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39화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13)
―지금 어딘가요? 상황은?
<챠밍> 여기 외성 2구역 사냥터요. 저희 길드가 평소에 사냥하는 곳 아시죠? 거기서 좀 북쪽이에요. 우리 길드 사람들이 지나치다가 전에 저희 뒤치기하던 사람들하고 한 패인 길드 사람들하고 붙었는데 지금 양쪽 길드에서 사람들 전부 와서 큰 싸움 났어요. 저랑 우리 팀 사람들도 지금 지원 가는 중이에요. 방패전사 님하고 나르샤 님은 이미 싸우러 가셨어요.
생각보다 심각하네. 싸움이 나도 아주 크게 났다. 거의 길드 대 길드의 전면전인데?
―곧 갑니다. 제가 갈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아시죠?
<챠밍> 네, 어서 오세요.
챠밍과 귓말을 종료하고 방패전사에게 귓말을 보내려다가 괜히 싸우고 있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만뒀다.
젠장, 오늘따라 발걸음이 너무 느린 것 같다. 빨리 안 가면 아는 사람 중에 누구 하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연신 조급해지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다.
조금만 버텨라. 금방 간다. 입구까지 포탈을 타고 와서 외성 2구역의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야, 이거 재들 너무 많은데?”
나르샤가 방패전사의 등을 툭 치면서 질린다는 식으로 말한다. 눈앞에 보이는 애들이 대략 삼사십여 명 정도는 되어 보이니까. 멀리 있는 애들까지 합치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적들은 전부 늑대 같은 모양의 길드 문양을 달고 있다. 저 늑대 같고 사납게 생긴 길드 마크는 켈베로스 길드의 문양이고.
“우리 쪽 애들은 다 모이긴 한 거냐? 수가 너무 적은데…….”
방패전사가 주변을 쭉 둘러보면서 중얼거린다.
“왼쪽!”
나르샤가 급하게 외치니까 그제야 방패전사가 라지 쉴드를 본능적으로 들어 올려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냈다.
“진짜 눈먼 화살이 제일 무섭다더니.”
방패전사가 화살이 날아온 곳을 보니 딱히 이곳을 향해서 날린 것도 아니다. 여기저기 막 쏘고 있는 인간이 한 둘이 아니다.
“챠밍 님하고 이쁜소녀 님은?”
“접속했는데 지금 오는 중. 앞!”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패전사의 앞으로 양손검을 든 누군지도 모를 켈베로스 길드의 남성 유저가 아주 강하게 검을 내려친다.
쾅!
방패를 들어서 막고 난 뒤에 곧장 상대를 밀어내고 장검을 찌르는데 상대방이 곧장 빠져나가 버린다.
“하! 얘들 싸움 경험치가 상당하네.”
좀처럼 쉽게 빈틈을 내주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PK를 상당히 많이 해야 나올 수 있는 움직임이다. 제때 치고 빠지는 것이 수준급이다.
방금 방패전사를 치고 뒤로 빠지는 녀석을 향해 나르샤가 급하게 활시위를 당겨서 쏴보지만 이미 자신들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린 뒤다.
“얘들 그냥 어중이떠중이 길드 애들이 아닌데?”
그 말에 방패전사가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확실히 이 정도면 3세대서 좀 놀던 애들 같아 보이네. 1서버에 가서 놀 것이지 왜 이런 서버에서 난리야.”
“그 정도 애들은 아닌 것 같은데?”
방패전사가 그 말에 끄덕이면서 주변을 보고 다시 전황을 살핀다. 확실히 우리 편의 숫자도 적고 경험도 모자라 보인다. 처음엔 대등하게 싸우는 것 같더니 점점 밀리고 있다.
“지원은 더 안 와?”
“길마 지금 정신없어. 길드 말로 모이라고 했는데 접속한 사람들은 일단 다 올 거 같은데.”
나르샤가 말을 하면서도 끝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중이다. 지금 손이 쉬면 우리 편이 당할 지경이니까. 그나마 이 주변은 나르샤가 정확하게 화살을 날려대니까 전황이 유지가 되는 중이다.
방패전사는 나르샤의 방어를 위해서 주변을 맴돌면서 접근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방해하거나 밀어내는 중이고 그 빈틈을 노려서 나르샤가 다시 잡는 식으로 벌써 여럿을 빛으로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전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빛으로 변하고 죽은 애들이 떨군 아이템들이 주변 필드에서 빙글빙글 잔뜩 돌아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그걸 주우러 나서는 사람이 없다. 잠시만 눈을 돌리면 바로 칼 맞아 죽을 것 같은데 고작 아이템 하나 줍자고 그러기에는 목숨값이 아깝다.
네임드라도 떨어지면 미친 척하고 먹고 죽겠지만.
“적어도 챠밍 님만 와도 저것들 다 파리 목숨인데.”
“챠밍 님도 이래선 제대로 못 올 거 같은데.”
나르샤가 눈으로 주변을 살피면서 계속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불 마법만 싹 깔아줘도…….”
방패전사는 바글바글하게 모인 켈베로스 길드 놈들 사이에 파이어 월을 깔 생각만 해도 기쁜지 혼자 상상하면서 웃고 있다.
또다시 다른 켈베로스 길드원이 나르샤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이번엔 검방을 든 남자.
“어딜!”
방패전사가 곧장 달려가서 방패로 나르샤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버리자 바로 옆으로 구르듯이 빠져나가 나르샤에게 달라붙기 위해 달려나갔다.
“젠장!”
방패전사가 뒤로 돌면서 검방을 든 녀석을 쫓아가려고 하자 방패전사의 정면에서 또 다른 양손검을 든 남자가 나타나서 방해한다.
그리고 또 다른 쌍수 단검을 든 남자가 방패전사의 옆을 지나쳐서 달려나간다.
한 명이 시야를 끄는 사이에 동시에 양옆에서 한 명씩 빠져나가니 방패전사가 다 잡기란 요원한 일이다.
“저리 비켜!”
방패전사가 양손검을 든 남자를 떼어놓고 가려고 해도 도무지 떨어지질 않는다. 이놈은 철저하게 발을 묶는 역할이다.
“나르샤! 빠져!”
근접전이 되면 궁수는 정말 어렵게 싸워야 하는데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빠져나갔다. 나르샤는 민첩이 굉장히 높은 편이라 빠져나가려고 하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지만 다만 이번엔 상대가 많이 안 좋다.
상대방 중 하나가 극 민첩을 올린 단검 유저다. 딜은 약하지만 기동성은 최상위권.
검방을 든 사내가 활을 맞아가면서도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그 뒤로 쌍수 단검을 든 사내가 바싹 붙어서 뒤따라 달리는 중이다.
나르샤가 화살을 쏘면서 뒤로 빠져보지만 저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오는 상대로는 역부족이다. 피할 생각조차 없이 달려오는데 나르샤가 아무리 빨라도 뒷걸음질 치면서 화살을 쏘는 것과 앞으로 무작정 달려오는 것과는 심한 차이가 있다.
화살을 그대로 맞으며 HP가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조건 달라붙으려고 한다. 이건 뒷사람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된 더미다.
검방 사내는 꼬치가 되어 빛으로 사라졌지만 그만큼 거의 나르샤를 따라잡은 쌍수 사내가 단검을 치켜들고 바로 앞까지 달려와서 단검들을 치켜세운다.
“쳇.”
거의 완전히 달라붙으려고 할 때, 갑자기 뒤에서 급하게 외치는 마법어가 들려온다.
【 바인드! 】
마치 잘 흐르던 음악이 중간에 멈춘 것처럼 세차게 달려가던 쌍수단검 사내가 그 자리에서 다리가 묶여서 앞으로 엎어졌다.
“챠밍 님!”
챠밍이 쌍수 사내의 발을 묶자마자 나르샤의 화살이 엎어진 쌍수 사내의 등에 수없이 날아가 박혀 곧 빛으로 변해서 사라져 버린다.
“고맙습니다.”
나르샤가 정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챠밍이 뛰어왔는지 제법 HP가 빠진 상태로 방패전사를 가리킨다.
“아직요.”
방패전사에게는 이쁜소녀가 달려가서 라이트 소드를 켜고는 그대로 양손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검을 글레이브로 내려쳤다.
“이 년들 뭐야!”
그 엄청난 공격에 무릎이 꿇리면서 HP가 상당히 달아버린 검방 사내가 깜짝 놀라면서 일어나 뒤로 빠지려고 하자 방패전사가 달려들어서 라지 쉴드로 몸을 후려쳐버린다.
“크윽!”
뒤로 완전히 엎어진 검방 사내에게 이쁜소녀가 다가가더니 글레이브를 양손으로 잡고 그대로 아래로 찍어버렸다.
“죽어.”
이쁜소녀가 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났는지 표정을 완전히 굳힌 채로 글레이브를 들고 아예 창날을 세워 진짜 엄청난 속도로 검방 사내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라이트 소드가 입혀진 글레이브에 정신없이 찍히던 사내가 HP가 다 닳아서 빛으로 환해 사라지자 이제야 속이 풀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옆에서 방패전사가 꼼짝도 못 하고 반쯤 쫄아서 멍하게 이쁜소녀를 보고 있고.
“화나시니 무섭네요.”
“확실히 화나네요.”
이쁜소녀가 아직도 조금 화가 덜 풀렸는지 글레이브를 바닥에 푹 찍었다.
“저놈도 건들 사람이 없어서…… 쯧.”
방패전사가 혀를 찬다. 지금 1:1로 붙어서 단순 장비나 스탯으로 이쁜소녀를 이길 상대는 거의 없다. 붙으면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도발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어때요?”
챠밍이 이제 도착해서인지 전황이 확실히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인지 질문부터 한다.
“흠, 굉장히 안 좋다고 보긴 힘든데 좋지만은 않네요. 수도 좀 딸리고, 그리고 쟤들 PK 꽤나 해본 애들입니다. 치고 빠지는 게 다르던데.”
나르샤도 한 번 붙어보니까 바로 감이 오는지 활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주변에 싸우는 사람들 사이로 다시 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것을 신호로 방패전사가 전면에 서고 이쁜소녀는 주변에서 대기, 챠밍은 아예 대놓고 파이어 월을 풀 차징하는 중이다.
“한 방 가요!”
【 파이어 월! 】
챠밍이 풀 차징한 파이어 월을 상대방 진영에 내리꽂으니까 엄청난 불기둥들이 전면에 싹 깔려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악! 씨! 이게 뭐야?”
“피해!”
떼로 몰려 있던 켈베로스 진영 측에서 순간 난리가 났다. 파이어 월은 대단위 마법에다 인원 제한도 없다. 그냥 범위 안에 들어가면 다 피해를 입는 마법이다.
그리고 초반에 약하다고 그냥 서 있으면 순식간에 중첩이 되어 HP가 손쓸 틈도 없이 녹아내리고.
“야! 좀 비켜!”
“빠져! 뒤로 가!”
대략 10m 반경에 불기둥들이 올라 타오르니까 다들 범위 밖으로 피한다고 서로 밀치고 밟고 진영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린다.
“이야! 누구야? 대박.”
“야! 지금 쳐! 쟤들 정신없다.”
마법 한 방으로 꽤 밀리고 있던 전황이 상대편의 진영이 순간이지만 헝클어지면서 비슷한 양상을 띠어간다.
“역시 전쟁은 마법사지.”
방패전사가 엄지를 척 치켜든다. 챠밍도 그걸 보고 미소 짓더니 한참 기다렸다가 쿨타임이 돌아오자 다시 한 번 파이어 월을 쏘아 보냈다.
아까처럼 완전히 밀집되어 있지 않아서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상대방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엔 충분한 효과를 주는 중이다.
불리한 진영을 불 마법으로 아예 막아버리니까 밀리고 있던 분위기가 대번에 뒤집어졌다.
“야! 어디야? 그 마법사 찾아!”
켈베로스 쪽에서는 파이어 월을 써대는 마법사를 찾기 위해서 한참 뒤지다 결국 챠밍을 찾아냈다.
“저기다! 저거 잡아!”
챠밍을 발견하고는 무려 두 개의 풀 파티가 방패전사가 막고 있는 쪽으로 뛰어들어온다.
“개 때처럼 몰려드네.”
방패전사가 라지 쉴드를 꽈악 쥐고 정면을 막아선다.
“내 뒤로는 못 지나가지.”
【 라이트 소드! 】
그러고는 아예 라이트 소드까지 켜버렸다. 오래는 못 막으니까 그동안이라도 확실하게 막겠다는 생각이다. 힐로 조금씩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기도 하고.
이쁜소녀도 바로 옆에 와서 글레이브에 라이트 소드를 켜고 버티고 나르샤는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리는 중이다.
챠밍도 이렇게 근접한 상태에서는 파이어 월을 쓰기 힘드니까 매직 애로우를 쏘아 내는 중이다. 풀 차징하면 넉백 효과가 있어서 적을 멀리 밀어낼 수 있으니까.
“니들끼리 되겠냐. 도와!”
어느새 방패전사의 옆에 몇 명의 사내들이 더 나타나서 블록을 쌓고는 같이 싸워준다. 신화 길드원들이 바로 나타나서 빈자리를 메웠다.
챠밍이 옆을 보니 처음 보는 남자 마법사가 와서 마법을 영창 중이다.
“아무래도 여기를 도와야 저희가 이기겠네요.”
푸른 쇼트 헤어 남자 마법사가 정면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한다.
한참 그렇게 진형이 유지되는데 갑자기 켈베로스 길드 쪽에서 회색의 헤어를 가진 날렵하게 생긴 남자가 장대높이뛰기 하듯이 장창의 창극을 땅에 찍고는 그 반동으로 사내들의 블록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버렸다.
“뭐야?”
“잡아! 마법사들한테 가게 하면 안 돼.”
이쁜소녀도 순식간에 돌아서 달려오는데 거리 차이가 제법 나서인지 따라잡지를 못한다.
“언니! 피해!”
【 아이스 볼! 】
【 바인드! 】
챠밍과 남자 마법사가 마법을 쓰면서 뒤로 빠지는데 장창을 쥔 사내가 스탭을 옆으로 밟더니 아이스 볼이 날아드는 궤적과 바인드가 생겨나는 범위를 엄청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피해 버리고 다시 달려든다.
“피해?”
챠밍은 주호 말고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순간 당황했지만 마법사치고는 꽤 높은 민첩으로 뒤로 빠지면서 다시 아이스 볼을 날렸다.
남자 마법사는 민첩에 투자를 아예 안 한 건지 그 자리에 서서 바인드 마법을 쓰다가 목에 장창에 찔리고 HP가 확 내려가면서 경직되었다.
처리하는 시간도 아까운지 장창을 든 사내가 마법사 남자를 무시하고 곧장 챠밍에게 달려들었다.
【 아이스 볼! 】
이번에 쏘아 보낸 아이스 볼은 가까워서 도저히 못 피하는지 사내가 한쪽 다리에 그대로 맞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서는 반동으로 온몸을 비틀면서 장창의 창극을 겨누어 챠밍에게 쏘아냈다.
“꺅!”
쏜살같이 공기를 찢으며 단 몇 초 만에 챠밍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아주 긴 장창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는 챠밍이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창극이 대기를 가르고 날아와 챠밍의 머리에 닿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강직한 팔이 챠밍의 상체를 강하게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반대 손의 장검을 빠르게 휘둘러 창을 멀리 쳐내 버렸다.
“미안요. 좀 늦었죠?”
챠밍이 올려다보니 주호가 자신을 품에 꽉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장창을 쏘아낸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