다시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이런 역시 문제가 되나?
“아…… 공격이 맞을까 봐 급하게 움직인다고…… 실례였으면 죄송합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런 것 아니에요.”
당황하는 나를 본 챠밍이 살짝 웃으면서 괜찮다고 해준다. 잘 넘어간 모양이네.
챠밍이 날 보더니 다시 고개를 휙 돌린다. 왜 저러지.
그러고는 고개 숙여 다시 인사를 하고 곧장 이쁜소녀와 나르샤의 팔을 잡더니 좀 떨어진 곳까지 같이 가버렸다.
오자마자 싸움에 끼어든다고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 이제야 여유가 생기네. 역시 이런 건 방패전사에게 물어야 한다.
“왜 이렇게 싸움이 커진 겁니까?”
“그게 저희 길드 사람 중에 몇 명이 자리가 없어서 약간 북쪽에서 남는 사냥터를 차지하고 사냥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전에 저희 뒤치기했던 그놈들이 우리 애들을 죽였답니다.”
“골고루 하네요. 진짜.”
“첨엔 그냥 단순히 뒤치기 들어온 것으로 알았는데 그 자리에 버젓이 켈베로스 애들이 사냥하고 있었다네요.”
“길드 사람들을 잡고 그 자리에?”
“네, 켈베로스 길드서는 사냥터가 비어 있어서 자신들이 자리 잡았다고 하면서 자신들하고는 관계없다고 그러니까 이번엔 함정을 놨죠. 냄새가 나니까요.”
“똑같이 또 해봤겠네요?”
“네, 좀 기다려서 소수로 사냥터에 자리 잡고 하고 있으니까 또 뒤치기 오던데요? 그래서 그 뒤에 가보니까 켈베로스 애들 딱 하고 자리 잡고 사냥 중이고.”
“낚싯줄을 끌어당기다 보니까 물고기가 걸려들었네요? 길드 표시 없는 애들로 PK하고 자신들은 아무 상관 없다고 우기는 새끼들이네.”
“말싸움 좀 하다가 서로 칼질 들어가고 그 뒤로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 셈이죠. 거기다 양쪽 다 계속 증원을 불러 모으다 보니까 엉망이 된 겁니다. 근데 적당히 죽어도 안 빼더라고요. 뭐, 저희가 아직 규모가 작아서 만만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말이죠…….”
그러면서 방패전사가 내 눈을 지긋하게 바라본다.
아…… 남자한테 저런 눈빛은 진짜 아닌데…….
“이제 다신 덤빌 생각도 못 할 것 같네요. 주호 님 덕분에.”
***
이번 싸움으로 우리 팀의 인지도가 전보다 훨씬 올라간 상태다.
챠밍이 파이어 월로 전세를 한 번에 뒤집어 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챠밍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기 전에 진형이 무너져서 졌을 수도 있다고 하니까.
잘 키운 마법사 열 격수 부럽지 않다더니. 쟁에서 그야말로 일당백 역할을 해버렸다.
이쁜소녀도 내가 오기 전에 중간에서 엄청나게 활약했다고 하고 방패전사는 최전선에서 계속 싸우다 보니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이 되었고.
나르샤야 뭐, 알고 보니 원래 실력으로 유명한 인사라고 한다. 워낙 조용하고 말이 없어 좀 묻혀 있어서 그렇지 실력 하나는 상당하니까.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다름 아닌 나다.
“아까 잘 봤어요. 언제 한 번 사냥 같이 가요?”
“여! 형씨 대단하던데?”
“저희 쪽이랑 같이 어때요?”
“악수 한번 하고 가도 되나요?”
얼굴도 잘 모르는 길드 사람들이 한 번씩 다 인사나 악수를 청하고 자기 팀 스카웃 제의를 하고 간다. 얼떨떨하게 인사를 다 받아주긴 했는데 솔직히 진짜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완전 유명 인사네요. 길드에서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겠네. 평소에 봐온 저희도 이렇게 놀라는데…… 지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방패전사가 옆에 앉아서 한껏 웃으면서 말한다. 전리품 정리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사이에 사람들이 폭풍처럼 인사를 하고 가서 정신이 없는 모습을 웃긴 듯 보고 있다.
“이거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요.”
살면서 이런 관심이 처음이라 이상한 기분으로 다가온다.
“영상 올라가면 더 유명해질걸요. 지금 저희 지역에서 터진 최대 규모의 쟁이었으니까요.”
“얼굴은 안 나오겠죠?”
그럼 좀 쪽팔릴 것 같은데…….
“아마도요? 영상허가가 안 되면 그냥 얼굴 없는 사람들이 우르르 싸우는 것처럼 나올 겁니다. 무섭겠네요, 좀.”
확실히 그건 좀 무섭겠다.
“뒤치기하던 놈들은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흠, 그쪽도 저희와 완전히 적대 관계로 갈 것 같네요. 지금까지는 뒤치기는 길드 표시가 없는 녀석들이 다 해서 몰랐지만 꼬리가 잡혔으니까요.”
“켈베로스 길드 말이네요.”
“네, 둘 다 이제 적대 관계죠. 뒤치기하던 놈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가 켈베로스 애들의 지원이 있었으니까 그랬겠죠. 음지에서는 뒤치기하는 애들이 뒤치기해서 아이템을 털거나 켈베로스 애들이 사냥터가 없을 때 가서 죽여주고 사냥터를 먹게 해줬겠죠. 서로 상부상조했던지 아님 애초에 한 부류였을 겁니다.”
“진짜 한국 사람들 머리 쓰는 걸 보면 대단하네요.”
“아마 돈이 되니까요? 저렇게 뒤치기하던 것도 지금 아이템 가격들이 워낙 높은 탓도 있을 겁니다. 켈베로스는 아마 좀 더 키우고 나설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저희 덕에 완전 망한 거죠.”
언제나 발뺌이 가능하고 피해가 없도록 따로 PK하는 애들을 쓸 정도면 애초에 아주 조직적으로 준비한 놈들이다. 이대로 쉽게 끝날 것 같진 않은데? 들켰을 경우에도 생각해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허술하게 준비하기에는 규모가 상당히 크니까. 이 정도로 머리를 굴려서 준비한 놈들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놈들이 왜 이렇게 뒤쪽 서버에 와서 설치지? 돈은 앞쪽 서버들이 더 될 텐데. 경쟁이 심한가? 여기가 더 쉬워서? 직접 이야기해 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다.
“이왕 밟은 김에 확실히 끝냈으면 좋겠는데.”
“뭐, 당장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 버리면 다시 기어 나올 수도 있고. 다만 아이디와 길드까지 다 알려진 마당에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은 지나봐야 알겠죠.”
방패전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번에 드러나지 않았으면 아마 뒤치기 한 녀석들의 아이템 지원과 사냥터를 매번 지원받는 켈베로스가 합쳐져서 나중에 어떻게 나왔을지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켈베로스 애들은 지금 신화 길드에 엄청나게 이를 갈고 있지 않을까?
***
―우와, 이 영상 진짠가요?
―나 켈베로스 암. 이 새끼들 완전 악질이던데 이번에 제대로 걸렸네.
―파이어 월 대박. 저거 어디서 구하나요? 알려주실 분?
―중간부터 끼어든 저 사람 뭐지? 혼자 다 잡네.
―검 두 개 드는 건 폼 잡는 용도 아니었음? 개 쩌네.
―저 정도는 나도 함.
―꺼져.
―뻥치시네. 저걸 한다고? 거의 15대 1 이구만.
―오늘부터 나도 쌍검 든다.
―쌍검 들면 너도 할 것 같지? 꿈 깨라.
―저기 들고 있는 무기 전부 네임드 맞죠?
―캬! 플레임 소드랑 아이스 소드까지 다 들고 있네. 대박.
―어디 부잣집 아들인가? 저걸 지금 어떻게 두 개 다 구해.
―경매로 다 샀나 봄. 돈 없으면 게임 하겠나.
역시나 영상이 올라와 버렸다.
양측 합쳐서 거의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싸운 건데 누구 한 사람은 녹화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나 녹화 영상이 올라와서 게시판이 시끌벅적한 상태다.
영상의 시점을 보니까 우리 쪽에서 올린 영상이다.
다행히 길드에서 올린 것이라 따로 캐릭터 명이 올라오지 않아서 내심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을 하는데 내가 봐도 저걸 내가 했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어 보이는 영상이다.
대단했었네. 이날.
아주 안 맞을 수는 없어 등이고 팔이고 몇 번씩 내어주면서 싸우긴 했는데 방어구도 공격을 흘려서 직격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싸우는 도중에 알아내다니 진짜 RTP라는 것이 미쳤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었으면 저 속에서 저렇게 무쌍을 찍지는 못했을 것 같다. 보는 입장에서는 쉬워 보이는데 저 속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세세한 움직임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엄청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면 알아보려나?
영상을 한참 보는데 재중이 형에게 연락이 왔다.
―뭐하냐? 바빠?
―아, 그냥 영상 올라온 것 보고 있었어요. 얼마 전에 길드 전 한 거요. 혹시 다른 길드하고 싸우거나 한 적 있어요?
―응? 뭐, 요즘은 렙업 해야 해서 서로 잘 안 건들긴 하는데 우릴 건들면 반쯤 죽지. 전에 붙었던 곳은 완전히 해체시켜줬거든.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생각하던 것들이 더욱 부채질 되는 것 같은데? 내 표정이 지금 어떨까? 분명 평소의 나와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네.
―적당히 어설프게 살려주면 또 덤비거나 뒤에서 딴짓하지. 밟을 수 있을 때 싹까지 싹 밟아주는 것이 좋아. 아니면 완전히 기어오르지 못할 정도로 기를 죽여 놓거나.
재중이 형이 이런 스타일이었나? 이번에 말하는 것들이 완전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평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설렁설렁하고 유순하게 대충 넘어가는 모습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아. 괜히 건드려서 될 것 같으면 툭툭 건드려 보고 아예 답도 안 보인다 싶으면 꼬랑지 내리지. 이런 게임도 한 연장선이야. 오히려 더 하다고 봐야지. 상대방을 죽일 수 있잖아. 사람의 강력한 욕망이 최대치로 발산되는 곳이 이런 게임이야.
무슨 명강의 듣는 기분이네. 방패전사도 전에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건들면 완전히 밟아라, 이런 거네요.
―뭐, 그렇지. 밟을 수 있을 때 밟고. 근데 때론 여러 사정 때문에 마냥 싸울 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길드 사정도 있을 수 있고.
한참 재중이 형의 강의를 듣다 보니 머리가 개운해지고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야, 근데 너도 그거 보냐? 사장님이 보여주셔서 보긴 했는데…… 그거 너희 서버 아냐?
그 말에 조금 뜨끔 한다.
―네, 우리 서버네요.
―으음…… 뭐, 좀 잘하긴 하네. 가능하면 데려다가 키워보고 싶기도 하고. 우리 서버였으면 스카웃 했을 건데…….
―그런가요?
흐음, 전에 여우 영상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그때야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을 때 찍힌 영상이고 서로 웃으면서 지나갔다. 딱히 굉장한 것도 아니었고.
그 이후로 몇 번 말할 기회가 있긴 했는데 매번 망설여졌다. 내 미친 듯이 높은 RTP는 내게 콤플렉스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 군대 동기들까지 내 RTP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다들 모여서 가상현실 게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혼자 떨어져서 항상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가상세계에 전혀 관심이 없는 척…….
다 해도 나는 못 하니까.
그저 영상 속 세계에 나는 없었다.
아마 유혜선 팀장이 아니었으면 적어도 십 년 정도 더 모른 체하다가 가정을 꾸리고 가상현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을지도.
유혜선 팀장은 내 그런 RTP가 축복이라고 한다. 그럼, 이제 떳떳해져도 되지 않을까? 더 이상 가상현실은 내게 먼 나라가 아니다.
사실 더 일찍 이야기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마냥 쉽게 이야기하기에는 지나온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재중이 형이나 사장님이 나중에 남들의 입에서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굉장히 싫을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먼저 내가 말해주고 싶다. 이제껏 유혜선 팀장 외에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형, 저 영상에 나온 사람…… 전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