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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아부다비 - 준비 (166/181)

아트 아부다비 - 준비

태호는 제마와 한참을 2층을 구경하다 1층으로 내려갔다. 자신이 찾는 원석은 2층에 더 많았으며 1층에는 반짝이고 잘 가공된 보석이 많았다.

2층에서 태호는 영토를 정복한 새로운 군주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태호-리스트에 포함된 작가를 가진 갤러리는 작가의 신작을 소개하며 아부했고, 아무도 없다면 자신의 작가를 소개하며 아부했다. 그들은 절대로 태호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았다.

1층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구시대 귀족 같은 갤러리 주인들이 태호에게 보인 반응은 대부분 경계였지만 적대가 없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한 태호가 들어간 곳은 헬싱키에 있는 갤러리 안하바의 부스. 소개를 부탁하는 태호에게 비에라라는 이름의 직원은 마지못해 작가와 작품에 관해 설명하다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작가들은 아트페어에 잘 오지도 않는데 당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아트-태호라고 별도 아트페어를 열지 그러셨어요."

빈정거리는 비에라의 말을 태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제마가 태호 대신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던 찰라 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미즈 비에라. 좋은 아이디어를 준 보답으로 갤러리 안하버는 특별히 초대하죠."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말을 한 태호는 제마를 이끌고 바로 부스를 빠져나왔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과 올라간 입꼬리는 나쁜 계획을 세우는 악동 같았다.

정신은 딴 데로 팔린 상태로 1층을 대강 훑어본 태호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2층 VIP룸으로 향했다. 스위스에서 유명한 음식이 뭐가 있을지 고민했는데 와서 보니 스시를 팔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웨이터를 겨우 잡아 스시를 주문한 태호는 이제야 생각을 정리한 듯 제마에게 변경된 계획을 알렸다.

"아부다비로 조금 먼저 가자고?"

"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여기서 하루 더 구경하느니 아부다비에서 회의를 하루 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뭔데 그래?"

"아까 그 갤러리 안하버에서 들은 말 있잖아."

"자기 이름으로 아트페어 열자던 그 말?"

"어. 듣고 보니 좋은 생각이어서."

"정말 열 생각이야? 어디서 열게? 아부다비에서?"

제마는 태호가 뉴욕이나 유럽에서 이런 행사를 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있다면 태호에게 호의적인 아부다비뿐. 뉴욕은 이걸 하기엔 기존 아트페어가 많았고 맨해튼에 이미 태호만의 상설 아트페어인 뉴 썬 갤러리가 있었다.

"그래. 하루 먼저 갔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어떤가 해서."

"난 여기도 괜찮고 거기도 괜찮아."

제마의 승낙을 받은 태호는 아부다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샤키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루 먼저 아부다비에 건너가겠다는 태호의 말에 샤키르는 이유를 물었다.

"여기서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요. 우리 아부다비에서 아트페어를 열어보는 건 어때요?"

"아트페어요? 흠···. 문화관광청의 장기 계획 중 하나인 거로 알고 있어요. 태호가 생각하는 아트페어는 어떤 종류인가요?"

"태호-리스트에 오른 작품으로 이뤄진 아트페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회사에 연락해보죠."

샤키르는 그날 저녁 스위스에서 아부다비로 가는 에미리트 항공편을 취소하고 전용기를 보냈다.

"날짜 맞는 비행기 편이 없어서 마침 일이 없는 전용기 하나를 수소문해 보냅니다. 수장고부터 보실 생각이신가요?"

"회의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청장님은 시간이 안 되셔서 내일 참석은 못 하시지만, 모레에는 참석하실 수 있으십니다."

샤키르의 재빠른 일 처리에 한껏 찬사를 보낸 태호는 제마와 변경된 일정을 알리기 위해 윌슨의 부스를 찾았다.

"벌써 간다고? 뭐 그리 급할 게 있다고?"

태호는 아까 1층 갤러리 안하버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소개했다. 더불어 아부다비에서 열려고 하는 아트 페어까지.

"자네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내가 가서 항의하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은은한 분노를 표하는 윌슨을 태호가 말렸다.

"그냥 두세요. 괜히 갤러리 안하버를 유명하게 만들고 싶진 않네요."

"... 알았네. 내 이일은 꼭 기억해두지."

자신은 괜찮다며 윌슨을 달랜 태호는 다음 날 아침 공항에서 대기 중인 전용기를 타고 아부다비로 날아갔다.

*

태호와 제마를 태운 10인승 비행기는 6시간을 날아 아부다비의 전용 공항에 도착했다. 중동의 따가운 햇볕을 느낄 틈도 없이 두 사람을 태운 리무진은 작품이 모여있는 수장고로 향했다. 청장과 회의는 내일이라 수장고부터 왔다.

그곳에는 바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젊은 정신이 담긴 작품들이 나무 궤짝 위에 거칠게 전시되어 있었다. 덕분에 아트바젤 1층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자신감과 열망이 작품에서 흘러내렸다.

태호는 스위스와 아부다비의 3시간 시차는 아무것도 아닌 듯 최대한 집중해 작품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프린트한 책자처럼 만든 리스트를 펼친 후 빨간 펜으로 작품에 대한 최종 평가를 시작했다.

대부분 작품이 통과 등급을 받았지만, 소수의 작품은 물음표가 처져있었다. 아마 저녁에 평가를 담당했던 교수들에게 질문이나 재평가를 요구하는 이메일이 전달될 것이다.

전시된 작품이 수백 점은 되었고 제마가 심심하지 않게 하려고 작품을 설명하며 평가를 했기에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도 아니었다.

다음날 오전에도 수장고를 방문해 평가를 이어가던 태호는 오후 3시쯤이 되자 제마는 호텔로 보내고 샤키르와 함께 문화관광청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태호 작가님. 결혼하고 난 후 얼굴이 더 좋아지신 듯합니다."

문화관광청장 '카레드 빈 술라엠'이 태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둘이 간단히 회포를 푼 다음 태호가 샤키르를 통해 전달한 안건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태호 님의 제안은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트페어를 개최하고 싶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지요. 추진 동력이 없었거든요. 참여할 만한 갤러리도 컬렉터를 유혹할만한 작품도 없었지요. 그래서 이 제안을 받았을 때 너무 반가웠습니다. 어떤 방안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청장의 매우 긍정적인 반응에 태호도 안도하며 자신이 생각했던 방안을 설명했다. 보통의 아트페어와 별 차이는 없었다. 있다면 태호-리스트에 수록된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전시 부스를 꾸린다는 것뿐.

처음 몇 년 동안은 부스 요금도 받지 않고 항공료도 지원하며 세금도 면제 혹은 최소한으로 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아트페어가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태호 작가님. 다 가능한 방법입니다. 마침 컨벤션 센터도 완공되어 전시관 문제도 없습니다만···. 역시 제일 큰 문제는 관객이 오느냐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청장님."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청장의 눈에는 타는 듯한 열기가 묻어 나왔다.

"아트페어가 발달하려면 좋은 작품이 많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태호-리스트에 포함된 작가들은 젊은 작가들이라 작품 제작에 열의가 대단합니다. 연락을 돌려 신경 써서 좋은 작품을 전시해 달라고 하면 될 듯하군요. 아니면 한동안은 2년마다 개최하는 거로 하셔도 됩니다.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는요.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태호는 아랍 에미리트 왕가에서 작품들을 구매해 달라고 요청했다.

"알겠습니다. 술탄들에게 협조를 구해보겠습니다."

큰 틀에서 동의하자 아트페어 운영 방안 등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되었다. 아트바젤의 운영을 그대로 가져가자는 안이 유력했으며 아트바젤의 운영 위원을 영입하자는 결론이 당연한 듯 뒤따랐다.

이틀에 걸쳐 정말 많은 기획안이 오고 갔다. 다만, 선진 아트페어의 장점은 살리면서 아랍 문화권에서도 문제없이 통용될 운영 방안을 찾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나 동성애를 상징하는 작품은 전시가 어렵습니다."

이렇듯 바로 태클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사전 검열을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면 작가들이 이탈할 수도 있는데 이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태호는 예술에 어떤 제한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고 이는 세계 공통이었다. 성적인 묘사나 동성애를 표현한 작품을 제한한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말과 같았다.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태호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요."

"하아···."

태호는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런 제약이 없었다면 아부다비의 똑똑한 사람들이 일을 벌였어도 진작에 벌렸을 것이다.

"태호 님. 실망하지 마시고 먼저 조그맣게라도 시작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태호도 청장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이 일도 자신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던가? 청장이 실망했어도 자신이 다독여 여기 모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야겠군요. 작가보다는 갤러리에 협조를 요청하는 게 좋을 듯해요. 전시 지역의 사정을 배려해 달라는 조건 정도면 그래도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다음 회의를 3개월 후로 약속하고 아트페어 도입을 위한 첫 회의는 끝났다.

미처 완료하지 못한 작품 리뷰를 마무리하고 태호는 제마와 함께 에미레이트 항공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아부다비 출발 서울행 비행기가 뜨자 한국 LVMH 사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태호의 한국 방문에 바짝 긴장한 사람들은 LVMH 코리아 임원들이었다. 그들도 이제 태호가 LVMH의 자회사 Theo의 CEO인 줄 알고 루이뷔통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과 절친인지도 안다.

중요한 건 언제든 아르노 회장과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는 사이이며, 더 중요한 건 성격도 별로 좋지 않아 몇 년 전 임원 둘을 좌천시킨 이력도 있었다.

더군다나 정식 회의를 위해 날아오는 태호를 무시할 LVMH 임원은 없었다.

임원들이 합심하여 공항에 직원 하나를 보냈다. 태호네 식구가 나올 수도 있지만, 혹시 없을 경우를 대비해 나온 것이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유창한 영어로 인사하는 사람은 사장의 비서인 김미라 차장이었다. 몇 년 전 자신의 갑질은 기억 못 하는 태호는 공항에 마중 나온 김미라 차장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누구신지?"

"LVMH 소속 김미라입니다. LVMH 한국 법인 사장이신 피에르 두마스가 보내셔서 왔습니다."

"아···. 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뉴욕 본사로부터 태호 사장님의 일정을 받았습니다. 편하게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호의를 거부할 딱히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웠기에 태호는 제마와 김미라가 호출한 차에 올랐다.

사장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하기에 태호는 김미라에게 이번 방문의 목적 중 하나인 Theo 한국 법인 설립에 대해 회사와 사회 분위기를 물어봤다. 주저하는 그녀에게 태호는 솔직히 얘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과 다르게 한국에선 시장이 거의 형성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내부 임원들도 태호 사장님의 Theo 법인 설립의 의도를 몰라 고민 중입니다."

적어도 고민은 해봤다는 김미라의 말에 태호는 만족했다. 옛날 공항에서 세관 때문에 고생했던 일은 재발하지 않을 듯했다.

"한국 시장을 테스트 베드 삼아 전 세계 진출 가능성을 타진할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가능성이 보이면 아시아 진출도 가능하다는 말이니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한국이 그렇게 쉬운 시장일지는 저희도···."

"일단 시장 반응을 보며 판단하죠. 그렇게 거창하게 일을 벌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저 직원 하나 두고 광고 정도 하면 됩니다. 시장성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접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국 LVMH 임직원에게도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미라는 태호와 제마가 호텔 체크인하는 것을 확인한 이후 회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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