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1
고려 신문의 강현석 기자는 해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한국 국적이나 한국 출신 작가들을 인터뷰해 기획 기사를 내고자 태호와 접촉했었다.
태호는 그가 인터뷰를 원하는 대상 1호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 언론을 피해온 태호는 이 인터뷰뿐만 아니라 한국 언론이나 잡지사가 요청하는 모든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었다. 해봤자 욕만 먹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는데 결혼식을 한국에서 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인터넷에서 욕을 먹는 건 여전하지만 비난의 강도가 줄었다. 추측이지만 제마와의 결혼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것 같기도 했고 살아있는 최고 거래가 작가라는 타이틀도 영향을 미친 듯했다. '못된 놈이지만 잘난 건 인정한다.'라는 분위기가 엿보였다.
비난이 줄어든 또 다른 이유는 비슷한 이유로 욕을 먹던 다른 가수 출신이 워낙에 나댄 탓에 사건 이후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뉴스만 나간 태호에 대한 동정 여론도 넓게 퍼진 듯했다.
고려 신문의 강현석 기자는 이런 태호를 인터뷰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온 베테랑 기자였다. 태호를 인터뷰하지 않고는 이 기획 기사 자체가 의미가 없기에 개점휴업 같은 상태였는데 얼마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요청한 인터뷰를 태호가 받아들이면서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카페의 회의실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조금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날씨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신변잡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태호의 활동에 관한 얘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빛의 마리아를 조각상으로 제작하셨어요. 조각을 제작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강 기자는 평소에 궁금했던 모든 걸 이 자리에서 풀 각오였다.
"뉴욕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강 기자는 이름만 듣고도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왜 자신이 태호와의 인터뷰를 그토록 오랫동안 원했는지 이유를 말해주는 한마디였다. 톱 티어 예술인인 만큼 만나는 사람도 톱 티어였다.
"빛의 마리아 조각상을 왜 제작하지 않는지를 물어보더군요. 그 당시만 해도 생각은 했었지만, 실행에는 못 옮기고 있었는데 카텔란 작가의 말을 듣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빛의 마리아 조각상을 뉴욕 갤러리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냥 말이 필요가 없더군요. 첫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유심히 작품을 감상하는데 그림을 주로 그리신 태호 작가께서 어떻게 조각상을 제작하셨는지 궁금하더군요.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작을 도와줄 조각가를 수소문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안드레 마키스인데 솜씨가 좋은 조각가입니다. 제가 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멋진 조각상을 제작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제작했다는 말에 강 기자는 그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사실, 이 질문이 정말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작품을 제작하는 게 한국에서는 잘 용납이 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이에 대한 태호 작가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건물을 직접 짓지는 않습니다. 시공사가 따로 있죠.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 건물을 보고 시공사의 건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건축가의 건물인 거죠. 시공사도 그 이름을 드러내지만 딱 그 정도 입니다. 즉 대체 가능한 어떤 것에 대해 인정은 해도 의미를 크게 둘 필요는 없는 거죠."
"만약 작가의 아이디어나 기획 의도가 반영되지 않은 작품을 작가의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그건 사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태호 작가는 작가의 아이디어나 기획 의도는 작품에 얼마나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올드 합니다. 작품이 제작되는 현장에 작가가 있어야 하고 제작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작가 중 조수를 고용해서 작업하는 작가가 세 명 있습니다. 제프 쿤, 무라카미, 데미안. 제프와 무라카미는 수십 명의 조수를 고용하고 데미안은 백 명이 넘는 조수를 고용해서 작업했습니다.
제프와 무라카미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조수들이 작업하며 두 사람은 작품 제작 과정을 관찰하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제작되는지 확인합니다.
이는 데미안도 마찬가지지만 작업실에 백여 명이 넘은 사람이 있으면 작품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직접 관리하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작업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작 아이디어는 제공하지만, 작업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경우는 어떨까요?"
"마텔란씨가 그런 경우겠네요. 아이디어는 제공해도 작품 제작 자체는 친구분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네요."
강 기자의 말은 저작권에 대한 인정 범위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아니요. 어렵게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제작 과정을 공개하면 그뿐이니까요. 그렇게 제작된 작품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사시면 됩니다. 이런 정보는 구매자에게 정확히 전달되는 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딜러들이 잘 밝히지는 않지만요."
"제작 과정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그렇습니다."
"태호 작가는 어떻게 작업하십니까? 제프나 무라카미처럼 조수를 쓰십니까?"
"물론 저도 조수가 있습니다. 저도 한창 많을 때는 40명까지도 조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줄어서 10명입니다만."
"어떻게 작업을 하십니까?"
"올드 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림 같은 경우는 스케치는 제가 다하고 조수에게 채색을 맡기는 편입니다. 고전 방식이죠. 무라카미나 제프는 이 정도로 제작에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태호 작가가 그림을 하나 구매했는데 제작 과정에 대해 나중에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작가가 아이디어만 제공한 작품이었고 다른 작가가 작품 전체를 제작했습니다. 그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전 작가의 작품 제작 능력을 많이 고려합니다. 작가의 제작 능력을 상당히 중시하죠. 하지만 지금은 조수 없이 작품을 제작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압니다.
한 작품을 몇 년씩 잡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생각한 나름의 타협안은 조수의 작업이 많더라도 작가의 독창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라면 작가의 작품으로 인정합니다."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아서 그러는데 한가지 예를 들어주시죠."
"조수가 그린 그림이 작가가 지금까지 그런 어떤 그림보다도 낫다면 그걸 작가의 작품으로 인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조수의 작품으로 인정해야 할까요? 조수가 그린 수준의 그림을 작가가 제작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적어도 저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작권 얘기가 마무리되고 대화는 더 민감한 문제인 태호의 국적 문제로 넘어갔다. 한국 언론에서 그토록 다루고 싶어 했던 주제지만 태호가 직접 견해를 밝힌 적이 없어 기사를 쓰기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지금 이 기사가 나가면 다시 한번 태호의 국적 문제가 물 위로 떠 오를 것이고 비슷한 기사들이 신문의 문화란을 채울 것이다.
"태호 작가의 국적 문제가 훨씬 더 부드럽게 해결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는데, 제일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그때 일은 우울 시리즈를 제작한 이후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네요."
"우울 시리즈가 한국 국적을 포기할 당시 제작했던 작품이라고 알려졌는데 국적 문제가 영향을 끼친 게 맞습니까?"
"정확히 말씀드리면, 국적을 포기했기에 제작한 그림이 아니라 그 일로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작한 그림입니다."
태호는 국적 문제보다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우울 시리즈의 모티브로 설명했다. 아름아름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이걸 공식화한 것이다.
"당시 상황을 조금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강 기자의 질문에 태호는 상당히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당시 기자들도 '카더라' 수준의 추측만 할 뿐 정확한 내막은 몰랐습니다. 소위 찌라시라고 불리는 돈만 받으면 아무 기사나 올리는 변두리 언론사에서 기사가 올라온 후 그걸 주류 언론이 받아 적고 확산시켰습니다. 여론에 의한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기자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나돌았지요."
강 기자는 태호가 말문을 닫을까 봐 최대한 순화해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럼 그 변두리 언론사에 누가 기사를 올렸는지도 아시나요?"
"아닙니다.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짐작하는 사람은 있고, 확신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누가 찌라시에 돈까지 주며 기사를 쓰게 했는지 말은 못 하겠습니다."
"작가님의 국적 상실이 누군가 의도한 작업이라는 겁니까?"
강 기자의 태세 전환에 태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자신에게 호의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삿거리가 나오니 더 적극적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추측'합니다."
"혹시 추측하시는 분이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태호는 옆에서 돌아가는 녹음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끄면 말씀드리죠."
오프더레코드로 하자는 말이었다. 강 기자의 녹음기 옆에는 태호의 녹음기도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태호가 내건 인터뷰 조건이었다.
아쉬운 얼굴을 애써 숨기며 강 기자가 레코드를 껐다. 그 모습을 보자 태호도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닌 얘기입니다. 재벌 3세의 치정에 끼어들었다가 세게 얻어맞았습니다."
"누군가요, 그 재벌가가?"
"제 동창이 주서현 입니다. 다성의 막내딸."
그제야 강 기자도 재벌가들 사이에서 다성의 막내딸을 노리는 3세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했다. 외모도 출중해 더욱 인기였다. 결혼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태호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가난한 집의 로맨스는 대개 슬프고 시시하지만, 부잣집과 예술가가 낀 로맨스는 못 해도 아침 막장 드라마는 만들 수 있었다. 강 기자의 텐션이 한참 올라갔다.
"서현이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서현의 부탁으로 당시 서현이 만나던 재벌 3세와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갸우뚱한 표정의 강 기자를 보고 태호가 부연 설명했다.
"그 정도로 친했습니다."
"네···."
"만난 자리에서 그 남자 얘기를 이렇게 듣다 보니 서현의 짝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를 했는데···. 제 국적 얘기가 다음 날 아침부터 기사가 돌기 시작하더니 저녁에는 전국 뉴스에 나오더군요.
뒷얘기는 태호가 굳이 자기 입으로 설명 안 해도 다 아는 얘기였다. 다만 할아버지 얘기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정확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당시 심장이 안 좋으셔서 바이패스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셨습니다. 그러다 손자가 병역 기피에 도망치듯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얘기에 심하게 충격을 받으셨어요. 뇌혈관에 문제가 생기실 정도로요."
강 기자도 주변에 그런 경우가 있어서 다음 얘기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유감입니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태호의 말에 강 기자는 눈이 번쩍 뜨였다. 손가락으로 녹음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녹음기 다시 눌러도 될까요? 할아버지 얘기부터는 기사에 담았으면 합니다. 그 얘기가 없으면 한국 국적 얘기가 연결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세요."
강 기자가 녹음기를 누르자 태호는 할아버지의 심장 수술을 언급하며 한국 국적 얘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