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트페어 인 아부다비 (172/181)

아트페어 인 아부다비

"청와대면 대통령을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사장님."

"문제 될 게 있나요?"

"그게···. 기부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보였습니다."

"그림을요?"

"옷 포함입니다."

태호는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기부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 잠시 고민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죠, 팀장님. 기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거의 못 들어본 표현인데."

"..."

"도대체 누굽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게?"

"양 순실이라고 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비서실 실세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고요."

박 팀장은 VIP 통역을 많이 했다고 하더니 이런 소식에도 정통했다.

"만약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청을 거절하시면 생각지도 않았던 사업상 방해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LVMH 사업보다는 태호 사장님 개인적인 일일 겁니다."

태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이면 사실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도 있었다. 싫어하는 정치인이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초청해 식사라도 하면서 부탁을 하면 마지못해서라도 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태호도 나이를 먹어가며 그 정도 융통성은 생겼다.

자신은 스케치만 대충하고 조수에게 다 맡겨버리겠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대통령이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비서 실장이 와서 부탁하는 것도 아닌 아무런 직위도 없는 비선 실세가 와서 그림과 옷을 달라고 하다니. 이건 비공식이기에 강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나중에 문제가 되어 비선 실세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 자신의 이름도 같이 오르내릴 것이 확실했다.

"양 순실이 그 비싼 태호 작품도 강탈해 갔다며?"

"강탈이 아니라 태호가 바친 거야."

"태호가 뭐가 아쉬워서?"

"광화문 앞 사거리 부지에 갤러리 올릴 때 인허가의 편의를 봐달라고 그랬다는구먼."

"그 녀석도 별수 없네. 걔 군대 회피하려고 미국 갔잖아."

엄연한 상업지역에 미술관 인허가 때문에 로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분명히 이런 말이 나올 것 같았다. 태호는 상상만으로 짜증에 화까지 확 치밀어 올라왔다. 덕분에 판단을 내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단 거절하세요. 청와대에서 공식 요청이 들어오면 그때 고려하겠다고 하세요."

"혹시 공식적으로 요청 들어오면 하실 생각이세요?"

"그림값은 받을 것 같네요. 그쪽도 대통령 초상화로 할당된 금액이 있지 않겠어요? 조금 모자라더라도 수용하죠. 옷은 Theo에서 드릴 수 있어요. 다만 공식화만 해 주시면 된다고 전하세요. Theo에서 제작한 그림과 드레스라고."

태호도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거로 생각하고 내건 건 아니었고 듣는 박 팀장도 태호의 의도를 표정에서 읽었다. 비선 실세 따위가 날뛰는 정권에 얽히기 싫다는 걸 태호는 얼굴을 포함해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청와대의 공식 요청은 없었다. 박 팀장의 돈 내라는 소리에 양 순실은 가격을 물어봤다. 무려 20억이라는 박 팀장의 말을 듣고 빈정거림과 재미없을 거라는 협박만 잔뜩 늘어놓은 뒤 연락이 끊겼다.

*

태호-리스트가 세상에 드러난 지 4년이 지나자 리스트에 등재된 작가 수가 250명을 넘어섰다. 태호와 아부다비가 꿈꾸던 아트페어를 열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지난 3년 넘게 아트페어를 기획해 왔으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지금까지 미뤄졌었다.

아부다비 문화관광청에서는 아트페어를 열기 위해 대형 컨벤션 센터를 전시장으로 탈바꿈시킨 뒤 전 세계 갤러리들이 아부다비에서 부스를 열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했다. 그중에 제일 큰 이벤트는 태호가 소속된 뉴 썬 갤러리 부스에서 열렸다.

뉴 썬 갤러리 부스에는 스위스 바젤이나 미국 마이애미에는 출품하지 않았던 태호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며 신작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마리아의 새로운 버전으로 옷의 펄럭임이 줄이고 색을 더 화려하게 집어넣었다. 역동성은 줄이고 고귀함은 올린 작품이었다.

태호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가가 신작이나 새로운 시리즈를 들고나와 아부다비 문화관광청 관계자를 기쁘게 했다. 아트 페어 오픈일에는 아랍 에미리트 대통령까지 방문해 행사의 무게감을 확실히 끌어올렸다.

문화관광청은 이번 행사에 사활을 걸었다. 전 세계 예술 관련 잡지에 광고비를 쏟아부었고 다양한 연계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그 덕분인지 아트바젤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숫자의 컬렉터가 아부다비를 방문했다.

개관과 동시에 독일군 돌격하듯 전시관에 들어온 그들은 아트바젤에서 그들이 했던 스피드로 미술품을 구매했다. 개관한 지 2시간 만에 미술품은 2/3는 판매되었으며 다음 날에는 나머지도 모두 팔렸다. 첫 아트페어치고는 말도 안 되는 성과였기에 문화관광청 사람들은 열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부스에는 판매할 작품이 있어야 한다는 태호의 강력한 요구에 추가 작품들이 비행기를 통해 공수되었다. 아랍 에미리트 항공기에는 전 세계에서 배송되는 작품들로 화물칸이 찼고, 원래 작품이 부족했던 작가의 경우에는 태호와 아부다비가 보관하고 있던 작품 수십 점이 수장고에서 전시관으로 옮겨갔다.

이는 사실 아트페어를 통해 태호가 노린 것이기도 했다. 태호는 급이 떨어지는 작품이 있으면 아트페어를 통해 팔고 새로운 작품을 사들였다.

전 세계에서 모인 컬렉터들은 태호-리스트에 있는 작품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듯한 태호와 아부다비의 태도에 호의를 보냈다. 미국 달러에 대한 신용이 연방은행에서 나오듯, 태호 리스트에서 거래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리를 태호와 아부다비 문화관광청에서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호가 작품을 대하는 일관성과 지나친 상업주의를 배제하는 태도도 호의를 더했다. 끝없는 상업주의와 탈세, 사기가 난무하던 미술 시장에 마침내 컨트롤 타워가 들어선 것이다.

3일간 거래된 작품가의 총액은 20억 달러가 넘었고 예술품 거래를 통해 아부다비가 직접 거둔 세금만 오천만 달러가 넘어갔다. 관람객들이 와서 쓰고 간 돈도 고스란히 관광업계로 흘러 들어갔다. 에미레이트 항공사의 깜짝 실적 개선에 주가가 올랐을 정도였다.

"태호 작가님. 이 정도면 수장고에 쌓아 둔 미술품을 놀릴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미술관을 건설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성과에 대단히 만족한 아부다비 정부는 자신감이 생겨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알 나하얀 컨템포러리 미술관을 건축하기로 하고 설계를 장 누벨에게 맡겼다.

*

아부다비의 성과를 확인하고 떠나려는 태호를 잡은 건 두바이 관광청이었다.

"태호 작가님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저는 두바이 관광청의 압둘라라고 합니다. 청장님께서 잠시 두바이에 들렀다가 가시길 청하고 있습니다. 가능하신지요?"

"혹시 어떤 일로?"

"이번 아트페어 인 아부다비의 성공을 보며 저희 두바이 관광청도 태호 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두바이 측의 요청에 응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아부다비와 같이 얘기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두바이는 아부다비와 태호가 지어 놓은 밥솥에 숟가락을 얹고 싶어 난리였다. 일주일간의 아트페어가 끝나자마자 바로 태호와 접촉했는데, 태호는 두바이의 요청에 부담이 컸기에 바로 아부다비를 끌어들였다.

태호는 아부다비 문화관광청에 이 사실을 알렸다.

"우리도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어찌해야 할지 참···."

아부다비 문화관광청장은 두바이의 요청에 난색을 보였다. 두바이의 입장은 확실했다. 태호를 나누자는 것. 두바이에서도 아트페어를 열기를 원하며 태호가 운영하는 예술 펀드 가입도 타진했다.

태호는 펀드 금액이 늘어나기에 나쁠 것이 없어서 관망세였고, 아부다비는 이 쏠쏠한 사업을 나눌 이유가 없기에 부정적이었다.

한 연방에 있는 두 국가지만 엄연히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기도 했다.

한 달 뒤, 결론이 났다. 청장급에서 해결이 안 되어 안건은 국왕에게 올라갔다. 다음 해 펀드에 들어가는 비용 1.1억 달러를 다 두바이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두바이의 가입이 승인되었다.

즉 아부다비에는 7천만 달러를, 태호에게는 1천만 달러를 지원하는 셈이었다. 그 뒤로는 6:3:1 비중으로 총 1억 달러를 예술품 구매에 쓰기로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1.1억 달러를 다 쓰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1.1억 불이라는 거금을 두바이가 첫해에 부담하지만, 두바이가 이번 지원 금액을 회수하는 데에는 3년이 걸리지 않으리라고 예상되었다. 그 정도로 태호-리스트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가가 빠르게 상승했다.

4월에는 아부다비에서 10월에는 두바이에서 아트페어를 여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아부다비의 조건과 같은 조건이 두바이 아트페어에도 적용됐다.

*

이제 펀드 운용에 대한 공은 태호에게 돌아갔다. 이 두 아트페어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에는 2백 50명 남짓한 작가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호의 리스트에 있는 작가는 이제 자국에서도 인기 작가로 등극하여 작품이 팔려나갔기에 전시할 작품도 부족했다.

태호는 백 오피스 직원 수를 늘리고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전문가들 수도 늘렸다. 붓을 꺾었던 기성 작가도 이 커진 미술 시장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이제 예술로 유명한 대학의 졸업 작품 전은 MLB나 NFL의 신인 선수 드래프트 같았다. 여전히 태호-리스트에 선택되는 사람들은 소수였지만 등용문 자체가 확실해지다 보니 시장 참여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나도 들은 얘긴데 요즘 예일대 미대 커트라인이 올랐데."

제이크의 설명에 태호는 다소 놀랐다. 예일대 미대 성적은 한동안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네가 작성하는 리스트가 시장에서 무척이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잖아. 어찌 되었든 예술적으로 인정받으면 작품이 떠서 금전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지.

가난하고 불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게 미술가란 직업인데 뭔가 확실하고 공평한 잣대가 생겼다고 판단하나 봐. 거기다가 예일은 네 모교라 더 뜬 거고. 한 번이라도 더 살펴주려니 기대하는 거지."

태호-리스트가 널리 알려지게 되자 가장 중요한 졸업작품전은 태호가 있는 뉴욕 근처의 미대나 모교인 예일대의 졸업작품전이 되었다. 그 덕에 학교 입학 성적까지 오른 것이다.

예일대가 그 수혜를 톡톡히 봤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서부의 대학들, 특히 칼 아츠나 UCLA에서 태호의 학교 방문을 강력히 요청했다. 정치인을 통한 로비가 들어올 정도였다. 두 대학은 태호에게 명예박사를 부여할 준비까지 이미 끝내두었다.

*

다음 해 초, 이처럼 전 세계 예술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확대되고 또 공고해지자 태호는 타임스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마침내 선정됐다.

생존 작가 중 최고가를 찍었던 이력과 아트페어 인 아부다비에서 태호가 보인 영향력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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