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등 (최종)
그해 겨울 태호는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로 등장했다.
대부분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정치인들이 이름을 올리거나 교황 같은 종교 지도자, 아니면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나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같은 기업인이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태호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까지 꽤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러다 예술작품으로 사회에 이만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없었고 예술인이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적이 없었다는 상징성 때문에 태호가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타임지의 에디터는 태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권태호 작가는 지난 15년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 성실한 작가이며 예술작품으로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을 높이 인정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다."
지금까지 예술가가 올해의 인물에 오른 적은 없었기에 태호 작품의 작품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기존에도 제일 비싼 생존작가였음에도 말이다.
*
타임지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이후 태호의 작품은 모든 미술관에서 기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작품으로 통했다. 그래서 늘 판매할 수 있는 작품이 모자랐다. 이른바 품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전에도 유명했지만, 지금은 할리우드 유명 영화배우 같은 인기에 외출이 불편할 정도였다.
"좋은 방법이 없겠나? 자네 작품을 원하는 곳이 너무 많아. 제작된 작품은 제한적이고."
"글쎄요···."
윌슨의 요구에도 태호는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작품의 퀄리티에 대해 부쩍 신경을 더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명해지더니 질 낮은 작품만 제작해 낸다는 소리를 듣기가 싫었다.
더딘 작품 제작은 얼마 전 제마가 둘째를 낳자 더 바빴다. 아들의 이름은 마크. 마크 제이콥이 자기가 대부되어주겠다며 아기 이름도 자기 이름을 따라지어달라고 한참을 성화였고 결국 그 소원을 들어줬다.
태어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태호는 세라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육아를 도왔고 육아에 바쁜 만큼 작품 제작은 당연히 늘어졌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라와 마크가 커감에 따라 세월의 흔적이 조금씩 태호와 제마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흔적은 태호와 제마의 얼굴보다는 주위 사람들에게 더 크게 드러났다.
윌슨은 갤러리에서 완전히 손을 뗀 후 은퇴했다. 뉴욕의 갤러리를 다니며 거래가 아닌 스스로 즐기기 위한 그림을 샀으며 주위 알던 지인들과 만나 담소를 즐기는 게 주된 일과였다. 가끔 찾아오는 태호와 제마 그리고 아이들을 자식과 손자 이상으로 반겼다.
"은퇴하니까 어때요?"
"바빠. 은퇴했는데도 바빠. 은퇴 전 하고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여기저기 부르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하하."
"다행이에요. 혹시 안 바쁠까 봐 걱정했어요."
"나도 조금 걱정했었는데 불필요한 걱정이었어."
한참 얘기를 나누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윌슨이 태호에게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나도 평생을 바쁘게 살다가 이렇게 은퇴하니까 안 보이는 게 보이더군. 늘 자네에게 일감을 물어다 준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안 되지만···. 자네도 여유를 가져봐. 그러면 안 보이던 게 보일 거야. 나도 은퇴하고 나니까 그림이 달리 보이더군. 형상이 없는 것에 대한 이해도 높아지고 또 좋아하게 됐어."
"그런가요?"
평생 추상화에 관해 관심이 없던 태호였다. 윌슨의 말을 경청했지만 당장에 다가오는 것은 없었다. 윌슨의 말대로 여유를 가질 틈이 없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UAE, 이스라엘, LVMH에서 커다란 프로젝트를 제안해 왔고 그런 작품 제작에 몰입해서 그렇다.
*
부쩍 초상화를 그릴 일이 늘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이를 들면서 그런 경우가 더 많아졌다. 태호가 바쁘다는 건 알지만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고 요청이 들어오지 않아도 태호가 먼저 가서 제안하는 때도 있었다.
친구, 친척, 지인 등, 태호보다 나이도 많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같이 찍은 사진들도 많이 있지만, 사진보다는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상상을 해야 하는 것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해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은 평생 관심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나이 탓인지 기존 작품에 질려서인지 상상 속의 무엇과 형상이 없는 것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대형 프로젝트와 초상화 이외에는 눈에 보이는 걸 그리는 빈도가 줄었다. 고민만 하던 추상화를 실제 그리기 시작하면서다.
처음에는 사물을 단순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최대한 간단히 묘사했다. 그래도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수준의 추상화였다. 다 뜯어서 해체 시킨 후 재탄생시킬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태호는 아직 그렇게까지 불친절해지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마음이 간 건 감정이었다. 태호는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움직이는데 가장 능숙한 예술가 중 하나였다.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태호가 지금까지 감정을 움직이는 방법은 작품 안에 스토리텔링을 넣는 방법이었다. 작품 안의 등장 인물에게 푸른색, 노란색 등을 입혀 관람객의 향수를 자극하는 매우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그런 방법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좀 더 다른 방법을 써보고 싶었다. 그러다 찾은 방법이 바로 심볼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큰 캔버스 하나에 간단한 기호를 이용해 영화 한 편을 서술했다. 그런 후 반복되는 기호를 빼고 영화에 흐르는 감정을 도형과 색깔로 표현했다. 그러자 무척이나 아기자기하고 재밌는 작품이 탄생했다.
영화 타이태닉이 커다란 삼각형 아래 선으로 이루어진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키스하는 남녀의 감정은 물방울을 상징하는 두 개의 원이 겹쳐지고 합쳐지는 모양으로 표현됐다. 물방울의 색은 핑크색이지만 삼각형 뒤의 배경색은 하늘색,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의 배경색은 짙은 파란색이었다.
옆에는 음악이자 바이올린을 상징하는 8자 모양의 도형과 빙산을 상징하는 마름모가 있었다. 그 외의 작은 기호들이 있었고 모두 영화의 소품이나 장면을 상징했다.
연습 삼아 그리기 시작한 작품들이지만 하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오랜만에 제작하면서도 혼자 웃으며 즐긴 작품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그림들이 밝고 유쾌했다.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싸이코에 나오는 샤워신도 작품에 담겼는데 그조차도 귀엽고 에로틱하게 보일 정도였다.
2년에 걸쳐 틈틈이 그린 그림이 40점이 되다 보니 우연히 작품을 구경했던 사람들의 성화에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태호는 지난 10년간, 타임지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이후, 작품 활동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프로젝트 성격의 작품이 많이 제작하고 전시해 100% 태호의 작품이라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 주였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는 달랐다. 2년에 걸쳐 제작된 작품이며 조수조차 쓰지 않고 태호가 손수 제작했다고 알려지면서 전시회에 정보가 정말 온갖 언론에 노출됐다.
즐기긴 했지만, 자신의 추상화에 대해 큰 자신은 없었기에 전시회에 추상화와 관계없는 미공개 작품들도 몇 점 가져다 놨다. 태호답지 않은 소심함에 지인들이 놀려댔지만, 태호는 꿋꿋했다.
작품과 관련해서 비난을 받은 적은 없었기에 이번 작품 공개는 기대되면서도 무척이나 두려운 이벤트였다.
대다수의 사람은 아직도 젊은 이 거장이 기존의 작품 세계를 던져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했으며 일정 부분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 찬사를 보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영화 한 편이 그대로 보여 즐거웠다는 의견도 많았고 드디어 태호 작가의 작품 중에 따라 할 수 있는 작품이 생겼다는 농담도 돌았다.
그 외에도 발상의 전환이 재미는 있었지만 평범했다는 의견부터 태호가 드디어 신계에서 인간계로 추락했다는 농담을 겸한 비난도 있었다.
이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부터 찬사만을 받았다면 추상화 작업도 지겨워졌을지도 모른다.
대중의 떠들썩한 하마평이 지나고 작품을 시장에 팔려고 내놓을 때였다. 갤러리에 전시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다큐멘터리와 너튜브에서 지겹도록 리뷰를 해줬기에 40 작품 모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이곳저곳에서 전시 요청이 많아 벌써 런던과 파리 뉴욕과 서울에서 3달씩 전시회도 돌고 온 후였다. 사람들이 이만큼 초상화에 관심이 많았는지 의아해할 정도로 알려졌다.
태호와 이해관계가 깊었던 미술관에서 몇 작품을 가져간 후 남은 작품들이 경매에 부쳐졌다.
16 작품은 런던의 소더비에서 18 작품은 뉴욕의 소더비에서 경매에 올랐다. 런던 경매에 오른 작품들이 굳이 비교하자면 뉴욕에서 경매될 작품들보다 조금 덜 알려진 작품들이었다. 그래도 흥행을 위해 2~3개의 유명 작품은 포함 시켰다.
경매는 초반부터 그야말로 불꽃 튀었다. 그림이 더 알려진 것과 덜 알려진 것은 가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컬렉터가 좋아하는 추상화는 정말 개인 취향이었기에 돈 많은 컬렉터가 원하는 작품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
5백만에서 1천만 달러 사이에 그림이 경매될 거라는 얘기는 시장 상황을 모르고 나온 얘기였다. 금리가 내려가면서 자산가격이 뻥튀기되자 모든 작품이 가볍게 1천만 달러를 넘어섰다.
태호가 더 이상 기호를 이용한 작품은 제작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경매에 기름을 부었다. 이렇게 비싼 줄 알았으면 15년 전에 나온 빛의 마리아를 샀을 거라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34 작품을 판매한 후 얻은 수익은 5억 8천만 덜러. 한 작품당 1천7백만 달러에 거래되어 미술관 관련된 온갖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들을 갈아치우거나 새로 등재됐다.
*
큰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던 윌슨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윌슨이 떠나고 나서야 태호도 자신이 나이가 들 만큼 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모님도 장인·장모님도 나이가 들어 장거리 여행이 부담스러운 시기가 되었다.
세라와 마크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이었고 여전히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다. 조카들도 마찬가지였다.
집 근처에 멋진 산책로가 있어 제마와 손을 잡고 산책할 때였다. 갑자기 뭔가 머리를 간지럽히며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인생이 뭘까?"
"글쎄···. 이렇게 당신이랑 나랑 같이 길을 걷는 거?"
자기 생각과 다르지 않은 제마의 대답에 태호는 반색했다.
제마의 볼에 키스한 후 집으로 돌아온 태호는 집에 마련된 작업실 한쪽에 커다란 캔버스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하나씩 자신이 평생 그려왔던 작품들의 등장인물을 하나씩 그려 넣었다.
한 가지 주제로 그린 것도 아니었고 전체 모습을 생각해 놓고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그날 떠오른 감정을 담아 마치 일기 쓰듯 작품에 채워 넣었다. 처음에는 작품을 그려 넣었지만, 나중에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지인들을 그렸다. 어릴 적 모습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중요한 장면도 하나하나 담겨가기 시작했다.
인생을 그린다고 하던지 작품에 혼을 담는다고 해야 맞을 듯한 작업 과정이었다. 워낙 캔버스가 컸기에 처음에는 채울 자리가 많았지만 워낙에 그림 제작 속도가 빠른 태호가 집중에서 그리다 보니 캔버스의 하얀 부분은 빠르게 사라졌다.
공간이 부족하면 크기를 줄여서라도 캔버스에 채워 넣었다. 놓친 장면은 기존 장면 위에 덧칠했다. 그림의 존재를 알게 된 지인이 요청해서 넣은 장면도 있었다. 캔버스 정 중앙에는 제마와 태호가 손을 잡고 정면을 웃으며 바라보는 그림이 있었다.
태호의 인생이 모두 담긴 작품이었다. 그림을 놓고 하나하나 짚으며 이 장면이 어떻게 그렸고 왜 그렸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참을 설명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려도 그려도 끝이 나지 않는 작품이기도 했다. 자신이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말이다.
작품의 이름은 '주마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