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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27화 (27/1,404)

# 27

#27화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1)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만나고 싶다는 걸까. 분명 검사 결과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무리만 안 하면 남들 수준에서 적절하게 4세대 VRS를 쓸 수 있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문제가 생긴 걸까?

이제 조금 가상현실이 재밌어지려는 것 같은데 다시 못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마음속에서 걱정이 일어난다. 아예 몰랐고 안 해봤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봐버렸는데. 또 다른 세상을.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조금 실망이 클 것 같다.

뭐 그렇게 되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거고 똑같이 살면 된다. 다만 많이 아쉬울 것이다.

***

다음날 동네 커피숍에서 다시 만난 유혜선 팀장은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서 닭 모이 쪼듯 고개를 꾸벅꾸벅하면서 졸고 있다.

이거 깨워도 되는 걸까? 사람을 불러놓고 본인은 꿈나라에 가 있네.

가만히 앉아서 보니 짙은 쌍꺼풀에 얼굴은 작고 오밀조밀하게 예쁜 편이다.

느낌이 갓 졸업한 여대생에게 억지로 정장 입혀놓은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얼굴 가득한 피곤함이 또다시 전해져 온다. 이 사람은 왜 볼 때마다 안 피곤해 보이는 적이 없을까. 일이 너무 많은 거겠지?

보랏빛 헤어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샤르륵 흘려 내린다. 그 모습을 보고 테이블 맞은편에 가만히 앉았다.

너무 곤히 자니 깨우기 미안할 정도. 20분 정도만 기다렸다가 안 일어나면 깨우던가 해야겠다. 무한정 여기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방해가 안 되도록 카운터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하고 멍하니 있었다.

여기는 지나다니면서 자주 본 이 근처에서 제법 오래된 커피숍이지만 실제로 와본 것은 처음이다. 딱히 올 일이 없다고 해야 하나. 누구와 앉아서 커피를 마실 만큼 적절한 상대도 없었고.

보통은 이런 커피숍은 대부분 알바가 카운터를 잡고 있을 건데 알바 시간이 아니거나 원래 주인이 따로 하는 건지 모르지만 주인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여인이 직접 주문을 받아서 커피를 넘겨주었다.

“처음 오셨나 봐요? 못 보던 분이시네요.”

체인점이 아닌 그냥 개인적으로 하는 커피숍인 모양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누군지 기억하는 정도라면.

“네, 여긴 처음 와봤는데 분위기가 좋네요. 시원하기도 하고.”

여름이니 어딜 가나 에어컨을 틀어놓겠지만 알바를 오래 해서 그런지 예의상 하는 말이 좀 늘어난 것 같다. 따로 생각을 안 해도 술술 나온다.

“제 가게를 가지는 게 꿈이었거든요. 꾸민다고 고생 좀 했죠.”

그러면서 여인이 상긋하게 미소 지어 보인다. 편하고 푸근한 인상에 얼굴 가득 지어지는 미소가 밝다.

그 모습에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손수 꾸민 흔적이 가득하다. 그냥 체인점 커피숍과는 확실히 다르다. 30대가 좀 넘어가 보이는 나이에 자기 가게라니 부럽네.

“저기 저분은 애인?”

여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혜선 팀장을 시선으로 가리키면서 물어본다.

푸흡.

뜬금없이 날아오는 언어공격에 마시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아뇨, 그냥 비즈니스 관계라 해야 하나요. 일 때문에 만나는 거예요.”

“그런가요? 이 시간에 오는 남녀 손님은 보통 그래서 그런가 했네요. 자는 걸 안 깨우시려고 여기 서 계시면서 배려하는 걸 보면 애인 사이 같아 보였는데.”

손님이 그렇게 많은 시간대도 아니라 몇 있는 우리를 보고 있었나 보다. 거기다 유혜선 팀장의 저 보랏빛 헤어도 눈에 띄기도 하고.

“그냥 좀 잘 아는 사이에요. 피곤하게 사시는 분이라 깨우기 좀 그래서요.”

“흐음?”

살짝 의심스러운 눈빛이긴 하나 딱히 더 물어보진 않는다. 그냥 앞으로 자주 오시라는 말 정도? 분위기는 좋아서 가끔 와서 있어도 좋을 것 같긴 하다.

“저분 깨셨네요. 가보셔야죠?”

테이블을 보니 유혜선 팀장이 번쩍 고개를 들어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쳐다보고는 당황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저분도 참 귀엽네.

***

“저희 쪽에서 실수를 했어요.”

“그러니까 무슨 문제죠?”

큰 문제인가? 마음의 준비를.

유혜선 팀장이 눈을 질끈 감더니 말을 잇는다.

“저희 정보팀에서 주승호 씨 관련 자료가 PV쪽으로 넘어가 버렸어요. 조심한다고 했는데 다 잡지는 못 했나 봐요.”

“그게 무슨?”

“일단은…… 저희랑 PV가 경쟁 상대인 건 아시죠?”

“그렇죠.”

“국내에서는 저희가 뒤집었지만, 외국 인지도를 보면 PV가 좀 많이 앞서는 편이에요. 저희가 후발 주자다 보니까 조금 그런 점이 없진 않거든요.”

“저도 요즘 자주 듣다 보니 대강은 알게 되네요. 그래서요?”

“사실 개발 규모도 PV가 저희보다 좀 크긴 해요. 애초에 모회사가 국내 1위 그룹이다 보니까 자금을 막 밀어주거든요. 저희는 고작 국내 10위 그룹이 모회사고. 애초에 이렇게 자금이랑 인력, 시설 등이 차이 나는데 비슷한 성능의 4세대 VRS를 만들어낸 것도 어떻게 보면 거의 기적이죠. PV에서 이번에 진짜 깜짝 놀랐을걸요?”

“그 정도로 차이가 있었나요?”

생각보다 규모 차이가 크다. 저 수준이라면 애초에 싸움이 안 되는 것 아닌가? 근데 3세대도 그렇게 밀리진 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그랬다면 우리 PC방에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능은 보급형으로 보면 저희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안정성이 좋아서 같은 스펙이면 저희가 훨씬 좋거든요. 대신 고스펙으로 가면 PV가 더 좋다 보니까. 문제가 좀 있어서 판매량은 많지 않았지만.”

“문제라면?”

“그게 스펙은 높은데 계속 끊기거나 링크가 풀리고 호환이 잘 안 되거나 그랬죠. 프로게이머들이 방송 경기서 사용하는 수준인데 방송사고도 많이 나고 그랬었어요. 덕분에 저희가 반사이익도 좀 많이 봤구요.”

“네, 확실히 문제가 있다면 꺼려지겠죠.”

“그래서 이번에 우리 사장이 성능, 성능 노래를 불렀는데 저희가 이번에 PV꺼랑 대등한 수준으로 4세대 VRS를 내놓아서 PV쪽이 난리가 난 거죠. 성능만은 앞선다고 자부했던 것이 싹 무너졌으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저한테까지 닿았다?”

“네, 그렇죠.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프락치에게 털렸단 소리네. DS 여기 믿어도 되나? 뭐, 내 입장에선 PV나 DS나 딱히 다를 것 없는 상대긴 한데. 어차피 DS도 내 정보를 다른 곳에서 퍼간 거 아닌가?

다만 DS는 최대한 협조를 잘해서 서로 Win―Win 한 경우니까 조금 더 호감이 가지만.

솔직히 DS란 회사보다는 유혜선 팀장을 믿는 쪽이 훨씬 크다. 정말 어지간한 것도 숨기지 않고 세세하게 내 상황을 알려줬으니까. 내 몸 상태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좋았다.

물론 유혜선 팀장은 DS 소속이니 숨기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는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알아낼 기술이 없는 것이 현실이고. 문제가 생기면 계약서대로 하면 될 일이다.

그래도 헌신적으로 도와준 유혜선 팀장은 믿고 싶은 마음이다. 뭐 지금까진 딱히 문제 생긴 것도 없고 말이지.

“회사에선 이걸 많이 불편하게 여기고 있어요. 사실 이번 성능 개선에 크게 작용한 요인이 주승호 씨였는데 그걸 저쪽이 알아버려서 좀 복잡해져 버렸다고 할까요.”

“복잡할 것이 있나요? 이미 DS와는 검사나 실험도 끝났고 PV도 이미 4세대 VRS를 출시하고 판매 중이니까 저도 문제가 없는 이상은 더 검사나 실험에 참여할 생각도 없고요. 혹시 문제가 생겼나요?”

“아뇨! 저희가 얼마나 꼼꼼히 했는데요. 문제는 없어요. 검사나 실험 쪽에서는.”

“그럼 문제없네요.”

“그게 그렇지도 않은 게. 휴…… 혹시, PV에서 사람이 찾아온 적 없었나요?”

“아뇨. 딱히 누가 찾아온 적은 없는 데. 혹시 이건가?”

내가 스마트폰을 켜서 처음 본 번호로 온 연락처를 보여주었다.

“제가 모르는 번호는 잘 안 받는 주의라서.”

유심히 번호를 보더니 스마트폰을 들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번호 좀 알아봐 줘. 응, 그래. 거기야? 아! 그 사람 짜증 나는데.”

통화를 하면서 메모지에 연락처와 몇 자의 글을 적으면서 인상을 쓴다. 전화를 마치고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는다.

“죄송해요. 기다리게 해서.”

“아뇨, 표정을 보니 썩 좋아보이진 않네요?”

“아…… 그게 좀…… 어휴. 예상대로이긴 한데 좀 짜증나는 곳이 나와서요.”

“짜증요?”

“저희랑 붙으면 매번 나와서 쌍으로 지랄하는 놈들이 있거든요. 아…… 말이 너무 막 나왔네요. 죄송해요.”

보아하니 딱 봐도 악연이다.

“별로 안 좋은 곳인가요?”

“저희 입장에선 그렇긴 하죠.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거머리 같은…….”

보통 회사란 게 다 저렇지 않나? 뭐 좀 덜 하고 더 한 곳도 있긴 하겠지만. 이득이 되는 일이면 다 물어뜯고 보는 곳이 회사인데 DS나 PV나 경쟁사니까 더 할 거고.

일단 지금은 이쪽에 관계가 좀 더 있으니 맞장구는 쳐줘야겠네.

“실은 PV에서 주승호 씨에게 계속 접근할 거예요. 이번에 저희한테 좀 밀리다 보니.”

얼핏 DS사의 4세대 VRS가 구현도나 안정성에서 좀 앞선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전에 유혜선 팀장이 자신만만하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확실히 앞서고 있는 모양이다.

유혜선 팀장과의 대화는 많을 것을 알게 해주었다.

일단 PV가 차세대 VRS 개발을 위해 날 필요로 한다는 점. 그런데 아직 접촉을 못 해봐서 이 회사가 왜 그리고 얼마나 날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DS에서는 유혜선 팀장이 강력하게 날 원하고 있다. 이미 한 번 맛(?)을 본 상태고 충분히 더 성능을 이끌어낼 포텐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다.

사실 나를 데려온 유혜선 팀장도 우연이 겹쳐서 날 데려간 거지 원래부터 윗선이 강력히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다음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유혜선 팀장은 저렇게 생각하지만 DS사 윗분들은 똑같이 생각한다는 보장도 없고. 이미 4세대 VRS에서 앞서고 있는 상태서 굳이 당장 애가 닳도록 나를 필요로 할까? 5세대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물론 내가 PV에 간다면 짐 싸 들고 말리겠지만.

“어차피 PV에서 4세대 VRS 개발이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고 성능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거예요. 실제로 저희 거랑 거의 맞먹는 수준이고. 그래서 주승호 씨가 군대에서 나온 것을 알았다 치더라도 바로 연락할 이유도 없었겠죠. 굳이 하려면 5세대 VRS 개발 때 연락하던지. 애초에 모르기도 했겠죠. 관심도가 낮으니까. 저희는 그만큼 급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주승호 씨께 그렇게 투자한 것이구요.”

“사정은 잘 알았네요. 어쨌든 이제 절 알아버린 PV가 찾아올 것이다?”

“네, 그런데 진짜 가면 안 돼요.”

유혜선 팀장이 눈을 못 떼게 하는 눈빛으로 날 본다. 이건 뭐 조건이나 들어보고 말해야지 그냥 매달리면 어쩌자는 건지. 다 큰 처자가 이러니 난감해진다.

“스카웃이나 뭐 그런 겁니까?”

“네, 아마 여러 계약 조건을 가지고 연락하겠죠.”

참…… 내 인생에 스카웃이라는 단어가 생기다니. 근데 그게 모르모트로 스카웃이라니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그래서 그걸 알려주는 이유가 멉니까?”

유혜선 팀장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낸다.

“제발 앞으로도 저희랑 일해요. PV로 가지 말구. 잘해드릴게요! 환경도 최고로 좋게 해드리고, 원하시는 조건에 맞춰드릴게요. 저 아직 원하는 만큼 주승호 씨 몸을 못 만져 봤단 말이에요.”

……마지막 말은 좀 많이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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