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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출 준비 (167/181)

한국 진출 준비

호텔 체크인을 하고 짐을 대충 푼 후 택시를 타고 이촌으로 향했다. 서울 방문이 두 번째인 제마는 여전히 서울이 낯설었다.

"금방 도착할 거야. 가까우니까."

창밖의 서울을 눈에 담는 제마에게 태호가 말했다. 그러자 제마도 고개를 돌려 태호에게 말했다.

"왜 숙소를 호텔로 잡은 거야? 난 시부모님댁에 머물러도 상관없는데."

"여행 온 게 아니고 출장 온 거잖아. 그리고···."

"그리고, 뭐?"

"애도 만들어야 하는 데 불편하잖아."

출장 와서 애를 만들겠다는 태호를 어처구니없게 바라보다 제마도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말을 버젓이 택시 안에서 하는 태호의 입술을 꼬집었다.

"이런 말은 둘이 있을 때만 해."

사실 태호가 호텔로 숙소를 정한 이유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시어머니와 새댁이 천장도 낮은 이촌 아파트에 함께 머물러봐야 하루 이틀은 상관없지만, 일주일씩 늘어지면 좋아질 게 없다는 판단도 했다. 애는 여러 이유 중 하나였을 뿐이다.

회계 회사에서 나와 개인 사무실을 연 영준과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숙영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내외를 정말 반갑게 맞이했다.

저녁 식사 중 영준과 숙영은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아들에게 섭섭함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태호의 한마디는 그런 두 사람의 모든 섭섭함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다음에 올 때는 손자와 같이 올게요."

호텔로 돌아온 태호는 제마에게 등을 세게 얻어맞았다.

*

다음 날 아침.

며느리와 쇼핑을 하길 원하는 숙영에게 제마를 보내고 태호는 LVMH 코리아 사무실로 향했다. 태호를 환영하는 임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태호는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뉴욕 본사의 요청으로 한국 LVMH는 시장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한국 시장은 대기업 오너 가족이나 몇몇 IT 기업 오너들이 Theo 고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최근 자산 가격 급등으로 인해 여유가 생긴 부동산 보유자도 주문 가능성이 큽니다."

LVMH 직원이 시장 분석 자료를 소개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주의 깊게 설명한 내용을 듣던 태호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심드렁해졌다. 자신이 원하던 방향과는 상당히 결이 달랐다.

직원의 설명이 끝나자 태호는 자기 생각을 밝혔다.

"한국에서 고객을 모으려 애쓸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도 예약이 밀려 많은 고객을 받을 수도 없고요. 어제 말씀드린 데로 예약을 조율할 직원 한 명이 있으면 됩니다."

"광고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광고는 인터뷰로 대체할 겁니다. 당장 내일 있을 잡지사 인터뷰에서 Theo의 아시아 진출을 언급할 생각입니다. 스티브 케인 덕분에 인지도가 올라가서 한국에서도 찾는 분들이 있긴 하신 것 같더군요."

태호도 한국의 송정호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작품을 구매할 때면 꼭 독일 차에 Theo 옷을 입고 작가를 방문했는데 디자인과 패션에 민감한 작가들일수록 송 팀장의 옷에 관심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스티브 케인 장례식 때 로라의 패션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 실제 계약으로 이뤄진 적은 없었다. 미국까지 와서 초상화를 제작할 생각은 못 하는 듯했다.

"그럼 직원 한 명만 있으면 됩니까?"

"외국어에 능통한 직원이 필요합니다. 일본과 중국 시장도 커버해야 하고 VVIP를 상대해야 하니 그쪽 사람들과도 업무를 한 경험도 있으면 좋겠군요. 단, 난 을로 장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매너 좋고 당당한 사람으로 뽑았으면 좋겠군요. 그 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안 치이고 일할 배짱도 있어야 합니다."

담당 직원은 먼저 LVMH 직원 중 이 일에 관심 있는 직원 하나를 쓰든지 아니면 새로 뽑기로 했으며, 업무도 담당자가 정해지면 시작하기로 했다.

*

한국에서 의외로 빨리 만난 사람은 송정호 팀장이다. 가끔 전화통화만 했는데 송 팀장 요청으로 급하게 저녁 약속을 잡았다.

간단히 저녁 겸 술안주를 주문하고 소주를 먹기 시작했는데, 송 팀장과 한동안 신변잡기와 늦둥이에 관해 얘기하더니 조금 지나서 본론을 얘기했다.

"사장님, 혹시 한국에서 갤러리 열 생각 없으십니까?"

"갤러리요?"

"네. 한국 시장이 협소해서 사장님 정도의 인지도에 리스트에 있는 작가들만 끌어올 수 있으면 한국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사장님의 입지는 한층 더 올라갈 거고요."

태호는 송 팀장의 제안에 상당히 놀랐다. 자신이 왜 Theo를 한국을 진출시키려 하는지 의도를 아직 밝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 관심이 많은 건 어찌 아셨어요?"

"결혼식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Theo가 한국 진출을 계획한다는 사장님 얘기를 들으니 그런 의도가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잘못 넘겨짚은 거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송 팀장님이 맞게 보셨어요. 한국에 관심이 있는 건 맞습니다."

"그렇다면 갤러리 진출을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사실 만나는 작가 중에 사장님이 해외 진출을 도와줬으면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직 한국 작가들이 알려지지 않아 저평가된 상태여서 그렇습니다."

태호는 잠시 고민을 하다 자신이 직접 갤러리를 열지 않은 이유 중 하나를 설명했다.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닌데 '도덕적 해이' 문제가 있더군요. 리스트에 대한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고요. 소탐대실 할까 봐 사실 머리 한쪽으로 밀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윌슨 씨의 뉴 썬 갤러리는 어떻습니까? 윌슨 이름으로 갤러리를 개관하셔도 한국 미술 시장을 큰돈 들이지 않고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겁니다."

태호는 큰돈 들이지 않는다는 송 팀장의 설명에 한국 미술 시장 규모가 궁금했다. 전에 두 교수에게 배울 때만 해도 이런 구체적인 자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한국 미술 시장이 작습니까?"

"한국 미술 시장 규모가 3천억에서 4천억 정도 합니다. 임직원이 10명만 되어도 대형으로 구분하는데 직원을 10명 이상 고용한 갤러리가 열 군데가 안 됩니다. 게다가 연간 5억 원 이상의 실적이 있는 곳도 스무 군데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영세한 소형 갤러리들이 많다 보니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작가들과 컬렉터들이 많습니다."

"어떤 피해를 얘기하는 겁니까?"

"미술품을 싸구려 물건 흥정하듯이 파는 건 기본이고 100에 팔았으면 계약대로 작가에게 50을 줘야 하는데 30을 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작품에 대한 평론조차도 믿을 수가 없을뿐더러 돈을 주고 평론을 요청하는 때도 많아 신뢰성이 극히 떨어집니다."

가격 결정, 유통 구조, 갤러리의 거래 관행, 평론가와 전문가 부재 등등. 이런 문제들은 국내 미술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건 세계 공통이며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뜻밖에 이런 부분에 대한 개선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워낙 시장이 작아서 그렇다.

"한국의 은행들과 개인 컬렉터들이 한국 작가의 작품을 사고 싶어도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구매를 망설이고 있습니다. 신뢰도 높은 갤러리가 들어선다면 작품 거래가 훨씬 활발해지고 작가들도 올바른 평가와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자신의 설명에도 여전히 망설이는 태호를 보며 송 팀장은 태호-리스트에 오른 많은 작가가 소속 갤러리를 옮길 준비가 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태호-리스트에 오른 작가 중에 계약된 갤러리가 없는 작가들도 꽤 있고 기존 갤러리와 계약 종료 후 재계약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작가들도 꽤 있습니다. 제가 급하게 사장님을 찾은 이유입니다. 아니면 뉴욕으로 날아가려고 했었습니다."

송 팀장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 태호는 검토를 해보겠다며 그날 저녁 식사를 마쳤다.

*

태호는 먼저 뉴욕의 윌슨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에 갤러리를 오픈하는 얘기를 꺼냈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 추진하실 거예요?"

"난 못할 듯하니 자네와 제시카가 하는 게 어떤가? 아니면 에디랑 하던지."

에디는 제시카의 남편으로 몇 년 전 결혼했다.

"제시카나 에디요? 어디 아프세요?"

태호가 걱정하며 묻자 윌슨은 태호가 오해할까 싶어 바로 대답했다.

"아프긴. 내 나이도 이제 60이 넘었어. 나이가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한국일까지 챙기긴 힘들어. 이번 아트바젤을 마지막으로 아트페어 일도 제시카에게 넘길 생각이네. 결정되면 알려주게. 나야 자네와 일하는 건 언제든 환영하니."

"알았어요. 결심 서면 연락드릴게요."

*

윌슨과 전화를 끊은 태호는 다음날 스승인 두 교수를 만났다. 태호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바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래저래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뭘 그렇게 망설이세요?"

두 교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다 강 교수가 총대를 먼저 메고 갤러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갤러리를 운영하는 작가가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작가가 운영하는 갤러리는 없다. 그것도 현업 작가가 말이지. 분명히 말이 나올 거다."

"괜찮아요. 한국에서 욕 좀 더 먹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요 뭐."

"네가 직접 운영할 생각은 아닌 거지?"

"그럼요. 그럴 시간 있으면 작품하나 더 만드는 게 나아요."

"그래. 어떻게 운영할 생각이냐?"

"송 팀장님 사장으로 앉혀 놓을 생각이에요. 그분 인맥으로 사람 뽑거나 교수님이 추천하는 사람들로 딜러 뽑아도 되고요."

"갤러리 건물은?

"청담 쪽에 근사한 거 하나 뽑죠. 뭐."

"청담에 건물을 사서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그림을 팔자고? 완전히 밑지는 장산데?"

"그럼 1층에는 커피 팔고 2층 와서 그림 보라고 하죠. 청담에 갤러리 들어갈 만한 건물은 얼마나 할까요?"

"글쎄. 못해도 수백억은 할 거 같은데?"

그럼 수천만 달러 밖에 안 하네요. 올해 열심히 만들어 팔고 윌슨 아저씨에게 돈 좀 쓰라고 하면 돼요. 돈 많이 버셨는데요 뭘."

"건물은 새로 올릴 생각이냐?"

"네. 좀 허름한거 사서 허물고 새로 지어야겠어요."

"건축가는 있고?"

"프랭크 게리 선생님이나 장 누벨 선생님에게 부탁하려고요."

스케일 하나는 거물급인 태호의 말에 두 교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정도면 수백억이 아니라 수천억을 들여 건물을 지어야 수지가 맞았다.

"가능하다면요. 프랭크 선생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잘 될지 모르겠어요. 장 누벨 선생님은 그래도 가능하긴 하지만."

"어떻게 그분들을 아는 거냐?"

"프랭크 게리 선생님은 아르노 회장 통해서 가능할 거 같고요. 장 누벨 선생님은 아부다비 정부를 통하면 될 것 같아요. 소개는 그렇게 받아도 실제 설계를 해주실지는 아직 의문이에요. 워낙 바쁜 분들이라."

"그렇겠지. 건물 올릴 거 같으면 미리 알려줘." 강 교수가 말했다.

"네."

태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사유를 물었다.

"그래야 빚을 내서라도 네가 건물 지을 곳 옆에다가 나도 뭐라도 하나 사지. 네가 그렇게 건물을 지으면 바로 랜드마크가 될 텐데 근처 부동산값들도 다 오를 거다."

강 교수는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살핀 후 태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런 건물을 지을 자금은 충분하니?"

태호도 주위를 살핀 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구글 대주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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