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으로부터 의뢰
맨해튼에는 다소곳한 크기의 유대인 박물관이 하나 있었다. 유대인 금융가 펠릭스 와그너의 저택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센트럴파크의 호수가 보이는 정말 좋은 입지에 있는 박물관이었다.
이곳의 한 회의실에선 미국 전역에서 모인 AIPAC (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 소속의 문화예술 담당 임원들이 모였다.
AIPAC은 미국 인구의 2.5%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지만 미국에서 제일 파워가 센 로비 단체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정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화예술 분야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모인 인원은 10명이 채 안 되지만, 이들은 할리우드와 패션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 중엔 첼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갤러리를 소유한 헬리 나흐마드도 있었다.
"이렇게 작은 회의실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롭군요. 이게 얼마 만이죠?" 문화예술 위원장인 아담 골드먼이 말했다.
"지난 5월에 워싱턴 총회를 했으니 한 2개월 됐군요." 나탄 레비가 대답했다. 나탄은 패션업계의 막후 실력자였다.
모인 사람들은 잠시 최근 이스라엘 정세와 워싱턴 정치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란과의 핵 협상부터 내년에 열리는 다음 대선까지 주제는 다양했다. 그들의 관심은 원만하게 끝난 이란과의 핵 협상보다는 다음 대선에 있었다.
"다음 대선에는 누가 민주당 후보로 나올 것 같습니까?"
"이변이 없는 한 클린턴이 될 것 같군요. 아마 클린턴이 대선도 이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샌더스 같은 사람보다는 낫겠죠."
"공화당은 어떻습니까?"
"크루즈 아니면 트럼프일 것 같은데···. 우리로서는 쿠르즈가 낫습니다. 트럼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사람이라. 그다지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도 아니고요."
아담 골드먼은 계속 내버려 두면 하루 종일 정치 얘기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끊고 회의를 소집한 원래 목적을 말했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작품을 하나 제작하고 싶어서입니다. 전 전대 위원회 대표셨던 고 버니 프라이드킨 씨의 유언이었으며 2천만 불의 제작비를 마련해두셨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고작 작품 제작을 위해 우리를 소집했다는 말입니까? 그저 제작한 다음에 기증하면 그만 아닙니까? 바쁜 우리를 LA에서 뉴욕까지 불러낸 이유를 모르겠군요."
현직 영화감독이자 위원 중 목소리가 제일 큰 조지 프라이드만이 말했다.
"작품을 지금 우리가 있는 바로 이 박물관에 기증할 생각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냥 기증하시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제작을 의뢰할 사람이 비유대인이어서 그렇습니다. 버니 씨는 태호 작가에게 이 작업을 맡기길 원하셨습니다."
태호가 누군지 몰라 웅성거리던 중 헬리가 그를 소개했다.
"뉴욕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티스트입니다. Faceless 아시죠? 태호는 그 그림의 복원 작인 빛의 마리아를 제작했습니다."
그의 설명이 있고 나서야 누군지 확실히 태호가 누군지 확실히 인지했다.
"그는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어째서 유대인 박물관에 들어갈 작품을 의뢰하겠다는 겁니까?"
유대교는 인종(race)에는 거의 구분을 두지 않지만, 유대교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분하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아티스트인 태호 작가는 얼마 전 로웰가의 막내딸과 결혼도 했고 최근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 어떻게 보면 가장 빠르고 완벽히 적응한 친구이기도 하지요.
뉴욕시 한정이긴 하지만 뉴욕의 화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자 하는 건 그런 상징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랍 에미리트와도 깊은 인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트페어 기획부터 초상화 제작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 중이죠. 태호-리스트라는 걸로 전 세계 미술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딜러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박물관에 들어갈 그림을 유대인이 제작하는 것보다는 다른 인종 다른 종교를 가진 예술가가 제작해 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도 현존하는 최고의 아티스트에게 말이죠."
아담은 이번 프로젝트에 태호를 끌어드리고자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왜 버니가 그림을 제작하려고 하는지 설명했다.
"버니가 AIPAC의 직위에서 은퇴한 뒤로도 걱정한 건 AIPAC의 미국 내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AIPAC의 영향력이 줄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군요."
"회비로 걷히는 돈의 액수는 그대로 이거나 늘었을지 모르지만, 회비를 내는 회원 수는 점차 줄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의 이스라엘과의 정서적 연대감이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단적인 예로 더 이상 유대인을 드러내며 옹호하는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간혹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끙···." 조지가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그림을 그리는 게 큰 도움이 될까요? 그 작지 않은 돈을 들여서?" 나탄이 물었다.
"버니가 생각하던 작품은 유대인들이 미국에 어떻게 정착을 했고 어떻게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서사가 담긴 그런 작품입니다.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걸 구경하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니 버니가 왜 이런 그림을 생각해 냈는지 이해가 될 정도더군요."
모인 사람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왜 지금 AIPAC에서 활동하고 아버지 세대들이 이스라엘 전쟁에 직접 참전까지 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지게 만든 큰 사건 중 하나였다.
"유대인 여부를 떠나 태호 작가라면 누구라도 인정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냥 진행하면 될 텐데 우리는 부른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잠시 후 다시 입을 연 조지의 말에 아담이 설명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슬쩍 문의했는데 태호 작가의 가격이 올라 2천만 불로는 도저히 원하는 작품을 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2~3 작품 정도 제작이 가능하겠더군요. 버니가 원하던 작품 수는 최소 6 작품 이상이었습니다. 돈을 모아서 전달하는 게 제일 쉬운 일이겠지만 지금 걷히는 회비로 그 비용을 감당하기엔 벅찹니다."
"따로 돈을 모아서 전달하면 되나요? 기껏해야 3~4천만 불 정도 더 모아 전달하면 될 듯합니다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태호 작가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중에 태호 작가가 유대인을 혐오하는 발언이라도 하게 되면 문제 될 소지가 큽니다. 계약으로 페널티를 설정한다고 해도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막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모인 이들은 아담의 말이 올바른 접근이라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질문은 없었다.
"이런저런 사유로 태호 작가를 조사했는데 재밌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과 모사드를 통해 아담이 전달받은 내용이었다.
"태호 작가가 서울 중심가에 2억 불을 들여 땅을 샀습니다."
2억 불이라는 말에 모인 사람 모두가 놀랐다. 거대 기업 오너가 아닌 이상 쓰기 힘든 돈이었다.
"서울에서 제일 비싼 지역 중 하나이기도 한데 미술관을 설립할 계획이랍니다. 작가가 미술관을 짓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되실 겁니다.
대기업 오너 정도나 되어야 짓는 게 개인 미술관인데 말입니다. 예상컨대 태호 작가가 지금까지 번 돈을 거의 다 쏟아부어야 가능한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답니까?"
"이런저런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일 가능성이 큰 해석은 태호 작가가 한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는 겁니다. 한국 국적을 포기한 태호 작가가 다시 한국을 찾는 다는 게 흥미로운 사실이어서 추가로 자료를 모으고 분석을 하자 그가 한국의 재벌 3세와 구원이 있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에 다들 흥미롭다는 표정이 일었다. 태호 작가가 원하는 게 확실하고 자신들이 그걸 들고 있다면 거래는 쉽게 성사될 수 있었다.
"그럼 우리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게 태호가 구원을 해결하도록 도와달라는 겁니까? 돈도 모금하고요?"
"맞습니다. 미국 유대인이 태호 작가 뒤에 있다는 것만 밝혀도 그의 호의를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비춘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입니다. 한국에서의 이미지는 어떤지 몰라도 미국에서의 그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니까요."
"미술관을 짓겠다면 돈도 상당히 많이 필요할 겁니다. 그에게 다른 그림 주문도 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헬리가 부연 설명했다.
얼마 뒤. 아담은 정식으로 태호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했는데 금액은 8 작품에 4천만 달러였다. 분석하고 예상했던 것과 같이 태호는 아담이 제시한 돈보다 구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데 더 관심을 가졌다. 금액을 싸게 한 건 덤이었다.
*
장 누벨에게 설계를 의뢰한 지 18개월이 흘렀고 설계가 완성되었다.
십장생도에 있는 산을 전체 모티브로, 근정전 마당에 있는 돌인 박석을 외관 타일 모티브로 한 건물이었다. 밤에 조명을 비추면 타일이 빛을 반사해 아름답게 빛날 건물이기도 했다.
김 상무와 영준은 설계도면을 가지고 시청을 찾아가 건축 허가를 신청했다. 세계적인 거장 장 누벨이 한국까지 와서 경복궁 근정전 어좌 뒤의 십장생도를 보고 구상한 설계였다.
보는 이마다 한국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거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디자인이었고 서울 시청 담당 공무원도 별문제 없이 통과되지 않을까 예측하던 건물이었다.
그런데 태클이 들어왔다. 야당이었다.
"그거 서울시 권한 아니에요? 왜 정치권이 난리죠?"
태호가 어처구니없어하자 김 상무가 부연 설명을 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봤는데 청와대에서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청와대요? 거기서 왜?"
"광화문 근처에서 올라갈 건물이라 청와대 보안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광화문에 지을 건물이 청와대 보안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던 태호에게 김 상무가 저격 가능성 때문에 고도 제한 등이 있다는 설명을 했다.
"억지 아닌가요? 건물 외관만 봐도 옥상에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닌데? 거리도 멀고?"
"억지죠. 사거리가 늘어서 그렇다는 변명까지 하는데 어이가 없었습니다. 기존 건물도 뻔히 문제가 되는데 말이죠. 혹시 태호 작가를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청와대에 있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문제가 생기긴 어렵습니다."
순간 태호의 뇌리를 스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일 년 반전 그 비선 실세라고 하는 떨거지로부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았던 그일 말이다.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일년 반이나 지나 이런 형태로 태클이 들어올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억력도 좋아야 비선 실세를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민해보니 이 문제를 풀 사람은 태호 자신밖에 없었다. 아버지 영준도 여기서 딱히 뭔가를 할 수 있지도 않았다.
"이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마침 알만한 사람이 있군요."
태호는 김유미 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설명하자 김 관장은 알아보겠다고 답한 후 몇 시간 뒤 전화를 했다.
"그 양순실이라는 사람이 이번일의 주범 같아 보이네요.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사람인데 비선 실세라고 불리기도 하죠. 워낙 안하무인인 사람이라 얽히면 골치 아파요.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서 미안하네요."
"알겠습니다, 관장님.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관장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 확실했다.
태호가 생각하기엔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깟 5년이 뭐 긴 기간이라고 조용히 있을 생각은 안 하고 나대다니 그 꼴이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