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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소포 (177/181)

뜻밖의 소포

"이게 한국 대기업의 사과와 위로 방식이군요."

삐딱한 태호의 말에 비서실장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태호를 바라봤다.

"최 회장님은 권태호 작가님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한 개인에게 이 정도로 정중하게 사과를 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군요. 구원을 정리하고 발전적 관계를 원하시는 저의 회장님의 진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서실장의 말은 정중하지만, 법적 절차에 맞춰 명분을 쌓기를 하는 듯한 말로도 태호에게 들렸다. 제일 거슬린 건 비서실장의 표정이었다. 미안함을 가장했지만, 그 와중에 묻어나오는 자신만만한 표정은 태호의 빈정을 상하게 했다.

최 회장이 나름 자신을 위한다며 비서실장을 보내왔는지는 모르지만, 최 회장 밑에서 호가호위를 오래 해서 그런지 몸에 밴 고자세가 조금씩 드러났다.

최 회장이나 비서실장 같은 자들은 앞에서는 사과하지만, 뒤에는 칼을 들고 있다가 언제 자신의 등을 찌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태호는 여기서 한 번 더 경고할 필요를 느꼈다.

"혹시 말입니다. 내가 최 회장님이나 최정현의 이런 사과가 거짓이라 생각하고 다음 행동을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비서실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이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서로라고 말했지만, 불행하게 되는 건 태호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태호는 이 말에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하고 최 회장이 허튼수작을 못 부리게 한 번 더 경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요. ST만 불행하게 될 겁니다."

태호는 딱 짤라 선언하듯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최 회장님이 보낸 사과와 위로가 너무 매끄러워 이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최 회장님에게 전하세요. 사과와 위로는 잘 받았다고. 다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시하겠다고 말입니다. 지금이야 내가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우니 일시적으로 이런 접근을 하지만 몇 년 뒤에 어떻게 바뀔지 압니까? 미국은 4년마다 정권이 바뀌는데."

"..."

"나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알아보고 오셨을 텐데···. 아마 확인 못하신 게 있을 겁니다."

태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비서실장은 바싹 긴장했다.

"최 회장님은 내가 그림이나 그리고 자문위원이나 하며 미국과 UAE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인사 정도로만 보실 겁니다. 자기와 ST를 방해는 해도 직접적인 위협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실 텐데, 그건 잘못 아신 겁니다."

이번엔 태호가 잔잔히 웃으며 비서실장을 봤다.

"나와 Theo가 LVMH의 주식을 얼마나 들고 있는지. 내가 구글 주식을 얼마나 들고 있는지 아십니까?"

비서실장이 대답을 못 하자 다시 물었다.

"아시냐고 물었습니다만."

"... 모르겠습니다."

"재벌 앞에서 무슨 돈 자랑이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적어도 최 회장님 일가와 경영권 다툼은 할 정도의 돈이 있습니다."

최 회장 일가와 경영권 다툼을 할 정도면 대충 생각해도 몇조의 돈이 필요할 텐데, 태호가 그 정도의 재산이 있다고 파악하지 못한 비서실장은 얼굴이 노래졌다.

"이만 가보세요.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태호의 축객령에 비서실장은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하고 태호 집을 나섰다. 그렇지만 태호의 재산을 제대로 파악 못 한 자신의 실수로 인해 (물론 파악할 수도 없었지만) 많이 당황했던지 허겁지겁 떠났다.

비서실장이 사라지자 태호는 끌어 오르던 화를 식히기 위해 퇴근했다.

운동하며 화를 식히는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금방 전 비서실장에게 했던 경고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입으로만 떠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돈 여우라고 불릴 정도로 똑똑한 최 회장이라면 모르겠지만 집안에 그렇지 못한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뭔가 더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은 최 회장은 이마의 주름이 펴질 줄 몰랐다.

"그 녀석이 그러던가? 가진 재산으로 나와 경영권 다툼을 할 정도라고?"

"정확한 금액은 말하지 않았지만, LVMH의 주식과 구글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대충 얼마지?"

"회장님 일가와 경영권 싸움을 하려면 못해도 3조 이상 필요합니다."

"그런 재산을 모았다고? 어떻게?"

"추측이긴 합니다만 Theo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받은 주식과 그동안 작품을 매각하며 받은 현금을 모두 LVMH와 구글 주식에 투자했다고 하면 못 모을 금액도 아닙니다. 태호 작가는 10년 가까이 현존 최고 작가로 군림해 왔으니까요."

3조라면 ST 그룹 지주회사 주식의 20%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액이었다. 시가 총액이 더디게 올라가는 자신의 회사에 비해 태호가 들고 있는 두 회사는 급속한 성장을 하는 회사이기도 했다.

물론 지주회사의 주식이 그룹 전체 지분의 일부이기도 했고 또 드러나지 않은 재산도 상당하지만, 태호가 들고 있는 회사의 주가는 적어도 자기 회사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올랐다.

태호가 4천억씩을 들여 미술관을 짓는다기에 허투루 돈을 쓴다고 비웃었는데 지금 보니 무리이긴 했지만 못 쓸 돈도 아니었다.

"태호와 관련된 모든 작업···. 중단시켜."

꿀벌인 줄 알았는데 말법 집을 건드린 것 같아 최 회장도 골치가 아파졌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뭔가?"

"사모님이 손을 쓰실 것 같습니다."

"집사람이? 뭘? 어떻게?"

"그것까지는···."

"알았어. 이건 내가 알아보지."

못난 아들의 성질머리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자신의 아내가 또 사고를 쳐버렸다. 전이야 아들의 실수로 그랬다고 넘어갈 수 있지만, 아내까지 문제를 일으키면 불필요한 지분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지지야 않겠지만 그 과정에서 소요될 쌈짓돈을 생각하면 정말 쓸데없는 돈 낭비였다. 돈 낭비는 최 회장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기도 했다.

*

최 회장의 아내 김미애는 아들이 후계 구도에서 사실상 밀려났다는 소식에 불같이 뛰며 해결 방안을 찾았다. 최 회장의 재혼 상대였던 김미애로서는 자기가 배 아파 나은 자식이 아닌 전처 자식에게 모든 걸 다 빼앗겼다는 생각에 울화병이 생길 정도였다.

남편에게 하소연은 기본이고 너무 화가 나 개인적인 분풀이까지 해도 성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절대로 사람을 고용해 해코지해서는 안 됩니다. 성공 확률이 낮음은 둘째치고 미국 정부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태호와 그 주변엔 사모님의 행적을 찾을 힘과 권력이 있습니다."

비서실장은 김미애의 호출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절대로 허튼짓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걸 들을 김미애가 아니었다.

재산이 많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얘기까지 하려고 했지만, 확 뒤집힌 김미애의 눈을 보니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비서실장이 사라지자 김미애는 곁에 있던 비서에게 분풀이 방법을 물었다. 그녀의 곁에는 이럴 때 나쁜 꾀를 빌려주는 유능한 비서가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이 예술가라고 했으니 작품 하나 보내주시죠, 사모님."

"무슨 작품인가?"

"영국에 데미안 허스트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는 작가인데 초기 작품 중 파리가 들끓는 소머리를 작품이라며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 선물이면 좋은 경고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 그거 괜찮군. 그놈 아내가 보고 콱 유산이라도 했으면 좋겠어. 자네가 조용히 손을 써봐······. 이거 추적당할 수 있나?"

"절대로 없습니다, 사모님."

"자네 책임하에 시작해."

걸리면 꼬리 자르기를 하겠다는 김미애의 말에도 비서는 흔쾌히 이번 일에 착수했다. 나쁜 일을 할 땐 김미애가 보내는 봉투의 두께가 꽤 두꺼웠기 때문이다.

나름 똑똑했던 비서는 다크웹과 비트코인을 이용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소머리 두 개의 배송을 주문했다. 하나는 젓소 하나는 황소였다.

최 회장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을 때는 이미 비서가 결제를 마친 뒤였다.

김미애도 아들만큼 동작이 빨랐다.

*

제마와 태호는 집에 배송되어 온 두 개의 상자를 보고 느낌이 좋지 않아 고용인 중 한 명과 태호만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둘째를 가졌고 임신 극 초기인 제마는 워싱턴 D.C도 방문하지 않고 몸 관리 중이었기에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경찰까지 불러 마치 폭탄 제거라도 하듯이 열어본 상자 안에는 비닐로 잘 포장된 소머리 두 개가 핏물에 젖어 있었다.

거칠게 잘려나간 소머리를 보자 구토가 치밀어 올라왔다. 억지로 위액을 삼킨 태호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제마가 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침착하게 있지도 못했을 거다.

태호는 아버지와 장인에게 먼저 연락했다. 영준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니 장인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전했고, 장인인 마틴은 태호에게 일단 제마에게 가 있으라고 했다.

마틴이 선택한 해결 방법은 물밑에서의 조용한 해결이었다. 범인부터 잡고 나서야 다음 단계의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증이야 한국의 ST 그룹으로 향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덮어지는가 싶었던 사건은 며칠 뒤 제마가 정말 유산을 하면서 확 반전했다.

마틴의 분노는 대단했다. 손녀딸 세라의 재롱에 주말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 왔고 삶의 낙이었다. 은근히 둘째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임신 사실을 알기 전에 유산 소식을 먼저 들으니 분노로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협박이나 원한 사건이 벌어진 뒤 며칠 후이며, 제마는 실제 소머리는 보지도 않았지만, 마틴에겐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벌어졌고 막내딸이 유산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뉴욕 시장, 뉴욕 주지사, 대통령까지 연락했다. 평소 아쉬운 소리 없이 살던 마틴이 전화를 돌려 분노를 표하자 그의 오랜 골프 친구들이 자신도 알아보겠다며 마틴을 달랬다.

연락을 받은 트럼프는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돈 안 들이고 친우에게 생색을 낼 기회였다. 더군다나 롱 아일랜드의 부잣집까지 얽혀있어 이런 협박에 민감한 그들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이번 협박 사건을 중대 범죄로 지정하고 관련 사정 기관에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색출할 것을 지시했다.

얼마 뒤, 범인과 범행 방법까지는 찾았지만, 범인도 이메일과 비트코인으로 의뢰를 받아 의뢰 범이 누군지는 찾을 방법이 없었다.

"마틴, 자네 사위를 해코지한 범인을 찾을 수 없어 유감이야. 아직 찾을 수 있는 기술이 없다더군. 조금만 기다려보게. 한 2년이면 범인을 찾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고 하니."

자존심 강한 트럼프가 두 손을 들자 마틴도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ST 그룹에 제재를 가하려 했으나, 심증만 가지고 ST에 압력을 가하는 모습이 공권력을 이용한 한 개인의 복수처럼 비칠 수 있다는 조언에 따라 그만두었다.

범인을 찾을 수는 있지만, 시간이 걸린다는 소식이 태호에게도 전해졌고 태호는 생각해 두었던 자기 방식의 복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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