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그리고 ...
비서실장도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이따위 실적으로 어떻게 본부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거지? 우리 그룹이 이것밖에 안 되나!"
비서실장의 눈은 거의 바닥만을 향하고 있었다.
"인사부장 오라 그래."
인사부장이지만 이사 대우를 받는 그는 급하게 뛰어 올라왔다. 분위기가 안 좋다는 얘기를 듣고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목 뒤가 땀에 젖을 만을 서둘러왔다.
인사부장을 본 최 회장은 아들의 인사 정보가 담긴 서류를 보여주며 물어봤다.
"이 녀석 보낼만한 곳이 있나?"
인사부장은 최정현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이었다가 바로 표정 관리를 했다.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시는지요?"
"트럼프 정권 동안 조용히 지낼만한 자리. 하지만 열심히 하면 실적을 낼 수 있는 자리."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사는 말을 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원유나 희토류 같은 자원 개발 사업이 있습니다. 어렵지만 대단한 성과를 이룰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인도에 유통업 진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고급 아웃렛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꽤 난이도가 있지만, 성과도 어느 정도 보장된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인도네시아 유통업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블루오션 마켓 중 하나로 제일 무난한 자리입니다."
"인도네시아는 빼지. 너무 쉽군. 카자흐스탄하고 인도 사업 계획서 가져오게."
인사 담당 임원이 자리를 비우자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최정현 본부장 올라오라 그래."
금요일 아침, 어제 늦게까지 마신 술이 깨지 않은 정현은 겨우 출근해 자리만 앉아만 있었다. 비서를 통해 회장실 호출이란 말을 듣자 뒤통수에 번개가 친 듯 놀라 술이 확 깼다.
최 회장이 호출에 늦는 걸 매우 싫어한다는 걸 잘 아는 정현은 입 냄새만 겨우 제거하고 회장실로 올라갔다.
일주일 만에 보는 아들이 꼴도 보기도 싫었던 최 회장은 서서 유리창 밖을 쳐다봤다.
비서실장은 정현에게 어제 청와대 만찬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정현은 비서실장의 설명을 들으니 어지러워 속이 뒤집히고 꼭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만들어 놓은 문제니 네가 풀어라."
"아버지."
"여기 회사다."
"회장님. 이건 그 녀석의 허풍입니다. 그림이나 그리는 환쟁이일 뿐입니다."
"그 환쟁이가 UAE 국왕의 자문 위원이며 미국 정부의 자문 위원이지. 지금처럼 문화의 힘이 권력이 되는 시기에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문제다. 도대체 그 자리에 있으면서 뭘 보고 배운 거냐!"
회장은 문밖에 있는 인사부장을 호출했다.
"두 포지션에 관해 설명하게."
인사부장은 들고 온 자료를 전달하고 최대한 빠르게 설명을 했다.
"둘 중 하나 골라서 한 달 안에 출발해라. 가기 전에 미국에 가서 그놈에게 사과하고 더는 그룹에 피해를 끼치는 일도 없게 해. 네 사과가 시원찮아서 이번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경우 그놈뿐만 아니라 너도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무슨 말씀이신지···."
"널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배제함은 물론 회사 안에서도 네 자리는 없다. 그냥 재산이나 물려줄 테니 그걸로 살아."
"회장님!"
"경비 부르기 전에 바로 나가. 나가서 어떻게 하면 될지 잘 생각해서 계획 짜고. 필요한 게 있어도 비서실장에게 연락하지 말고 네 스스로 해결해.
네 어미에겐 네가 알아서 잘 설명해라. 만약 내 귀에 듣기 싫은 얘기가 들리면, 굳이 카자흐스탄이니 인도니 나갈 필요도 없어. 알아들었어!"
할 말을 마친 회장은 다시 돌아서서 창밖을 쳐다봤다.
정현도 잠시 회장의 등을 쳐다보다 돌아서서 휘청이며 회장실을 벗어났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회장은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도움을 요청해도 절대 도와주지 마."
비서실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회장의 진심을 확인하려고 다시 물었다.
"회장님, 본부장 혼자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절대 무리입니다. 사실상 회사에서 퇴출 명령을 내리신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정도의 위기도 헤쳐 나오지 못하면 회사에 자리를 주면 안 돼. 지금도 회장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차지해 회사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는데. 술 하나 제어 못 하면서 어떻게 그 많은 직원을 이끌겠어? 저 녀석은 물려받은 돈으로 편하게 지내는 게 오히려 낫다는 걸 몰라."
최 회장은 유리창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고민했다.
"그리고 권태호라는 녀석 말이야. 난 태호라는 놈이 더 맘에 드는데? 딸이라도 있으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뭐, 유부남이라니 할 수 없고."
"그럼 아까 하신 말씀은···."
"뭐 그렇다는 거지. 회사에 방해요소가 생기면 어찌하겠나···. 치워야지. 사람 고용해서 팔 수 있을 만큼 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사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여차하면 치워버릴 각오도 하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제안해봐."
"돈으로 말입니까?"
"그래. 그 녀석 미술관 만든다며?"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룹에서 해마다 나가는 기부금, 그쪽으로 돌려. 그 미술관 공사는 누가 하나?"
"입찰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능성이 높은 건 다성건설입니다. 워낙 그 집안과 인연이 깊습니다."
"인연이 깊었으면 사위로 들였겠지. 그건 됐어. 그래 얼마에 입찰인가?"
"예상 낙찰가는 1800억 수준이라고 합니다."
비서실장은 가지고 온 서류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래? 우린 적자만 보지 않을 정도로 입찰 넣어. 혹시나 모자라면 기부금에서 충당해서 쓰고. 꼭 이기라 그래. 솔직히 다성보다 우리 애들이 일은 더 잘해.
정현이하고 구원만 해결되면 우리를 선호할 거야. 건설 대표에게 전해. 입찰 지면 자리 뺀다고.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겠지."
*
한·중·일 삼국을 돌고 미국으로 돌아오자 엉겁결에 받은 위원회 자리가 태호의 발목을 잡았다. 최 회장에게 까칠한 표정을 1초 동안 보인 대가로 일주일 치 일이 쌓여 있었다.
워싱턴 D.C까지 왔다 갔다 하며 일을 마치자 그냥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연락이 왔다. 아버지였다.
"ST에서 입찰을 넣었는데 그들이 최저가를 넣었다. 더군다나 입찰 금액이 1700억이다. 다성건설보다 200억이나 낮아."
"네? 걔들이 왜요?"
"김 상무 사무실에 ST 건설 대표가 찾아와 입찰 서류를 넣고 갔다. 가능하면 너와 아니면 나라도 식사 접대를 하고 싶다는구나. 의도는 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겠지. 어쩔래? 나라도 만나볼까?"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였다. 정현의 아버지 ST의 최 회장에게 경고를 보낸 건 맞지만 이렇게 재빠르게 그것도 적극적으로 대응을 해 올 줄 몰랐다. 얼이 빠진 태호는 영준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네가 제법 애를 썼다만 굳이 한국의 거대 재벌과 부딪히지 마라. 너만 힘들 뿐이야. 더군다나 최 회장이야. 돈 여우다, 별명이."
영준의 말은 태호의 머릿속에 있는 방아쇠를 당겼다.
"아빠! 그 최 회장 아들이 그 뭐 같은 놈이 그 난리만 안쳤어도 할아버지는 돌아가지 않으셨을 거예요!"
"태호야. 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네가 아니라 내가 더 커. 내가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더 난리냐. 그냥 불운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안 병력이 뇌졸중이다. 너도 열심히 보험 들어놔. 아빠도 꽤 들었다. 피보험자는 엄마로 했으니까 섭섭해 하지 마라. 너 돈 많잖아."
태호는 이 심각한 얘기에 갑자기 뇌졸중이 나오자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인 영준이 괜찮다는데 왜 손자인 태호가 난리냐는 말에 태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알았어요. 아버지가 그 건설사 대표라는 사람 만나봐요."
"그래. 잘 생각했다. 풀어야 할 매듭이니 풀자꾸나. 이만 끊는다."
전화를 끊은 태호는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봤고, 영준은 꽉 쥔 왼 주먹이 피가 안 통해 노랗게 변할 지경이었다.
*
한 달 뒤.
최정현이 태호의 집에 찾아와 선물을 전달하며 정식으로 사과했다. 너무 완벽한 사과에 당연히 태호는 그 진위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말로 죽여버리자고.
"정현 씨. 처음 만난 나한테 협박을 하던 그 패기는 어디 갔어?"
"미안합니다. 그때는 어려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정현 씨. 만약 당신이 전에 와서 이런 사과를 했으면 나도 받아들였을 거야. 뒤늦게 진정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과를 하러 온 사람을 보고 내가 뭐라고 해야 해?"
"미안합니다. 사는 게 바빠 미처 챙길 여력이 없었습니다."
"정현 씨. 나도 한국에 레이다 켜놓고 살아. 지금도 딴 여자 만나서 두 집 살림 셋집 살림 하는 거 아는데 왜 그러실까?"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착실하게 두 아이의 아빠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현 씨! 네 아이의 아빠로 알고 있어. 그것도 엄마가 셋인. 어디서 모범 가장인 척을 해!"
"..."
"정현 씨···."
태호는 정현이 자기 집을 방문해 사과하는 이 순간이 실질적으로 복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임을 깨닫고 정현이 스트레스로 뇌출혈을 일으킬 만큼 갈궜다.
지금 세상이 게임이면 에너지가 깎여 목숨을 잃는 게 보일 정도로 정현을 갈궜다. 크리티컬 한방이면 말로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똑똑한 머리와 가끔 싹퉁바가지인 인성이 이럴 때를 위해 필요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지 온갖 정신력을 깎아버리는 말이 태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현의 눈을 벌게지다 못해 핏줄이 터져 벌게지는 게 보일 정도가 되자 태호도 그만뒀다. 태호의 경호원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권총을 들고 언제든 쏠 준비를 하고 있었을 정도로 정현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눈빛으로 살인을 할 기세였다.
그 살의를 그 악의를 태호는 즐기며 넘겼다. 아주 꿀맛이었다. 집안에 감시 카메라라도 설치해 촬영했다면 두고두고 봤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통쾌한 영상이었다.
정현이 경호원인지 비서인지 모를 사람의 부축을 받고 떠났다.
일주일 뒤, 최 회장의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태호를 방문했다.
"선물과 사과는 잘 받으셨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태호 씨의 할아버님 소식을 들은 ST 그룹 최태선 회장님이 제게 깊은 유감을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의도하신 건 아니지만 당신 자식 때문에 태호 씨가 겪은 고통에 대해 회장님도 깊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선물은 미술관 입찰이며 사과는 얼마 전 최정현 본부장이 와서 했습니다. 사과와 별개로 이번 일로 최 본부장은 회사 후계구도에서도 상당히 멀어졌습니다. 미흡하지만 노여움을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태호는 순간 피가 싹 식는 느낌이었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를 다 계산해서 접근하는 한국의 대기업이라는 존재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왜 아버지가 맞서지 말라고 한 건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러다가 피가 다시 끓어오른 태호는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실장님,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박태현이라고 합니다."
"박 실장님. 얼마나 버세요?"
"네?"
"얼마나 버시길래 그 뭐 같은 재벌의 앞잡이 노릇을 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사죠. 박 실장님을. 10배로! 얼맙니까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