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2
"제가 국적을 포기할 당시 일을 생각해보시면 알 겁니다. 모든 언론이 다 일어나서 비난하는데, 감당이 안 되더군요. 그래도 여론의 비난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더군요. 마치···."
태호의 얼굴은 씁쓸함으로 물들어갔다.
"타살처럼 느껴졌습니다."
태호는 잠시 미간을 만지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절 버린 것 같았죠."
"..."
"한 달 뒤 제마가 나타나기 전까지 집안에 처박혀 술만 먹고 그림만 그리며 지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게 우울 시리즈입니다."
우울 시리즈는 없던 우울증까지 생기게 만든다는 그림이었다. 당시 태호의 심정이 어땠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강 기자는 우울 시리즈에 담긴 그 절망감을 비로소 이해했다.
"혹시 한국 국적을 버리신 걸 후회하십니까?"
"... 후회가 아니라 슬펐습니다. 원해서 포기한 한국 국적이 아니었으니까요."
"만약 한국 국적을 다시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태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자신이 한국 국적을 원하는지.
판단이 바로 서지 않았다.
한번 어렵게 국적을 포기하고 나니 국적에 대한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 파리에서도 느낀 거지만 자신이 프랑스인인지 미국인지 한국인이지 과연 국적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건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영리하게 대답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전 그렇게 뻔뻔한 사람은 아닙니다. 국적을 은행 통장처럼 만들었다 없앴다 하고 싶지는 않군요. 한때 한국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강 기자는 태호의 지금 인터뷰가 진심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껏 자신에게 불리했던 여론을 돌리기 위해 이런 인터뷰를 생각은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뭐가 되었던 좋았다. 태호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일으키는 기사도 팔리긴 할 테니까 말이다.
강 기자는 다음 주제인 리스트로 넘어갔다. 지금 전 세계 미술계와 미술시장을 들었다 놓은 게 바로 태호-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몇 달 전 공개한 리스트로 전 세계 미술시장이 뒤집혔습니다. 지금 리스트에 있는 작품뿐만 아니라 그 작가들 작품도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입니다. 가격표를 새로 붙여서 하나둘 나오고는 있더군요.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가격이 올라갈지 분명히 알고 계셨을 텐데 리스트를 공개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막말로 가지고 있다가 다음 작품을 샀어도 됐을 텐데요."
"어차피 떠돌 리스트였습니다. 제가 작품을 잔뜩 사들인다는 건 시장 참여자들은 다 알고 있던 얘기고, 누군가는 만들어서 배포를 했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 공증된 리스트를 공유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태호 작가가 금력으로 미술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죠. 리스트 하나로 벌써 10배의 시세 차익을 챙겼다는 말도 돌고 있는 형편입니다. 의도 하신 겁니까?"
도덕성 논란이라는 말에 태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바닥에 도덕성이 어디 있다고 자꾸 도덕성 운운하는지 들을 때마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기분이었다.
"주식 시장에 큰손이 들어와 자신이 원하는 우량주를 샀다면 그걸 시장 교란이라고 부르나요? 제가 지금까지 본 신문에서는 보통 외부 자금 수혈이라며 시장 참여자들이 기뻐하던데요.
제 리스트를 보고 불만이신 분들은 아마 리스트에 등재되지 못한 분일 텐데 이 리스트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드리고 싶군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담긴 리스트입니다. 그분들은 아마 저보다 나은 컬렉터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자기보다 나은 컬렉터를 찾으라는 태호의 말에서 까칠함이 느껴졌다. 강 기자는 이 까칠함이 너무 자연스러워 이게 태호의 본래 성격이라고 확신했다.
"리스트에 담긴 작가와 작품을 보면 아시아부터 남미까지 다양합니다. 도저히 태호 작가 혼자 커버할 수 없는 활동 영역인데요. 시장에서는 태호 작가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고 또 그 사람들이 누군지 추정하는 내용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당장 아시아만 해도 태호 작가의 스승인 강 교수님과 김 교수님이 리스트에 담길 작품과 작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말이 돌고 있고 시장 관계자들은 그걸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다만 절 도와주는 분들이 있지만 전 그분들의 평가를 고려할 뿐입니다."
"그 말은...?"
"최종 의사 결정은 제가 다 합니다. 그분들의 평가를 참고해서요."
"혹시 비율을 알 수 있을까요?"
"무슨 비율을 말씀하시는지?"
"평가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열 작품 중 한 작품을 구매한다거나 하는 그런 비중이 있을 것 같습니다."
"10대 1에서 20대 1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는 2대 1 에서 3대 1 정도지만 태호는 이를 부풀렸다. 좀 더 많은 사람이 평가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혹시 리스트를 작성하는 평가단이나 심사위원으로 속이고 가격을 후려치는 사기꾼들이 시장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속지 마시고 자신과 작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거래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얼마 전부터 여러 경로로 들어온 내용이었다. 한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는데 딱히 명확한 해결방법이 없었다. 그저 작품에 자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거래하라는 말밖에는 할 말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인터뷰는 제마와의 결혼 생활을 물어보다 태호의 처가 로웰 가로 이어졌다.
"한국에도 처가인 로웰 가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었습니다. 예일대 기숙사 룸메이트가 로웰이 사람인 게 인연이 되어 아내인 제마와도 만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태호 작가의 결혼식 때 사진이 일부 돌기도 했는데요. 장모 되시는 앨리스 여사의 외모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장인 장모 되시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어디서 찍힌 사진인지 처가 식구들이 다 들어간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앨리스의 사진이 놀라움을 자아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60대지만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피부와 그 지적인 모습에 한국 연예인과도 비교가 됐다.
주로 굴욕 사진이었는데 앨리스와 비교되는 연예인 모두가 오징어가 되어버렸다.
"장인이신 마틴은 뉴욕에서 100년 이상 사업을 이어온 로웰가의 사업을 물려받아 지금의 거대 기업 로웰을 만드셨습니다. 장모님도 예일대 법대 졸업하셨고 퍼스트레이디였던 힐러리와 친하세요. 같이 학교에 다녔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차기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힐러리와 동문에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사이라니 한국 외교가가 알았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정보였다. 태호가 한국인이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장인이신 마틴도 예일대 출신인 거로 들었습니다만."
"예. 장인 장모 두 분은 예일대 커플이셨습니다. 큰아들인 로이도 예일대 출신의 의사입니다."
"집안 식구들이 다 예일대 출신이군요!"
강 기자는 제마는 예일대 출신이 아닌 걸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집안 전체가 예술 애호가이기도 합니다. 로웰 가는 대대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는데 수집한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정말 뉴욕의 미술관에 걸려있어도 손색이 없는 걸작들을 다수 보유 중입니다. 저도 처음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니까요."
강 기자의 질문에 저택에 걸려있던 몇몇 작품들을 알려주자 강 기자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거의 보물급들의 작품이네요. 그럼 태호 작가의 작품도 걸려있는 겁니까?"
"장모님이 제 그림을 정말 좋아하세요. 지금 로웰가 저택 안에서 눈에 띄는 곳에 있는 작품들은 다 제겁니다."
"하하. 장모님의 사위 사랑이 대단하군요."
"마틴이 질투할 정도예요."
웃으며 말하는 태호를 보며 강 기자도 웃었다.
"그렇겠습니다. 이렇게 들으니 일반 가정과 다를 게 없네요."
"부잣집이라고 별거 있나요. 그저 생활이 조금 더 편하다는 걸 빼면 말입니다."
"그렇네요."
인터뷰는 예일대 얘기를 마무리하고 제마와의 결혼 생활을 얘기를 거친 후 태호의 한국 방문 목적으로 넘어갔다.
"Theo 브랜드 런칭 문제로 한국에 왔습니다."
"Theo요?"
강 기자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Theo가 뭔지 생각했고 스티브 케인의 장례식 이후 화제가 됐던 명품 브랜드를 기억해냈다.
"그···. 태호 작가가 사장으로 있는 초고가 브랜드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지금 입고 있는 옷도 Theo인 건가요?"
강 기자는 태호가 입고 있는 힙한 고급 옷이 Theo 브랜드 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떤 로고도 없었기에 짐작도 못했다.
"초 고가라인이라는 건 들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잘 모릅니다. 아는 사람도 없군요. 적어도 한국에서는요. 살짝만 알려주시겠습니까?"
"지금 입고 있는 이 정장이 3억 정도 합니다."
순간 강 기자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뭔가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으로 태호를 쳐다봤다.
"마크 제이가 디자인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장입니다. 마크가 남자 옷을 그렇게 많이 제작하는 건 아니어서 비쌉니다."
그제야 강 기자도 왜 옷이 비싼지 이해했다. 정말 오리지널 디자이너 메이드 옷이었다.
"그런 디자이너의 고가 옷만 파는 브랜드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Theo는 초상화 제작을 주업으로 하는 브랜드입니다."
"제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초상화 제작이라니."
태호는 옷을 맞추고 그 모습을 초상화로 제작하는 Theo의 사업 모델을 간단히 설명했다.
"혹시 가격은 어느 정도입니까?"
"지금은 조금 올라서 250만 불 정도 합니다."
상상도 못 할 고가에 넋이 날아가는 착각까지 났지만, 강 기자는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그렇게 고가인데도 고객들이 많으신가 봅니다."
"처음에는 조금 띄엄띄엄했는데 지금은 1년 예약이 다 찼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시장에 오시는 이유가?"
"미국 시장만 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미국 동부 전통적인 부잣집 가문들이 주 고객인데 시장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잠시 Theo 브랜드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강 기자는 문뜩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하더니 태호에게 말했다.
"제가 인터뷰를 할 게 아니라 패션잡지 기자가 인터뷰했었어야 했네요. 처가인 로웰 가 이야기만으로도 잡지가 대박이 나겠군요."
"그런가요?"
"물론입니다. 혹시 제가 기자 하나 더 불러도 되겠습니까? 보그지나 코스모폴리탄 둘 중 어디가 마음에 드십니까?"
강 기자는 잡지사에서 거액의 커미션이라도 챙길 생각인지 적극적으로 태호에게 부탁했다.
"글쎄요···."
얼마 뒤 태호는 못 이기는 척 허락했고 강 기자는 잽싸게 보그지와 코스모폴리탄의 지인에게 연락했다.
"혹시 미즈 제마도 인터뷰할 수 있겠습니까? 두 분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합니다."
"그럼 별도 인터뷰를 갖도록 하지요. 시간은 내일 오후 2시 정도로 하고요."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밖으로 잠시 나간 강 기자는 조금 후에 다시 들어왔다.
"혹시 모레는 가능하신가요?"
"출국합니다만."
"아, 그러시군요. 내일 2시로 하시죠. 점심 식사는 어떻습니까? 보그에서 대접하고 싶어 합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군요."
"말씀하세요."
"아내까지 인터뷰를 할 거면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애써 시간을 냈는데 아내가 대화에 못 낀다면 그건 아닌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