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호 리스트
3개월.
태호가 리스트를 공개하고 미술계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는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마치 나치 독일이 파리를 한 달 남짓한 시간에 함락시킨 것처럼 3개월 만에 미술계를 정복하고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 웹페이지로 제공하는 리스트 하나로 말이다.
"마르셀 뒤샹 이전으로의 회귀."
"예술가를 철학자에서 다시 수공예 장인으로."
"21세기 예술을 다시 19세기로 되돌려 놓은 리스트."
폭풍 같은 비난이 태호에게 쏟아졌다. 뉴욕, 런던, 파리, 마이애미, 스위스 바젤 등. 나름 큰 전시회가 열려 미술 시장이 잘 발달한 곳에 근거지를 둔 언론사라면 이 비난 행렬에 빠지지 않았다.
"왜 태호 작가가 19세기 신고전주의나 사실주의 작품들만 제작하는지 태호-리스트를 보면 알 수 있다."
태호의 대표 작품들도 덩달아 비난받았다.
그렇다고 태호의 작품가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비난하는 사람이나 언론이 늘어날수록 태호-리스트의 존재를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어 등록 작가들의 인지도가 올라갔으며 비난의 강도가 올라갈수록 리스트 속 작가들뿐만 아니라 태호 작품의 작품가도 같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또 비난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권력자가 등장하자 그를 분석하는 자료가 공유되기 시작했고 따라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태호 리스트가 등장한 지 반 년 만에 예술계 트렌드가 많이 달라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분위기를 바꿀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요?"
윌슨의 전화에 태호가 다소 놀란 반응을 보였다.
"자네 리스트에 있던 작가 중에 인지도가 높던 작가의 작품도 못 해도 두 배가 올랐어. 인지도가 낮던 작가들 작품은 10배니 20배니 하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고. 무슨 상장이라도 뿌린 듯한 분위기야. 연초 시상식 있지 않은가? 그래미나 오스카나."
그 말에 태호는 빵 터졌다.
"정말요?"
"마치 사기꾼들만 바글거리던 뒷골목 벼룩시장에 대형 마트가 들어온 느낌이야. 찰리 사치가 영국에서 한 일이 구멍가게의 장난으로 보일 정도니까."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겠네요."
"정말 많아. 사실 머릿수로만 보면 자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비난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 그러니 자네 리스트에 있는 작가들 그림값이 폭등하는 거지. 그리고 영국에서 자네를 따라 리스트를 뽑을 작정인가 봐."
"영국에서요? 누가 주도하죠?"
"누구겠나? 테이트 갤러리지. 터너 상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그해 주목할만한 활동을 한 미술가들 리스트도 같이 발표할 거야. 자네랑 차이점은 테이트-리스트는 영국에서 활동하거나 국적이 영국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거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평소에도 터너 상 후보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도 두 리스트가 성격은 좀 다른데."
"그렇긴 하지. 자네 리스트가 더 노골적이긴 해."
"하하. 그렇죠."
"선전포고는 제대로 했는데, 자네 다음 행보는 뭔가?"
"오랜만에 아트바젤에 가보려 해요. 작년에 올해 같이 가자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잊지 않고 있었구먼. 스위스만 갔다가 돌아 올 건가?"
"아니요. 스위스에 들렀다가 한국에 가보려고 해요. Theo를 아시아 시장에 런칭하자는 얘기가 LVMH에서 나오더라고요. 인터뷰도 있고. 부모님도 오라 하시고."
"그래. 자네 부모님도 나이가 있으니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지."
윌슨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태호의 아트바젤 방문은 미술 시장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리스트에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을 두 분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자신의 최근작인 빛의 마리아 조각상에 대한 반응을 보고 싶기도 했다.
작품을 구매할 때 직접 보고 구매한 게 아니라 보고서와 사진에 의지해 구매한 터라 이런 확인 작업은 꼭 필요했다.
남들에게 공개하진 못하지만 구매한 미술품은 바로 아부다비에 있는 미술관 수장고로 보내버려 태호는 작가는커녕 작품도 제대로 구경 못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부다비도 들를 예정이다.
이번에 바젤과 아부다비에서 직접 작품을 확인할 때 사진과 보고서를 통해 추측했던 느낌이나 감정이 작품에서 느껴지지 않으면 내년 리스트에선 삭제할 생각이었다.
반대로 기대 이상일 경우는 더 많은 작품을 추가 구매할 생각이다. 가격은 올랐겠지만, 더 오를 게 확실하여서 꺼릴 것도 없었다.
*
태호는 제마와 스페인 마요르카에 들러 요트에서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한껏 즐긴 다음 스위스 바젤로 향했다.
몇 년 전 서브 프라임 사태로 인해 미술 시장이 주춤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바젤에서는 전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여전히 근처 공항에는 개인 전용기가 100여 대 넘게 주기 되어 있었고 태국산 악어 뱃가죽으로 제작한 게 틀림없는 핸드백을 든 컬렉터들이 폭탄 세일에 들어간 아웃렛 오픈 시간을 기다리는 아줌마처럼 아트바젤 개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 전용기도 없었고 악어가죽 핸드백도 없었지만, 태호와 제마도 이런 대기자 중 하나였다.
"자기야. 올해 작품 구매하느라 얼마나 썼어?" 오픈을 기다리는 사이 제마가 물었다.
"한 천만 달러? 그건 왜 물어?"
태호가 의아한 듯 물어보자 제마가 걱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자기가 잠꼬대하더라. '작품 더 사야 해, 더 사야 해.' 이렇게."
"내가 잠꼬대까지 했다고?"
아랍 에미리트와 계획했던 1억 불 중에 작년에는 2천만 달려고 채 쓰지 못했다. 결혼 등으로 바빴고 저평가 우량 작가의 작품만 골라서 산 결과였다. 올해는 각 잡고 제대로 사보겠다며 구매를 했지만, 여전히 버릇을 못 고쳤고 덕분에 1천만 불밖에 구매하지 못했다. 최근 태호는 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꽤 쌓인 상태였다.
"그냥 비싼 작가들 작품 사면 안 돼?"
"내가 그게 싫더라고."
"어째서? 맨해튼에 있는 아무 화랑이나 들어가도 백만 달러짜리 작품들이 발에 챌 듯이 많던데."
제마와 맨해튼에 있는 갤러리에서 데이트를 많이 한 덕분에 제마의 예술 시장 상식은 준전문가 수준이었다.
"난 작가들 뜨기 전 작품들을 좋아해서. 그렇게 비싼 작품들은 보통 뜬 작가들 후기 작품이고 가격만 비싸지 작가의 정수는 아니라고 생각해."
"괜찮아? 아직 9천만 달러나 더 써야 하는데?"
"괜찮을 거야. 안되면 피악 (FIAC, 파리 아트페어)까지도 다녀야지. 아트바젤 마이애미도 가고. 그래도 안 되면 눈 딱 감고 그때 비싼 거 질러야지. 맨해튼에서 지르기 시작하면 사실 일주일이면 1억 달러 채울 수 있거든."
피악에서 온 초대장도 집에 도착했기에 태호는 여차하면 파리에 갈 생각도 있었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개관을 기다리는 사이 11시가 되자 아트바젤은 마침내 문을 열고 컬렉터들을 입장시켰다. VIP 공식 오픈이었다.
문이 열리자 수많은 사람이 놀이공원에 입장하는 관람객처럼 전시실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입장하는 모습만 보면 에버랜드 입장과 큰 차이는 없었다. 입장료를 내는 것도 똑같고. 줄을 서서 들어가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 큰 차이점은 있었다. 에버랜드에선 놀이 기구를 타지만 그들은 안에 들어가서 억대의 돈을 쓴다. 그렇게 쓴 돈은 아트바젤이 문을 닫을 때쯤 되면 총 거래액이 약 2조에 육박했다.
태호는 제마와 함께 2층에 있는 뉴 썬 갤러리 부스로 향했다. 이번에 윌슨이 큰맘 먹고 태호를 졸라 제작한 빛의 마리아 조각상을 이번 전시에 가져왔다. 조각상은 윌슨 뒤편에서 난반사하는 조명 아래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지 않아?" 윌슨이 말했다.
"아름답네요. 누가 만들었는지 전신이 백금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어서."
"후후."
태호의 대답에 윌슨이 작게 웃었다.
태호는 황금과 백금을 아낌없이 사용해 이 조각상을 도금했으며 티파니에서 보석으로 제작한 눈을 끼워 넣었다. 조각이 대단히 정교하고 복잡했기에 이곳까지 배송을 위해 상당한 보험료까지 지불 한 상태였다.
이런 최상급의 작품은 아트페어에서 보기 힘든 대단한 작품이었다.
제작비만 백만 달러를 가뿐히 넘었는데, 지금까지 제작한 빛의 마리아상 중에 2번째로 비싼 가격이었다. 이보다 더 비싼 빛의 마리아 조각상은 지금 아부다비 대통령 궁에 있다.
이번 아트바젤에서 제일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이었지만 모두 조각상을 구경만 하지 태호와 윌슨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주위에서 이미 태호와 제마 주위로 팝 스타의 사인을 기다리는 팬처럼 다음 대화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에 올렸어요?"
태호는 주위 사람이 혹시 엿들을까 걱정되어 윌슨에게 귓속말했다.
"경매 시작가가 1천만 불. 최종 예상가는 2천만 불. 물론 더 올라갈 수도 있고."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마리아 조각은 자체 발광하는 고급스러움에 정말 어디 장소에나 어울렸다. 고상했고 우아했으며 그 위풍당당함에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조각상을 처음 본 아랍 에미리트 국왕은 조각상의 별명을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만난 천사 가브리엘을 본떠 가브리엘로 지었다. 샤키르가 귀띔하길 국왕은 하루에 한 차례 이상 전시실에 들러 그림과 조각상을 구경하고 간다고 했다. 인생 막바지에 얻은 크나큰 낙이라며 말이다.
덕분에 아랍 에미리트 왕가에서 요청하는 주문량이 크게 늘어 올해도 정신없이 바빴다. 이렇게 바빴기에 윌슨 뒤에 서 있는 작품도 이번 아트바젤을 위해 겨우 제작했다.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게 비쌌지만, 가격을 물어보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그때마다 윌슨이나 제시카는 친절하게 천만 달러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미술품 구매에 연간 많이 써야 3백만 달러 이하의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은 얼굴에서 백지장처럼 핼쑥해졌다.
윌슨과 제시카는 그런 사람들을 태호의 다른 작품으로 안내하지만, 보통은 큰 소용이 없었다. 눈에 들어온 빛의 마리아가 계속해서 그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그들을 중독시켰기 때문이다.
빛의 마리아 조각상은 눈으로 맛본 마약이었다.
개인 전용기를 타고 온 컬렉터들은 심각하게 비행기를 전당포에 맡기고 빛의 마리아를 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실제 바젤에는 비행기를 담보로 잡고 급전을 대출해주는 은행들이 많았다.
아트 바젤에서 보통의 작품은 먼저 온 손님에게 판매하지만, 윌슨이 태호의 작품을 팔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판매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올해도 경매 방식이다.
"몇 명이나 경매에 참여한대요?"
"유주얼 서스펙트지. 지금까지 빛의 마리아를 구매했던 사람들."
"전에는 꽤 많았잖아요? 여전히 그 3~4명만 경매에 참여해요?"
"그건 몇 년 전이야.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 그룹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고 은행 같은 기업이 연락하기도 하지. 올해도 벌써 열 군데 정도 연락 왔는데 다들 1천만 불 이상 쓸 수 있는 개인과 기관들이야."
"좋은 가격에 팔렸으면 좋겠네요."
"걱정하지 말게.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
윌슨과 짧은 대화가 끝나자 수많은 갤러리가 태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태호-리스트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경험 많은 컬렉터들은 자신이 들고 있는 작품의 작가가 왜 태호-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는지를 궁금해했고, 경험이 부족한 컬렉터들은 태호-리스트에 포함된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보여주며 품평을 요청하기도 했다.
일부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는 젊잖았다. VIP 행사에 초청된 사람들이기에 더 그런 듯했다.
"생각보다는 젊잖은데?"
제마는 바젤로 이동하는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계속해서 걱정했는데 그 고민한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컬렉션이 워낙 개인적인 행위니까. 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자기 취향이 아니면 안 살 사람들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태호는 주위를 둘러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고상하게 리스트에 담긴 작품을 얘기하기엔 너무 변태적인 것 같아. 시장 바닥이잖아."
"하하."
제마는 자기 작품도 버젓이 팔고 있는 전시장을 시장 바닥에 비유하는 게 재밌었다.
"우리도 이제 보러 다닐까?"
"그래."
제마는 태호의 팔짱을 끼고 부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