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한국 방문
3개월 뒤.
백악관을 위해 제작된 빛의 마리아는 경호실과 리디아의 확인을 걸쳐 백악관에 걸렸다. 그림이 너무나도 맘에 든 트럼프의 의견에 따라 처음에는 오벌 오피스에 걸렸지만, 대통령이 업무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참모들의 의견이 빗발치면서 침실로 옮겨졌다.
얼마 후 트럼프는 리디아를 불러 퇴임 이후 빛의 마리아를 가지고 나갈 수 있는지 문의했다. 그리고 불가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트럼프는 빛의 마리아를 너무나도 좋아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 그림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호와 더 가까워질 방법을 찾을 것을 비서에게 지시했고, 비서는 멜라니아의 의복 제작을 Theo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
영부인 멜라니아가 아들과 함께 백악관으로 이사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지 얼마 후 백악관으로부터 멜라니아의 의복을 제작해 달라는 공식 요청이 왔다. 다만 가격은 백악관에 할당되는 영부인 품위 유지비 수준이었기에 전혀 높지 않았다.
태호는 임원들과 상의한 뒤 이를 수용하기로 하고 제마에게 이 일을 맡겼다. 제마와 Theo 직원들은 워싱턴 D.C를 수시로 방문해 백악관에 입성하기를 끔찍이 싫어했던 멜라니아를 위로하며 친분을 다졌다.
이런 제마를 같은 모델 출신인 멜라니아도 반겼다. 방문할 때마다 치수를 재고 디자인을 고르며 수다를 떨었다. 멜라니아는 제마가 맘에 들었는지 자주 만나자고 제의했다.
"제마, 앞으로 종종 찾아와서 이렇게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줘요. 남편과 같이 오면 더 좋아요."
대선 때부터 이어진 태호와 제마의 적극적인 협조를 흡족하게 생각한 트럼프는 참모들에게 이번 동아시아 방문을 위해 태호에게 제공할 적당한 자리가 있는지 찾을 것을 지시했다.
백악관의 참모들 사이에선 이번 동아시아 방문 때 영부인 멜라니아를 보좌할 사람으로 태호를 선택했고, 이를 위해 그를 예술에 관한 자문 위원(Advisory Committee on the Arts)으로 위촉했다.
자문 위원의 역할은 예술과 인문학과 관련한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의 정책 문제에 직접 개입하여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다. 위원장은 주로 영부인이 맡는데, 영부인들이 보통 정치, 경제, 사회 쪽 문제보다는 예술과 인문학 분야에서 남편인 대통령을 보조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태호가 자문 위원이 되어 멜라니아를 보좌하는 모양새는 나쁘지 않았다.
*
한국 방문에 앞서 발표된 백악관 브리핑.
태호가 미국 대통령 직속의 예술 자문 위원으로 선정되자 기자들이 질문에 나섰다.
"그럼 태호 위원의 역할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의 주 업무로는 외국 방문 시 문화 교류 관련 자문을 할 것입니다."
"혹시 그가 백악관에 있는 기존의 큐레이터를 대체하는 것입니까?"
"아니요. 대통령께서는 태호에게 예술 관련 일반적인 자문을 구할 뿐, 기존 백악관의 큐레이터는 그대로 직을 유지할 것입니다."
"태호 위원이 선정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태호 위원은 대통령의 예술적 취향에 대해 매우 적절히 파악하고 있으며 관련 자문을 할 능력이 있습니다."
"태호 위원은 UAE의 자문 위원 자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결정이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미국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이 백악관에 전시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렇게 발굴될 작가의 작품을 권태호 자문 위원이 개인적으로는 구매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해관계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태호는 백악관에 걸 작품의 작가로, 이해 충돌 가능성이 없는 중견 작가에서 찾기로 하고 백악관 보좌진들에게 알렸다.
*
일본 방문을 마치고 한국으로 향하는 에어포스 원.
"대통령님. 작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태호는 지금까지 트럼프에게 공들였던 진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트럼프에게 말을 걸었다.
"아, 태호. 무슨 부탁인가? 미국 국익에 저해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말해보게."
"청와대 만찬 때 초청 기업인 중 ST의 CEO가 참석할 예정입니다. 그에게 '태호에게 그 회사 얘기는 잘 들었다' 정도만 언급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단가? 별거 아닌 부탁이긴 한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CEO 아들 때문에 제 할아버지가 결과적으로 돌아가셨거든요."
태호는 트럼프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간단히 밝혔다.
"퇴임 이후에 작품 하나를 제작해 드릴게요. 만족하실 겁니다."
트럼프는 태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미국 대통령의 짧은 언급만으로 저 회사는 비상이 걸릴 것이다. 여기에 딸린 리스크도 없었다.
더군다나 공개 위험도 없다. 저 대화 내용이 공개될 때는 정말 문제를 만들어버리면 된다. 말 한마디로 태호의 작품을 가질 수 있다니 정말 수지맞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
공식 만찬장.
한국을 공식 방문한 트럼프의 만찬장이 열린 한쪽에는 멜라니아 옆에 태호가 있었다. 멜라니아와 태호는 제마와 세라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큰 키의 멜라니아와 태호가 같이 서 있자 카메라 기자들이 찍기 좋은 화면이 나왔다.
한참을 통역과 돌아다니며 정부 공직자와 미국 경제인들과 환담하던 트럼프는 멜라니아와 그 옆에 있던 태호까지 이끌고 한국의 경제인 수장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한참 영혼 없이 인사를 나누던 트럼프는 통역이 ST 그룹의 CEO 최태선을 소개하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 당신이 ST 그룹 CEO로군. 그 회사 얘기는 태호에게 많이 들었어. 아. 이건 통역해주지 말게. 갑자기 생각난 것뿐이니까."
최태선 회장은 나이는 있지만, 트럼프가 지나가듯 떠든 말을 놓치지 않고 알아들었다. 의도가 있다고 확신했다. 늘 웃던 얼굴인 태호도 최태선 회장을 보고는 딱딱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후 트럼프를 따라 사라졌다.
최 회장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다음 날 아침, 회장 비서실은 비상이 걸렸다.
"왜 트럼프가 이런 말을 했는지, 태호와 우리 그룹과의 은원 관계가 무엇인지, 태호가 트럼프 정권에서 차지하는 위상까지 다 조사해와!"
핏발선 눈과 핼쑥한 표정으로 나타난 최 회장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비서실장을 불러놓고 급하게 지시 사항을 쏟아냈다.
"회사 역량을 총동원해서 다 뽑아와. 일가친척 이력까지. 미국에 직원들에게 연락해서 알아봐. 있는 인맥 총동원해!"
지시를 받은 비서실장도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비서실 직원들을 닦달해 태호에 대해 자료를 뽑기 시작했다.
"태호를 잘하는 기자가 있나?"
"한 방송국 피디가 절친이라고 합니다."
"둘러 둘러서 넌지시 알아보라 해. 절대 직접 물어보지 말고 우리 돈 좀 먹은 피디 통해서 알아봐."
비서실장은 정답을 찾는데 반나절로 충분했다. 비서실 직원들이 올리는 사실들을 하나하나 조합하자 태호가 그리는 그림이 쉽게 파악이 되었다.
최 회장에게 다시 만난 자리에서 비서실장은 새벽부터 모은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한 내용을 보고했다.
"이번은 아마 경고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만, 우리의 조치가 없으면 다음에는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력자는?”
비서실장은 간단하고 크게 출력된 자료를 건넸다.
"지금 태호에게 우호적인 집단은 여러 군데가 있습니다.
첫째는 UAE입니다. 자문 위원으로 있으며 왕자들에게 많은 의뢰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통령실의 자문 위원이라고 하니 국왕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는 트럼프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이번 방문에서 멜라니아 부인을 보조했지만, 태호는 트럼프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태호의 장인이 뉴욕에서 건설업을 하는 것으로 유추해보면 두 사람은 대통령 취임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사이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전미 유대인 협회입니다. 작년 협회에서 태호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지금까지 태호에게 작품 제작 의뢰를 한 집단이 태호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유대인도 그에게 우호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넷째는 LVMH의 아르노 회장입니다. Theo가 LVMH 소속이고 Theo도 LVMH의 지분을 상당수 가지고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건 다른 얘기긴 합니다만 권태호는 광화문 앞 사거리 옛 대아 일보 자리를 매입, 미술관 건축 허가를 받은 상태입니다. 대지만 시가로 2천억이며 건축비로 2천억이 예상됩니다."
비서실장의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자 최 회장은 태호의 역량에 대해 순수하게 놀랐다.
"대단하군. 이게 미국으로 건너간 지 15년 된 친구가 쌓아 올린 영향력이라고? 강대국에, 그 강대국 제1 로비 단체에, 시총 세계 1위 회사에, 2천억 자산에. 허 참. 내가 다 사위로 삼고 싶군. 그래서 이 문제 해결 방법은?"
최 회장은 어제 봤던 잘생긴 태호의 얼굴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권태호는 우리 그룹과 사실 은원관계라고 할만한 게 없습니다. 다만 전에 최정현 본부장이 그의 군대 회피를 기사화한 적이 있었고, 그때 미국으로 도피하듯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한국 국적을 포기했습니다."
자기 아들 얘기가 나오자 최 회장도 그때의 일이 기억이 났다.
"그때 주 회장이 나에게 정말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지···. 그래서?"
"권태호가 미국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할아버지가 사망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인은 뇌출혈인데 의무기록을 보면 심장 수술 직후인데 태호에게 일어난 일의 충격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 이게 제일 확률이 높은 시나리오이긴 합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최 회장은 비서실장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안은 뭔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냥 무시하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 태호는 이차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로 미국이나 UAE에서의 활동 제약 등이 있습니다.
태호의 영향력이 최고위층까지 닫는다고 가정하면 UAE에서는 무기사업에서 예기치 않은 난관을 만날 수 있으며,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퇴임 전까지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최 회장은 태호가 한 나라도 아니고 두 나라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이번에 트럼프를 움직인 걸 보면 최고위층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군. 해결 방법은?"
"최정현 본부장이 미국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사죄하고 태호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입니다. 잘 될지는 미지수이나 적어도 명분을 쌓기 위해서는 필요할 조치입니다."
"녀석에게 사과했는데도 계속해서 우리를 방해하면 어떤 조처를 할 수 있나?"
"언론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매정해 버릴 수 있습니다."
"더 매장당할게 남았나?"
"본인은 괴롭히지 못해도 가족들은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 언론을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돈이 많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현금 동원 능력이 4천억이나 되는데 뭘 또 어떻게 그 녀석을 힘들게 만들어! 다른 건?"
"극단적인 방법도 가능합니다. 다만 리스크가 좀 있는지라."
"거기까지는 가지 말지. 그쪽에서도 우리와 극한 대결하려고 했으면 이런 경고를 날릴 이유도 없어. 건드렸다가 그 녀석 처가에서 어떻게 들고 일어설 줄 알고? 트럼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데."
최 회장은 도통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한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정현이에 대한 인사 자료 가져와. 인사과와 비서실에서 제대로 평가한 자료로. 사탕발림한 거 말고."
얼마 후 비서실장이 자료를 가져왔다. 그걸 한참을 뒤적이는 최 회장은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하. 이 녀석 지금까지 뭐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