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최 회장은 비서를 잠시 옆으로 물렸다.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얘기이기에 그랬다.
"모르신다고요? '세 목숨'이 사모님 선물 덕분에 그린 그림인데 모르셨어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놀란 표정의 최 회장. 그러거나 말거나 태호는 자기 할 말을 했다.
"이 미술관이 왜 성호 미술관인지 아십니까? 모르실 겁니다, 관심이 없으시니."
"..."
"성호는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의 호입니다. 회장님 아드님과 불운하게 엮이는 바람에 돌아가셨죠. 불.운.한. 사고로 말이죠. 그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이제는 사모님이 제 둘째를 죽이시더군요."
"... 그게 무슨 소린가!"
최 회장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놀람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회장님의 아내 김미애 씨의 비서가 김미애 씨의 명령에 따라 나에게 테러를 가했다고 자백했어요. 설마 나하고 일면식도 없는 그놈이 이유 없이 테러를 가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죠?"
"..."
"2년 전에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체면을 한참 구겨서 지금 벼르고 있어요. 미국 대통령만 그런 줄 알아요? 영국하고 프랑스, UAE, 이스라엘까지 비난 성명을 발표할 거예요. 나에게 그래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부드럽게 웃으며 태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이거 로비하려고 각국의 대통령 궁이며 총리실에 그림을 몇 점이나 그려준 줄 알아요? 정말 남는 거 하나도 없이 지난 이 년간 고생했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품 설명하고 그린 그림으로 대통령이나 총리에게 로비하느라."
웃으면서 자기 고생했다고 말하는 태호의 표정엔 악동의 장난기가 가득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난 가보겠네."
최 회장의 떨리는 목소리와 후들거리는 다리는 지금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내일 아침 5시, 워싱턴 DC 시간 오후 3시 미국 대통령 정례 발표 때 사이버 위협 관련 성과 보고에 이거 올라갈 거에요.
ST가 사이버 테러 지원 기업으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 잘 무마해 보세요. 능력 좋으시잖아요.
지금이 오후 3시 좀 넘었으니까···. 14시간 남았습니다, 회장님. 그 시간 후로도 회장으로 불릴지는 모르겠지만···.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라는 유아용 프로그램 작별 인사처럼 태호는 활기차게 최 회장에게 인사했다.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떠나는 최 회장의 뒷모습을 보며 태호는 웃던 표정을 싹 바꿨다.
*
최 회장이 떠나는 뒷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 영준이였다.
"너 정말 대통령 궁이니 총리실에 그림 공짜로 넘겼니?" 영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태호는 주위를 둘러보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영준에게 대답했다.
"에이, 아버지도. 제가 공짜로 왜 넘겨요? 좀 싸게는 넘겨도."
"그렇지? 나도 네가 그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왜요?"
"네가 지금까지 해 온 걸 봐! 네가 작품 판매할 때 하는 거 보면 살벌하기까지 하더라니까."
"그거야 윌슨 씨가 하는 거고요. 그래도 돈도 쓰잖아요. 이 건물처럼요. 이거 제 돈 들여서 지은 건데."
"이게 네 주요 재산은 아니잖니."
"그래도 한 1/10은 돼요."
"아닐걸? 그만큼 안될 거다. 요즘 구글하고 LVMH 주가가 얼마나 오르는데."
"그래요? 몰랐어요."
영준은 주위를 둘러보다 더 조심스레 물었다.
"너 그 ST 주식 선물거래 했니?"
"그럼요."
"얼마나?"
"한 1조? 주식 꽤 팔았어요. 여기저기 총알 끌어모으느라 힘들었고요."
아들의 스케일에 영준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뭘 하려고?"
"이 기회에 본때를 보여야죠. 최 회장부터 사주 일가라고 ST에서 능력 없이 회사에 기생하던 최가 사람들 다 몰아내려고요."
"넌 이 판을 어떻게 다 짠 거냐? 주식은 그렇다 치고 정부가 ST 지원하면? 한국 정부를 어떻게 설득했어?"
아무리 미국 정부가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한국 대기업에 귀띔도 안 하긴 힘들다고 생각했다.
태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마가 유산한 게 컸어요. 영부인인 멜라니아가 정말 화가 많이 났거든요. 보니까 제마는 저에게도 비밀로 하고 멜라니아에게 먼저 말할 정도였는데···. 멜라니아도 정말 기뻐했는데 그렇게 유산을 해버리니까···.
평소에 조용하던 멜라니아가 베갯머리 송사를 한 거죠. 안 그래도 2년 전 사건으로 자존심이 상해있던 트럼프가 정말 강하게 한국 정부에 요청했어요.
한국 정부가 협조 안 했으면 미 정부가 ST에 독자 제재안 발표했을 거예요. 거의 미국이 북한 때리듯 했을걸요? 한국 정부도 국내에서 2번째로 큰 회사 넘어가는 거 안 보려고 꼬리치기 하는 거예요."
"공격은 그게 다냐?"
"물론 아니죠. 살점 뜯어 먹으려고 하이에나들이 꽤 붙었어요. 내일 아침 한국 시장부터 ST 관련 주식들 다 박살 날 거예요."
영준은 소름이 돋았다.
"그 하이에나들은 누구냐? 네가 끌어들인 거냐?"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도와주겠다고 그쪽에서 먼저 연락 왔어요. 백악관 뒷배겠죠."
영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기금도 껴요."
"거긴 왜?"
"수비수죠. 개미들 죽는 거 구해주려고요.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최씨 일가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압력을 넣을 것 같아요. 사주일가 몰아내려고요. 아마 전문경영인 체계로 전환할 것 같아요."
영준은 아들의 설명에 어안이벙벙할 지경이었다.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거의 한국 경제 구조의 한 축을 무너트리고 새로 짓는 수준이었다.
"제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에요. 그저 방아쇠 역할만 한 거죠. 작품으로요."
"하하. 그래. 이것만으로도 엄청나다. 다 네가 발이 넓어서 그런 거 아니냐."
영준은 태호의 어깨를 두드리고 태호를 따라다니며 미술관 관람을 시작했다.
*
다음날 새벽.
트럼프는 대통령 정례 발표 때 비트코인 거래 내역을 역추적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발표했다. IS와 같은 테러 단체가 비트코인을 이용해 불법 무기 거래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또 이 기술을 이용해 태호에게 테러를 가한 진범을 한국에서 찾았으며 현재 미국 송환을 위해 한국 정부와 협의 중이라 밝혔다. 또한, 이번 테러를 지원한 단체나 기업을 찾았으며 적절한 후속 조처를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기자와의 질의 시간. 한국에서 테러를 지원한 단체가 어딘지를 묻는 말에 동맹국인 한국 정부와 논의 중이며 곧 한국 정부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 대답했다.
한국에선 새벽에 있었던 발표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이 드러나자마자 재계가 말 그대로 초비상이 걸렸다. 출근 차량으로 기업 주차장이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침 8시.
주식 시장엔 특이한 공시가 떴는데 ST 지주회사 및 관련 회사의 유가증권 매매를 정지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알아버렸다. 몇 시간 전 미 정부가 말하던 한국의 테러 지원 단체가 누구임을.
세계 각국에서 한국 정부와 ST에 대한 공식 유감 표명이 이어졌다.
아침 9시.
코스피와 코스닥 거래 정지 사이렌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옛날 IMF 이후 최악의 하락장이 연출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당황했으며 ST 주식을 많이 들고 있는 사람들은 ST 지주회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통화 중이었다. 연결이 안 되자 직접 방문하려는 사람이 늘었으며 회사 근처는 항의하러 방문하는 사람들로 빠르게 붐비기 시작했다.
아침 10시.
한국 대통령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었다. 재경부 장관이나 총리가 해도 될 일이었지만 미국 대통령이 언급한 일이라 한국 대통령이 나섰다.
ST 그룹 사주 일가가 태호에게 테러를 사주했으며 태호와 그 가족이 그때의 충격으로 오랜 기간 고통받았다고 설명했다. 유감과 심심한 위로를 전한 대통령은 ST 그룹의 자구책을 기다리고 있으며 미흡할 경우 정부의 추가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재경부 장관은 이번 조치로 한국은 변화를 겪겠지만 펀더멘탈에는 문제가 없으며 미국 정부의 ST에 대한 제재도 없을 거라 밝혔다.
아침 11시.
ST 그룹은 최 회장 이하 모든 사주 일가가 회사의 경영권을 포기함은 물론 회사에서 퇴사하겠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주요 지분을 매각하여 ST 그룹과의 특수관계인 자격에서도 벗어나겠다고 발표했다.
화면에서 보이는 최 회장은 하루 사이에 10년은 늙은 듯 보였다.
오후 4시.
최 회장의 부인 김미애 씨가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제발 뒷문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ST 그룹의 간청은 일언지하 묵살 되었다.
이번 사태의 모든 것을 김미애와 ST 사주일가에 집중되길 원하는 정부와 이해관계자가 합심해서 벌인 일이었다.
그날 저녁 이후 TV를 켜면 듣고 볼 수 있는 뉴스 대부분은 ST 관련 소식이었다.
다음날.
전방위적으로 ST 사주 일가에 지분을 빨리 넘기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최 회장 일가가 버티기에 들어가자 정부는 최씨 일가 전체를 먼지 하나까지 조사하겠다고 전달한 후 미리 준비한 게 확실한 사상 최대의 조사팀을 발표했다. 조사팀에 포함된 당사자 대부분이 사전에 포함 여부를 몰랐을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작업이었다.
한 달 뒤.
ST의 새로운 경영진이 발표되었다. 대부분 내부 승진이었다. 다만 사외 이사로 영준이 포함되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지분 공시가 있고 나서 모두가 알았다. 성호 미술관이 ST 지주회사 지분뿐만 아니라 주요 계열사 지분을 5% 이상 취득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영준은 사외이사에서 등기이사로 전환됐다.
감사 관련 등기이사로 전환되자마자 영준이 요구하고 지휘한 일은 직계는 아니지만 최씨 일가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 고가를 확인하고 그에 따른 인사 재배치였다.
이는 한국 대기업의 실태를 잘 아는 영준이 벌인 일로, 탁월한 실적을 보인, 꼭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직원이 아닌 이상 주요 부서에서 모두 배제 시켰다. 능력 없고 실적도 없던 그야말로 회사에 기생하고 있던 직원들은 얼마 가지 못해 모두 회사에서 쫓겨났다.
태호에게 잊었다고 참으라고 말했지만 사실 영준도 그때 일을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
지난 일 년 동안 한국 경제 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오너 리스크의 대두였다.
지금까지 한국 재벌에서 부각된 오너 리스크는 언론을 무마하는 수준에서 해결이 되었지만, 한국 기업이 전 세계에 활동 범위를 넓힐수록 오너 리스크는 한국 언론을 해결하는 것으로 무마가 되지 않았다.
이번 사건으로 오너 리스크의 위험성과 파급력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고 실제 반영되기 시작했다. 주주 가치가 강조되고 있는 요즘 주가가 박살 나고 회사 평판이 추락하자 실제 매출이 꺾이고 수익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해외 유명 경영학 교수들의 인터뷰가 뉴스를 통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국 재벌은 여러 산업에 걸쳐 자회사를 가지고 이를 한 가족이 공동 소유하는 형태의 기업이다. 이번 ST 그룹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오너 일가의 리스크가 확대하여 해석되고 과대 적용될 경우, 기업이 뿌리째 흔들릴 정도로 위험에 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경우 실질적인 피해를 보는 것은 주주와 직원이다. 이는 결코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은 이런 전 근대적인 기업 구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ST 그룹을 기어이 전문경영인 체계로 탈바꿈시킨 정부는 그 기세를 이어 족벌 적 경영으로 문제가 많았던 기업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연기금이 회사 주식을 많이 들고 있을 경우 그 압력 강도가 셌으며 정부가 타겟으로 삼은 기업들은 하나둘 그 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정부가 마음먹고 회사를 털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 인지 ST를 통해 보여줬기에 버틸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태호가 쏘아 올린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