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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23화 (23/1,404)
  • # 23

    #23화 나눠 먹는 독약이 제일 맛있다 (5)

    “아마 지금 저희가 맞붙을 수 있는 워 울프 전사 수는 세 마리가 한계일 것 같네요.”

    방패전사가 냉정하게 우리 전력을 평가한다.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전사의 수는 셋이 최대. 그것도 물약의 과도한 소비를 바탕으로 책정된 수다. 두 마리가 적절하다.

    “마법사까지 섞이면 답 없죠.”

    “확실히 그렇겠네요.”

    방패전사의 평가와 내 평가도 딱히 다를 것도 없다. 한 번 붙어보니 견적이 바로 나온다. 마법사는 아직 못 만나봐서 모르겠지만 전사만큼 불편한 존재라면 사냥이 아예 힘들지도. 이 정도 차이면 차라리 궁수 다섯 마리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흙벽 통로를 지나면서 딱 두 마리짜리로 구성된 순찰 울프만 만났다. 통로에서 오래 사냥하는 것은 목 내놓고 죽여주세요, 하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순찰 몹을 잡다가 다른 순찰 몹과 겹치면 대참사가 나니까. 최대한 빠르게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사는 안 나오네요.”

    기대하던 마법사는 상당히 들어가도 보이지 않는다. 중간에 몇몇 방이 보였는데 전부 전사들로 이루어진 방이라 차마 들어갈 엄두도 안 난다. 전사 세 마리 이상의 방이 대부분.

    조금 더 들어가니 의외로 사냥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3층에 와서 처음으로 발견하는 파티다. 한 방을 잡고 사냥하는 중인데 숫자를 보니 8명. 풀 파티다.

    저쪽도 지나가는 우리를 본 듯 잠시 시선만 주고 다시 사냥에 몰두한다. 풀 파티로 결원도 없으니 굳이 관심 줄 이유가 없는 모양. 애초에 이쪽은 네 명 이기도 하고.

    “역시 3층도 사냥하는 사람이 있긴 있네요.”

    다들 방패전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없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8명 풀 파티에 장비가 받쳐주고 렙이 되면 여기는 좋은 사냥터가 될 여건이 충분하다.

    그 뒤에도 몇 파티를 더 발견했다. 거의 대부분 풀 파티. 아까 3층에 오기 전 우리 보고 네 명이냐고 물은 사람이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다들 풀 파티로 내려가는 3층을 네 명이 들어가니.

    사람이 없는 자리는 전부 전사가 세 마리 이상이다. 저런 곳에선 우리가 사냥하기엔 힘들지. 다른 자리를 찾아서 조금 더 들어가니 제법 괜찮은 자리가 나왔다.

    “전사 둘에 마법사 하나네요.”

    방패전사가 방 입구에서 슬쩍 보고 빠진다.

    “여기 자리 잡을까요?”

    “네, 숫자도 괜찮네요.”

    그나마 아직 3층에 사람이 꽉 차지 않는 수준이라 원하는 방을 골라서 차지할 수 있다.

    챠밍과 이쁜소녀도 고개를 끄덕인다.

    “저랑 방패전사 님이 전사에 붙을 테니 이쁜소녀 님하고 챠밍 님이 마법사에 붙어주세요.”

    전사 상대로 이쁜소녀도 잘 싸우긴 하지만 안정적으로 보면 내가 붙는 것이 맞다. 마법사를 빨리 녹여야 하니까 이쁜소녀와 챠밍을 붙이고.

    “그럼 갑니다.”

    나와 방패전사는 요령이 붙어서 이제 전사를 상대로 1:1로도 쉽사리 HP가 깎이지 않고 버티는 편이다. 처음엔 진짜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는데 지금은 잠시 한눈팔 정도는 된다.

    워 울프 마법사를 슬쩍 보니까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인다. 이쁜소녀와 챠밍의 협공에 그냥 녹아내린다. 처음에 마법사가 쏘는 매직 애로우와 파이어 애로우 마법을 몇 대 맞은 이쁜소녀가 물약으로 버티면서 바싹 붙더니 양손검으로 거의 패는 수준. 챠밍의 마법도 줄기차게 날아가서 명중되고 있고.

    빠르게 마법사를 녹인 이쁜소녀와 챠밍이 우리를 도와주니 금방 정리가 됐다.

    “마법이 너무 빨라요.”

    이쁜소녀가 빠른 마법을 피하지 못하고 몇 대 맞고는 뭔가 불만인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근데 저건 나도 당장은 못 피할 것 같은데. 무영창 수준으로 정확히 쏴대는 마법은 피하기 힘들다.

    “불 마법에 맞은 곳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아프거나 하지는 않나요?”

    “으음. 그냥 몸에 불이 붙었구나 하는 정도에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안 아프다는 소리네. 불이 붙었을 때 아프면 어쩌나 했다. 불이 붙었는데 타는 아픔이 느껴진다면 아마 이 게임 유저들 절반 이상이 게임을 접지 않을까. 리얼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근데 난 어떨까 모르겠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저기, 챠밍 님.”

    “네?”

    갑자기 자기를 부르니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저한테 파이어 애로우 한 방만 좀 부탁드려요.”

    “네?”

    챠밍이 무슨 이상한 사람 보는 듯한 표정은 아니지만 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냥 궁금해서요. 파이어 계열 마법을 맞으면 어떨지.”

    “아! 그럼,”

    잠시 파티를 풀고 챠밍이 내게 파이어 애로우를 시전 했다. 맞으니 대미지가 깎이면서 맞은 부위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이펙트가 생기고 HP가 꾸준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맞을 때 반동으로 고통이 살짝 느껴지긴 하는데 불에 타서 아프다는 느낌은 없다. 다행이네. RTP 억제 기능에서 이걸 고통으로 인식했다면 정말 접을 뻔했다.

    “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뭘요. 더 쏴 드려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는데 내가 손사래를 친다.

    “충분합니다. 살려주세요.”

    “농담이에요.”

    챠밍이 살짝 웃으면서 다시 파티를 맺었다. 이 아가씨도 엉뚱한 면이 있네.

    다시 한참 동안 리젠 되는 워 울프 전사들과 마법사를 잡아 보니 확실한 사실을 알게 됐다.

    “마법사는 늑대의 혼을 안 주네요.”

    방패전사가 약간 실망했다는 투로 말하는데 나도 비슷하다. 대신 전사는 꾸준히 몇 마리 걸러 가며 하나씩 주고 있다. 원하는 마법서는 나오지도 않고. 생각보다 드랍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다들 물약이?”

    “거의 없어요.”

    이쁜소녀가 확인하더니 말한다. 방패전사도 비슷하고 챠밍도 이미 물약을 건네준 지 오래고. 파티에 물약이 거의 바닥났다.

    “마을로 귀환해요?”

    챠밍이 귀환석에 손을 올리려는데 방패전사가 손을 들어 말린다.

    “이번엔 좀 다르게 해 보죠?”

    ***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달려요!”

    선두에 방패전사가, 뒤에 챠밍, 이쁜소녀가 따라 달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붙어서 3층 흙벽 통로를 가로질러 달리는 중이다. 순찰 중이던 워 울프 전사들이 크르륵 거리면서 지금 우리 뒤에 십여 마리나 붙어서 따라 달리는 중이고.

    “저기! 입구!”

    접촉이 가능한 이쁜소녀가 발이 느린 챠밍의 손을 잡고 거의 끌다시피 달려서 통로를 지나 올라가고 남은 나와 방패전사가 아주 잠깐 막다가 따라서 올라간다.

    2층으로 올라가니 챠밍과 이쁜소녀가 핼쑥하게 질린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다.

    “이게 되네요.”

    내가 허탈하게 웃는다. 3층에 워 울프 전사가 딱 입구까지만 따라오더니 계단부터는 따라오지 않는다. 이게 안 통했으면 2층에서 대참사가 날 뻔했다. 게시판에 몹 몰이로 PK 하다 같은 제목으로. 2층에 전사를 저 수로 풀어두면 재앙이거든.

    “왠지 될 것 같아서요.”

    방패전사가 씨익 웃자 다들 워 울프 전사를 달고 달리던 긴장이 풀린 듯 따라 웃는다.

    “가끔 방패전사 님 보면 게임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 보이네요.”

    “다른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던전 같은 것이 많거든요. 이곳처럼 오픈 던전 말고 파티로 들어가는 던전요. 그런 게임에서 보통 탱커가 앞서서 몹을 전부 달고 달려요. 막 처맞아가면서요. 그 뒤로 우르르 따라 달리고 하던 것이 기억나서 해봤는데 되네요.”

    “정말 경험은 무시 못 하겠네요. 전 생각도 못 해봤네요.”

    내 말에 방패전사가 그저 웃어 보인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굉장히 만족하는 눈치다.

    “정말 안 따라오네요.”

    이쁜소녀가 3층 입구를 멍하니 보며 중얼거린다. 혹시나 나오면 어쩌나 해서 보고 있는 지도. 챠밍은 그저 재미난 경험을 했다는 듯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잡히면 죽는 괴물들이 뒤에 우르르 따라오는 경험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다시 내려갔을 때 우르르 모여 있으면 어떻게 하나? 그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갔기를 빈다.

    “자! 이제 입구로 물약 사러 갑시다.”

    방패전사가 손뼉을 살짝 치자 다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다. 어차피 1, 2층은 통로나 방 할 것 없이 자리가 다 차 있어서 거의 몹이 없는 것처럼 지나다닐 수 있다.

    던전 밖으로 나오니 전에 봤던 중개상들이 줄지어 앉아 있고 그중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물약이 필요한데요.”

    “몇 개나요?”

    중개상 사람들에게서 물약을 거의 두 배 이상 가격으로 사서 꽉꽉 눌러 채우면서 인벤에 있던 무거운 아이템을 시장가보다 싸게 처분했다.

    물약값이 좀 나가긴 해도 마을을 오가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깝기 보다는 반가운 정도다.

    “그래도 역시 비싸네요.”

    방패전사가 살짝 아쉬운 말을 한다. 방패전사는 시세 같은 것에 은근히 민감해 보이는 반면 챠밍과 이쁜소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지 이미 물약을 사서 기다리는 중이다.

    “그럼 바로 가시죠?”

    방패전사는 역시 사냥 광이다. 그의 입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는 말을 들을 날이 올 수 있을까?

    ***

    “매일 밤에 뭐해요? 또 야동?”

    “아니라니까 그러네.”

    카운터에 반쯤 축 처진 채 엎어지는 나를 연지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재는 내가 무슨 야동만 보는 사람인지 아나.

    “로스트 스카이.”

    “그거 오빠도 해요? 게임은 안 하신다더니.”

    “뭐, 그렇게 됐네.”

    “좋겠네요.”

    “뭐가?”

    “로스트 스카이요. 학생은 하고 싶어도 못 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완전 성인 게임이었지. 성인 게임이라고 하니 말이 이상하네. 그 성인이 아니다.

    “게시판 보니 난리긴 하던데.”

    “네, 지금 거의 집회 수준? 게임물관리위원회 홈페이지도 매일 테러 중이에요.”

    이렇게 보니 연지 얘도 꽤나 하고 싶었나 보네, 이건 관심이 없었다면 절대 모르는 일이다.

    “거기도 피곤하겠네. 우리나라 학생들이 거기서 다 만나겠구나.”

    연지가 그 말에 터진 건지 웃어 보인다.

    “킥. 네. 그리고 다른 포털 사이트에 학생들 모임도 있어요.”

    얘, 웃는 것도 참 보기 힘든데 엉뚱한 소재로 웃기네.

    “게임 홈페이지 도배하는 애들도 같은 애들이겠네?”

    “아마 맞을 걸요? 그냥 학교서 스마트폰으로 글 하나씩만 남겨도 수백 개는 가볍게 넘어가잖아요.”

    “그거 때문에 서로 피곤하겠네. 운영자는 지운다고 바쁘고, 너희는 쓴다고 바쁘고. 차단은 안 해?”

    “미래의 고객님들에게 차단이라뇨. 머리에 총 안 맞았으면 못할 걸요. 욕 같은 것만 안 쓰면 문제없어요.”

    “내가 ZUN사 홈페이지 담당이었으면 벌써 차단했을 텐데.”

    “그럼 오빠 잘리는 거죠 뭐.”

    “그래서 내가 그걸 안 하잖니. 그래서 분위기는 어떤데?”

    “모르겠어요. 겉으로는 안 된다는 뜻인데 포털 뉴스 기사 같은 걸 보면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애매하게 대답해줘서요.”

    “입장이 많이 바뀌었네. 첨엔 죽어도 안 된다는 식이더니.”

    “저희 숫자가 좀 적나요? 매출 엄청 오를걸요?”

    “그만큼 욕도 많이 먹겠지. 학부모님들에게.”

    “우리 아빠는 괜찮아요.”

    그 말에 사장님을 잠시 떠올린다. 그래도 자기 딸인데 공부하라고 할 것 같기는 한데? 모르겠네.

    뭐,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결정이 날 것 같다. 한 명이 따지면 정신병자고 열 명이 따지면 이상한 사람이, 백 명이 따지면 약간의 관심을, 천 명, 만 명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눈덩이 불어나듯이 문제가 된다.

    “잘 되면 좋겠네.”

    “그럼요.”

    그 시간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난 생각 외로 타인에게 무관심할지도 모르겠네. 그냥 본인 일은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하고 말아버리니. 오지랖이 안 넓은 모양이다. 내가 뭐 잘나서 누구에게 훈계를 하겠냐 싶기도 하고. 주워 담지 못할 말은 아예 안 하는 편이 낫다.

    공통의 관심사가 나왔더니 웬일로 말을 많이 하고 간다. 역시 대화는 관심이지.

    “여기 그만두신다면서요?”

    “아. 뭐 그렇게 됐네. 슬슬 준비도 해야 하고.”

    “흐음…… 그렇구나.”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딴청 부리는 것 같은 모습.

    얘는 또 왜 이러지. 막상 그만둔다니까 아쉽나?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닐 텐데?

    “잠깐 폰 좀 줘 봐요.”

    “응?”

    “아! 오해는 마시고! 나중에 복학하면 대학교 가잖아요. 저 학교 구경 좀 시켜달라고요. 그냥 막 들어가긴 좀 그렇잖아요. 거기 제가 갈지도 모르니까.”

    거의 뺏다시피 폰을 가져가더니 번호를 찍어준다.

    “쌩 까고 그러면 알죠? 집에 확 쳐들어갈 테니까.”

    네네…… 그러셔야죠.

    성적 같은 것은 물어본 적도 없어서 모르겠는데 아마 꽤나 열심히 해야 할 거 같은데? 나도 쉽게 들어간 곳이 아니라서 말이지.

    PC방서 방긋 웃으면서 사라지는 연지를 보내고 청소를 한참 하고 있으니 재중이 형과 사장님이 흐물흐물거리며 VRS에서 기어 나오신다. 매일 저렇게 달리셔도 되나. 사장님은 보약이 필요해 보이는데?

    음료와 물을 대령하니 숨넘어가듯 똑같은 자세로 들이키는 두 사람. 며칠 같이 게임하더니 부자 같아 보인다.

    이 모습을 이제 며칠 뒤엔 볼 수 없겠구나.

    “오늘은 좀 일찍 나오셨네요.”

    사장님이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간식거리를 들고 와서 우물거리신다. 재중이 형도 아무 거리낌 없이 먹고 있고. 이제 흡사 가게 물건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데도 사장님은 신경도 안 쓰고 있다. 알바의 진정한 지향점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드디어 잡았다.”

    사장님이 두툼한 손을 불끈 쥐면서 말한다.

    “뭐 좋은 거 잡았어요?”

    “암! 트윈 헤드 워 울프를 잡았지. 또 우리가 최초일걸?”

    이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주인공인 것처럼 다 해 먹는데? 옆을 보니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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