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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28화 (28/1,404)

# 28

#28화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2)

“조건부터 좀 들어보죠.”

아예 안 할 생각은 아니다. 보수가 충분하고 시간상으로 여유가 된다면 이번 단기 계약처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DS에서 했던 검사들은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주로 커스텀 VRS 안에서 감각과 반응에 관련된 검사가 주를 이루었고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유혜선 팀장이 적절히 조절을 해주었기에 괜찮은 편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혜선 팀장이 원하는 데이터를 뽑아서 자신들의 4세대 VRS에 적용한 것이 지금의 결과고. 서로 원하는 결과를 얻었고 서로 만족했다. 단기 계약이었고 적절히 원하는 수준의 계약금도 받아냈다. 몸의 상태도 점검할 수 있었고.

유혜선 팀장이 허둥지둥 준비해 온 조건을 이야기해 준다. 한참 듣다가 손을 저으며 이야기를 끊었다.

“기각”

“네? 왜요!”

“그거 대체 개발 기간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예상하기로는 어림잡아 5년? 길면 7년 정도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데…… 길다. 너무 길다. 거기에 직원처럼 거의 매일 출, 퇴근하듯이 참여해야 한단다. 이미 글렀네. 모르모트 생활을 그렇게 오래 할 자신은 없다. 이젠 돈이 문제가 아니다. 뭐 눈이 확 돌아갈 만큼 준다면 또 모를까.

“보수는 왜 이래요?”

“좀…… 적죠?”

“네, 이번에 돈도 많이 벌었을 거면서 왜 이렇게 짜요?”

“제 생각 같아서는 막 퍼다 드리고 싶은데…… 말씀드릴 수 없는 내부 사정이 좀 있어요.”

그러면서 한숨부터 쉰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깊은 한숨이 유혜선 팀장이 얼마나 낙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건 더 물어봐야 답이 안 나오려나.

“보수는 일단 그렇다 치고 대체 왜 이 정도로 자주 합니까? 전에는 안 그랬지 않나요?”

“그건, 막바지 밸런싱 작업이어서 주승호 씨가 적게 참여해도 됐어요. 이미 거의 모든 작업을 마친 상태에서 주승호 씨란 양념을 친 거예요”

“그럼, 다음에도 그 정도만 하면 안 될까요? 한 5년이나 뒤에 말이죠.”

“예에? 안 돼요오오!”

그만 매달려요.

“상식적으로 너무 오래, 많이 해야 해요. 솔직히 그 정도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거든요.”

나도 내 생활이 있고 좀 있으면 복학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지금 로스트 스카이를 하면서 벌고 있는 돈을 생각하면 복학마저 미루면서 다른 것을 올 스톱하고 게임에만 집중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셈이다.

그 말에 잠시 유혜선 팀장이 잠시 멍하게 멈추더니 생각을 정리했는지 말을 잇는다.

“그럼요…… 아, 진짜 어쩌지. 다시 제가 초안을 짜올게요. 최대한 기간이랑 시간도 줄여보고…… 그리고…….”

그 뒤로도 유혜선 팀장은 충분히 공을 들여 설명을 해준 뒤 돌아갔다. 꼭 다시 같이하자고 하면서. 일단은 거절을 했다. 유혜선 팀장이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돌아보는 걸 외면한다고 혼났고.

다음에 다시 보잔다.

그리고 그날 PV에서 날 찾아왔다.

***

내가 전화도 안 받고 연락도 안 되니까 PC방에 와서 죽치고 있었나 보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었는데 주로 말을 하는 것은 남자. 여자는 수행비서 쯤 되는 모양이다.

“일하는 곳 까지 찾아와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송하면 안 해야지. 군대에서도 죄송할 짓을 왜 하냐고 갈구고 그랬는데.

전형적인 세일즈맨 스타일의 검은 슈트에 짧게 올린 머리에 항상 웃고 있는 모습. 눈매가 좀 사납게 느껴지긴 하는데 계속 웃고 있어서 좀 반감된다고 해야 하나.

“PV사 서울 지점 영업총괄부 과장 김택수라고 합니다.”

소개와 함께 명함을 건네준다. 기술 개발부 이런 쪽에서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이상하네. 직책이 좀 이상하지만 상관없으려나. 뒤쪽에 앉아 있는 여자는 소개조차 없다. 그냥 검은 단발에 흰색 블라우스, 검은 치마만 눈에 들어온다.

“전화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PC방은 이런 이야기하기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손님도 오가지 않으니 그냥 이야기하기로 했다. 굳이 다른 장소로 옮겨가면서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날 알고 찾아왔는지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유혜선 팀장에게 다 들은 이야기고 궁금하지도 않고.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닌가 보다. 시시콜콜 다 설명한다. 피곤해지네.

“저기 그런 건 됐으니까. 본론부터 가죠. 제가 지금 일하는 도중이라.”

“이런, 제가 바쁜 분을 모시고 실수했네요. 그럼 이걸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팸플릿 같은 책자와 함께 PV사와 일할 시 받게 되는 계약 초안 같은 것이 적힌 서류들을 보여준다.

어차피 관심은 없지만, 그냥 얼마나 준비해왔나 싶어서 읽어보았다. 적당히 살펴보다가 덮었다.

일단 조건은 DS사보다는 괜찮다. 특히 돈 쪽으로. 이거 계약서도 누출된 것 아냐? 거의 모든 항목에서 더 괜찮은 수준이다.

다만 돈이 올라간 만큼 다른 부분은 많이 안 좋네. 특히 내 개인적인 편의에 맞춰주던 DS에 비해 PV사의 스케줄에 날 맞춰야 하는 경우가 제법 보인다.

돈은 주되, 그만큼 부려먹겠다는 건가? 별로 심보가 안 좋다. 계약 기간도 화려하네. 노예 계약도 아니고. 평생 모르모트 행인가? 사실 돈도 눈이 확 돌아갈 만큼 많이 주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여기는 차선책이라는 애들이 많은가보다. 어쩌면 정보 부족일 수도 있고. 근데 딱히 DS보다 낫다고 보긴 힘들고. 이미 결정한 일이지만 더 그 결정에 부채질하는 계약이다.

“잘 읽어봤고 좋네요. 돈도 많이 주고.”

“네, 저희 PV에서는 DS와 다르게 확실한 지원을…….”

“한데 제겐 별로네요.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제가 더 이상 이쪽 관련 일은 안 하고 싶어서요.”

조금 당황할 만도 한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다시 설명하려는 것을 손을 들어 막는다.

“제가 진짜 안 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이러시는 것이 역효과라는 거 아시죠? 만약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제가 연락을 따로 드리죠.”

정말 진짜 좋은 계약이면 혹할 수도 있을 뻔했겠지만 전혀 아니니까.

“혹시 이미 DS와 계약하신 것은?”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정말 안 하고 싶어서요.”

“……이해했습니다. 그럼 잘 알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무 단호하게 나오자 그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차피 PV도 못 먹는 감이라면 DS만 안 먹으면 된다는 생각일까. DS와 계약한 것부터 물어보는 걸 보니 뻔하다.

“다음에 볼 땐 더 나은 계약 초안을 들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DS와 계약을 염두에 두시고 계신다면 충분히 더 좋은 조건이 저희는 가능합니다. 꼭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내가 더 좋은 조건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지금 밀당하는 중 아닙니다.

사내와 단발 여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 PC방을 나선다. 오전 내 두 회사의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벌써 피곤한 기분이다.

“오빠, 어디 돈 가져다 썼어요?”

“……아니.”

연지 얘는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이 무섭다. 사채 썼는지 물어보는 거 맞지?

“그럼 이 더운 날 시커먼 양복 입은 사람들이 왜 찾아와요?”

그게 궁금했는지 갈 시간이 지났는데 안 가고 카운터에 있었나?

“으음, 그냥 일 때문에.”

“오빠, 학생이면서 무슨 일요? 사고 쳤어요?”

“……아니. 내가 어디 가서 사고치고 다니게 생겼어?”

“뭐, 사람 일은 모르죠. 큰일 아니죠?”

“응. 다 해결됐고 다시 볼 일은…… 아마 없을걸?”

“흐음. 저 그럼 갈게요.”

“너 오빠 걱정돼서 기다린 거냐?”

그 말에 연지가 눈을 흘긴다.

“설마요. 미쳤나 봐. 꿈 깨시죠?”

순식간에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는 PC방을 나간다. 왠지 심적으로 타격이 오는 것 같아.

***

―PV사 사람들 왔다 갔다면서요?

청소를 마치고 손님들 적당히 상대한 다음 앉아서 좀 쉬려는데 문자가 온다. 유혜선 팀장이다.

관심 폭발이네. 다녀간 지 얼마나 됐다고. 어디 사람이라도 심어놨나. 근처를 CCTV로 감시 중이던가.

―네.

―별일 없었어요?

―걱정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네요.

―저 진짜 가슴 졸이고 있거든요?

―네, 진짜 그냥 보냈어요.

참 내가 뭐라고 저렇게 애쓰시나. 확실한 건 이쪽이 훨씬 절실함이 느껴진다.

―다행이다. 그쪽 가면 절대 안 돼요!

왜 이렇게 약 올리고 싶어질까. 나쁜 초딩이 된 기분이다.

―생각해 보고요?

―아! 쫌!

―당분간은 정말 생각 없으니까 안심해도 됩니다.

―……믿어 볼게요.

만약에 하게 된다면 그쪽 계약 조건이 정말 정말 좋아야 할 거라는 말은 하진 않는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검사는 해야 해요. 이건 특별 서비스 같은 거니까 안 한다고 하지 말고.

―계약 내용에 없던 것 같은데요? 회사 차원에서 해주는 건가요?

―아뇨, 제가 불안해서요. 주승호 씨 RTP가 너무 높다 보니 생각보다 안정적이진 않거든요. 주기적인 관리는 필요할 거예요.

―네. 생각해 보죠.

―돈은 안 받을 테니까 걱정 말고 오세요.

―듣던 중 반갑네요, 그건.

공짜 너무 좋아하면 안 되는데. 유혜선 팀장은 저렇게 해서라도 날 붙잡아 두고 싶은 건가? 뭐, 도움이 되니 그냥 받는 편이 낫겠다.

―요즘 VRS 사용 시간이 좀 많이 늘었는데 괜찮을까요?

하다 보니까 점점 플레이 시간이 늘어나는 중이다. 어쩔 땐 잠도 줄여가면서 할 때도 있고. PC방을 이제 곧 그만두니 망정이지. 그리고 솔직히 좀 걱정되기도 하고.

―주승호 씨가 마지막 검사를 받은 지 2주 정도 지났죠? 음…… 지금 상태면 하루 12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VRS 하루 총 플레이 타임이 16시간이니까…… 앞으로 2주 정도 더 적응하시면 남들처럼 제약 없이 쓰실 수 있어요.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문제가 오기 전에 커스텀 VRS가 먼저 알려줄 거예요. 아주 심혈을 기울인 지킴이를 넣어놨으니까.

―지금 정도는 괜찮다는 거네요.

다행이네. 시간을 억지로 늘린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는데 이러면 안심이다. 그리고 앞으로 2주만 있으면 다른 사람 못지않게 플레이가 가능하고.

―대신 다른 곳에서 특히 PC방에서는 절대로 하시면 안 돼요. 정말 큰일 나요. 꼭 집에 있는 커스텀 VRS만 이용하세요. 어떤 경우라도 절대.

―네, 그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잠도 충분히 주무셔야 하고요. 괜히 재미 붙이셨다가 피곤할 정도로 하시면 곤란해요.

그 말에 엄청 찔리는 기분이다.

―지금은 몸이 적응하는 단계라서 무리하면 절대 안 되고요. 점차 시간을 늘려가는 것은 괜찮아요.

―아, 혹시 맥주 한 캔 정도 마시고 VRS에 들어가도 되나요?

―으음, 보통 사람들은 괜찮을 건데 주승호 씨는 말리고 싶네요. 어떻게 변화가 올지 몰라서 권하고 싶지 않아요. 혹시 술 마시고 VRS 하고 싶으시면 미리 유서부터 적어두시고…….

―절대 하지 말라는 소리네요.

앞으로 집에서 맥주 마시는 것은 힘들지도 모르겠다. 맥주 한잔 마시자고 유서까지 쓰고 싶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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