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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겸 갤러리 (171/181)
  • 미술관 겸 갤러리

    이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한국 진출이라고 생각했지 한국 집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태호처럼 잘 나가는 예술가가 아무리 고향이라지만 뭐가 아쉬워서 한국에 집착 싹이나 한단 말인가?

    "굳이 여기에 진출할 필요는 없는데 온 걸 보면 단순히 고향이나 부모가 있기에 온 게 아니야."

    "왜 여기 올 필요가 없어?"

    "미국도 진출도 다 안 끝났는데 굳이 한국에 왜 와? 정말 목표가 사업 확장이었으면 유럽을 먼저 갔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집착이든 진출이든 상관없지.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니까. 이번에 LVMH에서 사람 뽑는다고 얘기 돌던데. 들어봤어?"

    "조건이 지랄 맞더라. 영어, 일어, 중국어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그런 사람이 흔한가?"

    "없지만 뒤져보면 있겠지. 아, 옛날에 그 녀석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네. 걘 일어하고 중국어까지 잘한다더라."

    "세상 불공평하군."

    "아냐. 세상은 공평해. 저 녀석 전생에 나라를 구했던 거지로 굶어 죽어 신이 불쌍해서 환생시켰던지 둘 중 하나야."

    "흐흐.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건 아닌 듯하다. 한국에서 욕먹는 거 보면."

    "욕먹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을까?"

    "그렇겠네. 한국 진출하는데 사람 뽑아야지."

    "LVMH에서 사람 뽑는 게 저 태호가 사람 뽑는 거라는 말이 있더라. Theo 직원으로 뽑는 거라고."

    "그래?"

    "내가 영어만 해서 자격이 안 되니 알려준다. Theo 직원들 봉급이 패션업계에서 제일 높다고 하더라. 몇 벌 안 만드는데 비싸게 팔아서 그렇다네. 자격 되면 지원해라. 지인에게 알리던지."

    "땡큐!"

    "땡큐!"

    "씨에씨에."

    "아리가또."

    *

    기사 덕분인지 LVMH는 직원을 금방 채용했다. 금방이라고 했지만 3개월 정도가 걸렸다. 그래도 3개월이면 조건에 맞는 사람을 정말 빨리 뽑은 거긴 했다. 성별 나이는 상관없지만 까다로운 부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기에 더 오래 걸릴 거라 예상했었다.

    통역 출신 직원이 최종 후보로 뽑혔다. 통화를 해보니 오랫동안 VIP들의 통역을 담당해 이런 일을 맡기기에도 제격이었다.

    직원이 뽑히자 Theo 홈페이지에 영문 이외에 한글, 일어, 중국어 웹 페이지가 개설됐다. 그래 봐야 웹 페이지 3장 더 들어간 게 전부이지만 말이다.

    김유미 관장이 제일 먼저 연락이 왔는데 한국에선 유일했다. 나머지는 죄다 중국 본토나 홍콩에서 연락이 왔는데 신기하게 주로 부동산 재벌로부터 연락을 많이 왔다. 그리고 이상하게 일본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태호는 새로 뽑은 직원에게 평판 조사를 시키고 일정을 잡았다. 6개월 뒤 스케줄이었으며, 상해-홍콩-한국을 도는 코스였다. 김유미 관장을 제외한 다른 고객에게는 이동에 따른 추가 비용을 받았다. 100만 달러였다.

    아시아에서 Theo 사업은 그저 순항이었다. 중국 본토 부자들의 부는 상식을 초월했고 돈을 태워 담배를 피울 정도로 낭비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태호의 고객이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평판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가 많아 괜찮은 수준의 고객을 찾을 수 있었다.

    주로 IT 부자들이었으며 일부 부동산 재벌도 끼어 있었다. 그 수도 적지 않아 이 정도면 성공적인 런칭이었다.

    반대로 갤러리를 지을 생각을 하다가 스케일이 커져 미술관을 꿈꾸고 있는 태호에게 부동산 구매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대충 땅이 나와야 견적을 뽑고 건물 설계를 의뢰할 텐데 진도가 생각만큼 나가지 않았다. 1~2백억짜리 건물을 하나 둘 구매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갤러리는 올리겠지만 미술관을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부동산을 개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일은 역시 땅을 조용히 사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김 상무는 건물이 나오는 족족 매입을 하고 있지만, 한곳에 몰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누가 매집을 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 지역 건물가가 크게 오르기 때문이다.

    "천억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지르세요. 한국 부동산으로 재테크 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태호에게 아랍 왕가나 석유 재벌이나 할 법한 지시를 받은 김 상무는 팀을 꾸려 본격적으로 서울의 부동산들을 매입했다. 그들은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이어지는 대로 주변의 건물에 관심을 집중했다. 상당히 낡은 건물들이 많은 데다 매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호는 강남보다는 광화문에 관심이 많았다. 왜냐하면, 서울의 얼굴이라고 할만한 곳이 광화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광화문이 보이는 곳에 미술관을 가장한 갤러리가 들어가면 제법 근사할 것 같았다. 그래서 큰 비용을 지르더라도 그 지역을 차지하고 싶었다.

    서울의 빌딩들을 매입하기 시작하자 통장 잔액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태호의 경우 돈이 부족한 때는 사업 시작한 초기 빼고는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마른 땅에 물을 붓듯이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때가 됐다.

    *

    평소보다 훨씬 많은 초상화 주문을 소화하기 시작한 태호는 평소에 사양했던 그림 제작 요청을 받아들였다. 첫 주문은 아르노 회장이 했다. 그는 자신이 세울 미술관에 전시할 작품을 원했다.

    "자네를 위해 미술관에서 제일 관람하기 좋은 자리를 비워두겠네. 그저 빨리만 제작해주게."

    "어떤 주제를 원하십니까?"

    "내가 세운 럭셔리 제국에 어울리는 것이면 뭐든지."

    태호는 자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담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그맣게 LVMH 소속 회사들 로고를 집어넣었다.

    태호의 다른 주문은 아랍 에미리트 술탄이 했다.

    "사라 이사님. 이번에 영부인이자 청장님의 어머니이신 세이카 파티마 빈트 무바라크의 60세 생신이십니다. 선물로 초상화를 제작해 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앰버 님. 말씀드리기 정말 죄송합니다만 지금 예약이 많이 밀려있습니다. 조금 일찍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요. 더군다나 저희는 아직 방문 제작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값을 두배를 치르고 비행기도 보내도록 하죠."

    "선약이···."

    "세배. 꼭 부탁드립니다. 이는 다른 술탄들의 영부인 초상화 제작을 거절하는 조건까지 포함한 값입니다. 영부인의 생신이 두 달도 남지 않았기에 특별히 손해 보시는 건 없을 겁니다."

    "사장님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일정이 될지는 저도 확신은 없군요."

    이틀 뒤.

    "사장님이 특별히 승인하셨습니다. 요즘 주말도 없이 일하시는데 밤샘이라도 하시겠다고 하네요. 아랍 에미리트 왕가와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아랍 에미리트 왕가에서도 고가 의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

    태호는 부지런히 일했다. 평생 이렇게 열심히 일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 제작과 사업에 몰두했다. 그사이 제마가 임신했고 일 년 뒤 예쁜 딸을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영문 이름 한글 이름 모두 세라였고 수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숙영은 미역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남편 영준과 함께 뉴욕으로 날아왔다. 일주일 뒤 남편은 한국으로 돌려보냈지만, 숙영은 남았다. 딸 몸 푸는 걸 도와주는 친정엄마처럼 집에 히터를 틀어놓고 제마를 꼼짝 못 하게 하려 했다.

    애 낳고 다음 날 돌아다니는 게 미국인들인데 숙영의 행동은 미국인 기준으로는 조금 과했다. 거기에 미국에서 기어이 한국인 도우미 아줌마를 구해 태호 집에 앉혀놨다. 베이비시터였다.

    "어머니.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긴다는 데 거부감이 있던 제마였다. 하지만 태호가 한국에선 흔한 일이며 너무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애쓰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몇 번을 망설이다 받아들였다.

    숙영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베이비시터가 집에 일이 있어 사흘을 비운 날 제마는 육아가 왜 어려운 것인지 온몸으로 처음 깨달았다.

    옆에서 이틀을 제대로 잠을 못 잔 태호가 최대한 빨리 한국인 베이비시터를 추가로 고용했다. 돈이 배로 나갔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피곤해서 작업을 못 해 작품 제작이 늦어지는 게 더 문제였다.

    며느리뿐만 아니라 아들까지 생각해 베이비시터를 구한 숙영에게 태호는 다시 한번 감사했다.

    *

    태호의 딸이 18개월을 넘었을 무렵 한국의 부동산 업자 김 상무에게 연락이 왔다.

    "사장님. 드디어 광화문 근처에 경복궁 사거리에 2천 평의 대지를 확보했습니다."

    김 상무는 광화문 앞 노른자위 땅 구매에 성공했다. 오래된 빌딩 여러 채가 한꺼번에 물량으로 나왔는데 태호를 설득해 거기에 과감하게 배팅했다.

    거의 2천억 가까운 돈이었다. 덩어리가 크고 광화문하고 가까운 이점으로 프리미엄이 붙었다.

    눈독을 들인 지역이었고 흔하지 않은 기회였기에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진으로 보내주시긴 했지만 직접 가서 보고 싶군요."

    지난 3년간의 순수익을 거의 다 부어서 마련한 땅이기에 태호는 직접 두 눈으로 담고 싶었다.

    식구들과 한국에 날아온 태호는 부모님과 함께 광화문 사거리 근처로 향했다.

    "이 건물들을 다 네가 샀다고? 이 노른자위 땅을? 뭐하러?"

    영준은 아들의 기행 아닌 기행에 황당한 표정이었다.

    "미술관 겸 갤러리를 지으려고요."

    "여기 거의 평당 7천만 원은 해 보일 땅인데?"

    "거의 9천 가까이 들었어요."

    태호의 스케일에 영준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너 아랍 에미리트와도 같이 미술관 사업 같이한다고 하지 않았니?"

    "맞아요."

    "그런데 이 넓은 땅에 미술관을 짓겠다고? 이건 한국에 거액을 기부하는 건데······. 너 한국이 밉지 않니?"

    영준은 태호의 맘고생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한국 사람이 뭐가 미워요. 그렇게 선동한 사람이 미운 거죠. 저도 잘한 건 없고요."

    영준은 고개를 앞뒤로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영준은 땅 면적과 모양을 살펴보더니 태호에게 물었다.

    "어떻게 지을 거니? 설계는 누구에게 맡길 거야? 두 교수님이 알아봐 주신 데?"

    "아뇨. 그건 아니에요. 장 누벨에게 의뢰 맡길 거에요. 전에 빨리해주신다고 했거든요."

    "장 누벨이 누구니?"

    "아부다비 미술관을 설계하신 분이에요. 다움 미술관도 그분 설계고."

    영준은 아들의 스케일에 다시 한번 놀랐다. 기존 작품들 이름만 들어도 거장 냄새가 풀풀 났다.

    "그래···. 그럼 설계에 시간이 좀 걸리겠구나."

    "빨리해주신다고 했어요. 전에 가서 그림으로 로비를 좀 했거든요. 한 1년에서 1년 반 정도?"

    영준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더니 김 상무를 보고 물었다.

    "여기 건축허가 나는데 보통 얼마나 걸립니까?"

    "한 달에서 두 달이면 납니다."

    "그런가요? 그럼 그때쯤 되면 건물을 비우고 철거에 들어가야겠군요. 건물이 낡아 임대료도 얼마 안 나올 거 같은데."

    "그렇습니다, 최 대표님."

    영준은 태호를 보고 건축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지금 2천억을 들여 땅을 사들인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건설비가 얼마나 들어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마 땅값과 비슷하거나 건축 난이도에 따라 더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아들은 처가도 있고 급하면 아랍 에미리트에 손을 벌일 수도 있었다. 태호가 건축비가 부족할까 걱정하는 건 오지랖이었다.

    정작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태호가 이 땅을 사긴 했지만, 분명히 노리던 사람이 있을 것이고 빼앗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광화문 앞이라 인허가가 말도 안 되게 까다로워 지는 건 거의 확정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라도 별 희한한 걸 트집 잡을 수도 있었다.

    영준은 태호를 보며 말했다.

    "아빠가 김 상무와 이쪽에 신경을 쓸 테니 넌 설계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는지 확인해라. 바쁜데 왔다 갔다 하면서 신경 쓰지 말고."

    "네, 아버지."

    *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태호는 한국 Theo의 박유선 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그녀를 만나러 삼성동으로 향했다.

    "그래. 전화로 할 얘기가 아니란 건 뭡니까?"

    회의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초상화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사장님."

    늘 들어오는 초상화 의뢰에 무슨 호들갑을 그렇게 떤 건지 태호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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