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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174/181)

대통령 선거

그렇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태호 몫이었다. 설계까지 나왔으니 공사를 진행해야 정상인데 그러질 못하니 경제적 손해가 막심이었다. 그걸 아는 영준이 태호를 위로했다.

"어차피 미술관이잖아요. 돈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 공사야 좀 늦어져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공사가 늦어지는 건 이건 정말 화가 나네요."

"어떻게 할 셈이냐?" 영준이 물었다.

"여론전이라도 해야죠. 언론사에 전화 돌려볼게요."

태호는 예랑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양순실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한번 알아볼게."

2주 뒤.

"다들 누군지 아는데 쉬쉬하는 분위기네."

예랑은 차라리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는 말을 꺼냈다.

"정권 바뀌고 나면 아마 허가가 날거야.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때? 얼마 남지도 않았고."

태호는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가만히 있을 생각도 없었다.

아랍 에미리트에서 태호의 주가가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었고 태호의 부탁이면 아랍 에미리트 대통령이나 총리가 한번은 움직여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일도 아닌, 예를 들어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놈을 곤란하게 하는 일도 아닌, 이런 그저 귀찮고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일에 그 찬스를 소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미국 정계였다. 지금까지 거리를 두고 있었던 미국 정계 쪽에 어찌 되었든 연줄을 만들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

롱 아일랜드.

일요일 점심. 세라가 태어난 이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처가 집에서 모든 가족이 모여 저녁을 함께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저녁 모임의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레 선거로 이어졌다.

제마의 집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왔지만, 정치자금은 양당에 골고루 배분해왔다. 마틴은 부동산 사업 관련으로 트럼프와 친분이 있었는데, 트럼프가 맨해튼에 트럼프 타워를 지을 때 마틴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면서 알게 된 사이다.

나이도 비슷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비슷해 둘이 죽이 잘 맞았는데 일 년에 골프도 2~3번씩 같이 치는 사이였다.

마틴은 최근 트럼프로부터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가려고 하니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도 필요하면 막 나가는 스타일이지만 이 양반은 정도가 지나쳐. 전에 WWF나 어프렌티스 나가는 것을 보고도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대통령을 하겠다는군. 참나."

"어떻게 하시게요. 아버지?" 큰아들인 로이가 물었다.

"20년 지기를 모른 척 할 수 없으니 지원은 하겠는데 당선 가능성도 낮은 사람을 얼마나 지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힐러리 쪽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고 말이지. 당신은 생각은 어때?" 마틴은 엘리스에게 물었다.

"주위에 우리 같은 사람이 한둘이겠어요? 다 적당히 섭섭하지 않게 지원하는 거죠. 이번에는 여성 대통령이 나올 때도 되어서 아줌마들 분위기는 힐러리예요."

엘리스의 말을 들은 마틴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기에는 힐러리는 너무 거짓말이 많고 말도 자주 바꿔.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고 하다가도 나중에 실수였다고 말을 바꾸니 말이야. 이런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정치인 말 바꾸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시대가 변하면 상황이 변하고 그러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지요. 요즘 세대가 얼마나 빨리 바뀌는데요?"

"나는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아. 나중에 말 바꾸는 정치인이 리더가 되면 국가가 얼마나 흔들릴지 상상이 안 돼."

"그래도 트럼프는 아니에요. 그 호전성과 막말을 하는 대통령을 상상해봐요. 국가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지. 또 퍼스트레이디 문제도 그래요. 멜라니아는 좋은 사람이지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할 만큼의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는다고요. 전에 멜라니아를 만났을 때도 그랬잖아요. 남편 좀 말려 달라고.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반대하는데 혼자 만나서는 게 맞지도 않잖아요?"

"자식 말도 안 듣는데 친구 말은 듣겠어? 말려도 안 들어. 그러니 그저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지원해주는 게 맞아. 그래서 이 친구 얼마나 지원해야 하는 거야?"

"아버지, 슈퍼팩은 체면치레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그냥 개인 최고 한도까지 지원만 하면 되겠는데요? 직원들 이름으로도 좀 하면 될 거 같고요."

"왜? 돈 없이 어떻게 선거하려고?"

"트럼프가 슈퍼팩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도와 달라고 한 건 금전적인 부분보다는 인적 자원이나 선거 유세 지원 이런 측면인 거 같아요."

"그냥 돈 주는 게 편하지 더 골치 아픈 걸 해 달라고 요구하는군. 우리 지난번에 오바마와 롬니에게 얼마 지원했었지?"

"둘 다 10만 불씩 지원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15만 불씩 하지. 그래도···. 헛돈 쓰는 기분이야."

그때 태호가 대화에 끼었다.

"저도 지원해도 될까요?"

"얼마나? 그리고 왜?" 마틴은 의아한 듯 물어봤다.

"한국 사업 관련해서 뒤로 압력이 들어오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 VIP가 연결된 것처럼 보여서요. 인허가 관련으로 장난을 치네요. 신임 대통령과 사진이라도 좀 찍어 놔야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유심히 듣던 마틴은 곧 혀를 찼다.

"그래. 그 하이에나 같은 작자들이 강자에게는 비굴하지만,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천박하게 굴지. 힐러리는 엘리스랑 한번 만나보고 트럼프는 나랑 한번 만나보지. 자네 골프는 여전히 90타인가?"

"네.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

"트럼프랑 같이 어울리려면 골프를 조금 더 잘 쳐야 해. 내 잘 아는 티칭 프로가 있으니 한번 배워 봐."

"네, 마틴."

"여보, 바쁜 사위에게 왜 골프 연습까지 시켜요."

"트럼프 만나면 골프밖에 할 게 없어. 이 기회에 실력도 늘리고 좋지 뭘 그래?"

마틴의 평소 사심이 드러나는 말에 엘리스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그림 있잖아요, 그림. 초상화를 세계에서 제일 잘 그리는 사위를 두고 무슨 얘기에요. 태호, 미국 대통령 초상화는 누가 그리는지 알아요?"

"그쪽은 잘 모릅니다."

"초상화 작가를 대통령이 직접 지명해서 그리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정부 돈이 아닌 개인 돈으로 내는 것으로 들었어요. 아마 자네가 가서 정치 후원금 조로 지원한다고 하면 어렵지 않게 얘기가 될 거에요."

"좋은 생각이군. 두 사람에게 가서 그렇게 소개하면 자연스럽겠어." 마틴도 괜찮은 방법이라며 동의했다.

"힐러리는 태호 자네를 이미 알고 있어. 내가 작년에 만났을 때 손녀 자랑, 사위 자랑을 좀 했거든." 엘리스가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태호. 그래도 자네 골프는 조금 더 쳐야 해. 지금, 이 식탁에서 밥 먹고 있는 사람 중에 자네만 90타 대야."

"하하하···. 그러네요. 소개해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마틴의 말에 태호가 대답했다.

"잘 생각했어. 코치 실력이 괜찮으니까 빨리 쫓아 올 수 있을 거야."

*

한 달을 프로 강사에게 잡혀서 살다 보니 태호 실력이 빨리 늘었다.

태호는 트럼프와 골프를 같이 치고 안면을 틔웠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초상화를 맡기겠다는 얘기를 했다.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거라네. 내 그림 쪽은 잘 몰라서 말이지. 보통 이런 초상화는 얼마나 하는가?" 트럼프가 물었다.

"물론 작가마다 다르고 얼마나 크게 그리냐에 따라 다른데, 아마 제가 제일 비쌀 거예요. 전에는 2백만 달러 정도 받았는데 지금은 3백만 달러는 받습니다."

깜짝 놀란 트럼프.

"이런 미친. 자네는 아주 돈을 그리는 사람이로군."

트럼프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며 태호에게 물었다.

"나에게 그렇게까지 비싸게 청구하는 건 아니겠지?"

"50만 달러 정도로 할게요. 전대 대통령들도 보통 그 정도 커미션으로 제작을 했습니다."

트럼프는 빙긋 웃었다.

"그 외에 바라는 게 있는가?"

트럼프는 반의반 값에 해주겠다는 태호의 제안에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골프를 치며 얘기를 나눠보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거래를 좋아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시면 한국을 방문하실 거예요. 오랜 동맹국이니까요. 그때 저도 좀 에어포스 원에 태워서 데려가 주세요."

태호의 별거 아닌 요구에 사연이 있음을 짐작한 트럼프.

"그렇게 가고 싶은 이유가 있나?"

"한국에서 절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어서요. 함부로 볼 사람이 아니라는 조그만 경고를 하고 싶네요."

태호는 비교적 솔직하게 얘기했다. 잠시 파악한 바로는 숨기는 것보다는 직설적으로 숨김없이 얘기하는 게 트럼프를 설득하는 더 좋은 방법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대사 같이 조금 더 큰 자리를 바라는 줄 알았는데?"

"이제 30대 중반입니다. 그런 자리 받으면 트럼프 씨 욕먹을 거예요. 그럴 순 없죠. 제가 요청하는 사람에게 경고 한마디 정도면 됩니다. 별 대단한 언급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미국 대통령이 주시하고 있다는 정도면 충분해요."

엘리스와 함께 힐러리를 만난 자리에서 태호도 힐러리에게 똑같은 제안을 했다. 그렇지만 반응은 천양지차였다. 트럼프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거 재밌겠군!' 이런 반응이었다면 힐러리의 반응은 '얘가 무슨 짓을 하려고?'라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태호는 내심 트럼프가 당선되기를 바랐다. 자신의 부탁을 훨씬 폼 나게 들어줄 사람은 트럼프였지 힐러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연말.

태호는 비선 실세라는 양순실의 얼굴을 인터넷으로 확인했다. 대통령까지 연결되어 거대한 스캔들이 되어버린 후 탄핵까지 이어지자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자신을 방해한 사람이 적절한 법적 심판을 받는 건 통쾌했지만 한국의 수뇌가 모여있는 청와대가 이리 허술했다는 사실에 탄식이 나왔다.

얼마 뒤.

미국도 한국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다.

201x년 1월 17일 대통령 취임일, 마틴과 엘리스가 트럼프의 취임식에 초대되어 워싱턴 DC로 날아갔다.

*

트럼프는 바쁜 인선이 마무리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머무를 백악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백악관의 인테리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자 백악관의 큐레이터인 리디아 테데릭는 트럼프 옆에서 백악관에 걸려 있는 작품들에 관해 설명하고 대통령의 권리 또한 설명했다.

"백악관은 1961년 백악관의 예술품 컬렉션에 관한 법률에 의거 65,000점의 예술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500여 점이 그림입니다.

만약 대통령님께서 원하시면 국립 미술관이나 스미스소니언 (Smithsonian Institution)에서 작품 대여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드물지 않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빌바오, 휘트니 휴스턴 미술관에서 대여하기도 합니다. 대통령님께서 특별히 선호하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리디아의 설명에 트럼프는 Faceless를 떠올렸다.

"그 빌바오의 Faceless를 대여할 수 있겠소? 거긴 이미 여러 버전이 있다던데?"

리디아는 대뜸 빌바오의 보물 Faceless를 대여해 달라는 트럼프의 요청에 난감함을 숨길 수 없었다.

"Faceless는 작품 상태가 안 좋아 대여할 수 없지만, Faceless의 복원 작인 빛의 마리아는 빌바오가 여러 점을 가지고 있으니 요청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절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대통령님. 이건 어떠실는지요? 태호 작가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한가?"

트럼프는 잠시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제작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그는 작품을 빨리 제작하기로도 유명하니 한번 제안을 넣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리디아는 얼마 후 태호에게 공식 사전질의서 (Request for Information, RFI)를 전달했다.

백악관의 RFI를 받고 태호는 자신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하나쯤은 백악관에 들어가도 좋을 작품이긴 했다.

제작 기간 3개월. 제작비용 200만 달러. 이는 인건비 명목으로 설정된 조건이며 태호는 별도로 돈을 받지 않았다. 백악관 역사 협회 (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제작해 전달했다. 세금 혜택만 받았을 뿐이다.

태호는 작품을 전달하며 그저 언론에 제일 잘 노출되는 자리에 걸어 달라고 리디아에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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