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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164/181)

결혼식

"저 친구지? 그 태호라는 작가가."

"그래."

"서현이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저 친구 때문이고."

"맞아."

"서현이가 목맬 만했네. 저 정도 인물에 이 자리까지 올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면."

서준은 얼마 전 난리를 피우던 서현이 떠올랐다. 미술관에 있던 태호의 그림을 판 걸 알자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갔다. 이 정도로 동생이 맘고생을 심하게 할 줄 알았다면 자신이 중간에 다리를 놔서라도 태호를 잡았을 것이다. 어린 동생의 가벼운 연애라고 생각해 내버려 둔 걸 지금도 후회했다.

"지금 저 친구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야? 정말 미인인데?"

"제마 로웰. 저 녀석 약혼녀쯤 되는 뉴욕 톱 모델."

"어떻게 그리 잘 알아?"

"서현이 때문에 알게 됐지."

"아, 그렇겠네."

서준은 옆에 있는 몇 안 되는 친우인 정훈과는 여전히 친하지만, 정훈의 동생인 정현을 아버지에게 소개한 건 지금도 후회하고 있었다.

"동생은 잘 있고?"

"정현이?"

"그래."

"잘 지내지. 사고도 안 치고. 결혼하고 많이 착실해졌어."

태호가 서현고의 연락마저 끊어버린 건 태호가 정현 때문에 한국 국적을 포기했던 그 시기였다. 그 이후 서현은 오랫동안 저기압이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준과 다른 식구들이 감내했었다. 그 일련의 사건의 원인 제공자가 지금은 맘 편히 산다고 하니 갑자기 배알이 뒤틀렸다.

"다행이네."

그래도 서준은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남의 장례식장에 와서 오래된 얘기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호도 멀리서 서준을 알아봤지만, 얘기만 들었지 굳이 만난 적도 없는 서현의 오빠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서준과 안면이 있어도 가서 아는 척을 하기엔 좋지 않은 자리였다. 딱히 할 말도 없었던 태호는 그냥 모른척했다.

언뜻 봐도 서준은 협력업체 쪽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었고 태호 자신은 미망인 옆에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이 없었다. 자기 그림이 자서전에 쓰일 것 같았고 한국에 뿌릴 기삿거리도 이만하면 충분하니 이제부터는 조용히 고인의 명복만 빌어주면 되었다.

태호가 그린 초상화는 장례식 한쪽에서 스티브가 가장 건강하고 정열적으로 일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그의 집념과 철학이 얼굴에서 그대로 묻어나왔다. 존재감이 흘러넘치는 초상화 속 스티브는 옆에 핸드폰이나 맥북이 있다면 입을 열고 프레젠테이션을 할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태호의 초상화가 고인을 잃은 아픔을 배가 되게 했다.

그림 덕분인지 소박하길 원했던 스티브의 장례식은 그 누구의 장례식보다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

장례식 직후.

한국 언론에서는 서준의 장례식 참석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그 보도가 나가자마자 인터넷에는 태호의 장례식 참석 소식이 부록처럼 따라붙었고 재밌는 댓글들이 달렸다.

"협력업체 자격으로 참석한 서준의 기사도 이렇게 크게 나는데 미망인 로라 옆에 서 있던 태호의 기사는 어디 있음?"

"8시 뉴스에 태호 기사도 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광고주라도 다성 정말 너무하네."

태호는 사람들이 자신을 잊지 않도록 건수만 있으면 돈을 풀어 기사를 올렸다. 돈을 푼다고 해봤자 5~10만 불 정도면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 귀에 들어갈 정도로 광고를 할 수 있으니 비싸지도 않았다. 700억에 이은 스티브의 장례식 참석으로 태호의 인지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

장례식이 끝난 후 얼마 뒤 스티브의 전기를 확인한 태호는 피식 웃었다. 자신을 사기꾼 같은 최고의 마케터로 소개를 해줬으니 이 정도면 괘 성공적이었다. 태호는 월터에게 스티브와 핸드폰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는데 다행히 책에 실렸다.

로라가 Theo의 옷을 입고 다닌 게 언론에 자주 노출이 된 게 계기가 되어 책에 실린 듯하기도 하고 그의 타사 제품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기 적당했기에 실린 듯하기도 했다. 뭐가 되었던 태호는 실렸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더 만족한 건 Theo의 마케팅 담당 이사 사라였다. 사라는 Theo 웹사이트에 스티브에 대한 추모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걸었다. Theo를 사랑하던 스티브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어디 가서나 자랑스럽게 태호의 일화를 떠벌렸다. 스티브가 애용하던 Theo! 자서전 표지가 태호의 초상화였기에 설득력도 충분했다.

태호는 그해 사라의 보너스를 대폭 인상했다.

*

스티브의 장례식이 어떤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제마는 태호에게 단호하게 아이를 갖고 싶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피임도 거부했으며 밤에 이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화들짝 놀란 태호가 부랴부랴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제마가 보내는 시그널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태호가 생각해도 둘이 같이 지낸 지 오래되기도 했고 주위에서 언제 날 잡을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한 트럭이었다. 특히 서울에서 난리였는데 곧 서른인데 결혼 안 하냐는 성화가 대단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기에 몇 년 전에 이탈리아 제네바까지 날아가 5캐럿 블루 다이아몬드를 8백만 불에 구입한 후 티파니에 맡겨 반지로 제작해 놨었다.

태호의 작업실 4층.

프랑스 궁전 살롱 같은 이곳에는 수백 개의 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 사이로 만들어진 길의 끝에는 태호와 제마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반지를 교환하는 장면이 담긴 커다란 전신 초상화가 트로피처럼 걸려 있었다.

잔잔한 드뷔시의 달빛이 깔리는 가운데 제마와 손을 잡고 결혼 행진하듯 그림 앞으로 갔다. 잠시 그림을 제마와 보던 태호는 무릎을 꿇고 반지를 꺼냈다.

"나와 결혼해 줄래?"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던 제마가 울먹이며 말했다.

"왜 이리 오래 걸렸어?"

제마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태호는 엉뚱한 핑계를 댔다.

"그림이 잘 안 마르더라고."

어처구니없는 말에 제마는 눈을 흘겼다.

태호는 그런 제마와 키스하며 사랑한다 속삭였다.

결혼식은 일 년 후로 잡혔다.

*

정말 약혼녀가 된 제마와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정신없이 다니기 시작했다. 마틴이 알아봐 준 롱아일랜드 저택을 구매한 후 리모델링하기 시작했으며 초대 손님 리스트를 뽑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두 번, 미국에서 먼저하고 그다음 한국에서 하기로 했는데 미국에서 결혼식은 제마의 집에서 한국에서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예식을 치르기로 했다.

태호는 미국 결혼식을 위해 식구들의 교통편을 예약했다. 숙식은 새로 마련한 저택에서 해결하기로 했으며 미국까지 온 김에 태호 커플과 미국 여행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국 결혼식은 그다음이었다. 허니문은 남태평양의 따이띠 (Tahiti)였다.

결혼 준비에 사업, 거기에 태호-리스트 작성까지. 정말 엄청나게 바쁜 일 년을 보내고 나서야 결혼 준비와 태호-리스트 작성이 마무리됐다.

태호와 제마가 바랬던 비교적 차분한 결혼식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마틴의 저택에서 열린 결혼식은 뉴욕의 정치권과 경제계 인사들과 전 세계 패션업계와 미술 업계 사람들이 함께 모인 정말 희한한 결혼식이었다.

태호 인맥과 마틴 인맥이 섞였는데 태호가 행복 시리즈를 뉴욕 공원에 설치하면서 안면을 트게 된 뉴욕 정치계 인사들과 오래전부터 마틴의 저택에서 골프를 치고 제마에게 선물을 주던 경제계 인사들이 기본적으로 모였다.

예일 동문에 스토 학장까지 참석했으며 패션업계 인사로는 마크부터 시작해 뉴욕과 파리에서 자기 패션쇼를 여는 디자이너들과 제마와 친했던 톱 모델들이 다 참석했다. 미술계 인맥으로는 무라카미부터 뉴욕에 있는 미술관 관장과 수석 큐레이터들이 대거 식장을 찾았다.

결혼식에 참석한 끝판왕은 둘이 있었는데 정계의 끝판왕은 아랍 에미리트 국왕으로 마침 뉴욕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왕세자를 보냈으며 패션업계 끝판왕 LVMH 아르노 회장은 직접 식장을 찾았다.

다들 오늘의 결혼식을 위해 일정을 조정해 두었기에 가능했다. 정말 태호와 제마의 결혼식은 모인 사람들만으로도 초호화 결혼식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보통 결혼식에는 신부를 돋보이게 하려고 여성 하객들이 비교적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에 자신이 있는 제마는 초대한 모델들에게 한마디를 했다.

"꼭 수수하게 입을 필요는 없어!"

이 한마디로 모델들은 마음의 빗장을 풀어 버렸다. 수십 명의 미녀가 수수함과 화려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옷을 입고 결혼식장에 나타났고 그곳에 나타난 수많은 남자를 열광시켰다.

결혼식에 초대된 보그 편집장과 기자는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고 놀랐고 이는 곧 글과 사진으로 옮겨져 다음 달 보그를 장식했다.

*

태호의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들은 태호 부부와 플로리다에서 2주간 잘 놀다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 달 뒤 제마 식구들과 한국으로 들어간 태호는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미국보다는 정말 조용한 결혼식이었다.

호텔 결혼식장을 가득 채운 건 태호 부모님의 손님들이었고 태호의 하객은 두 교수와 양준만 작가, 서현, 혜나, 예랑이었으며, 여기에 예랑 때문에 알게 된 방송국 사람들, 국립 미술관 사람들과 다움 미술관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전에 한복 패션쇼를 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식에 참석했다.

예랑과 헤나와는 그래도 가끔 연락은 했지만, 김 관장과 서현에게는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결혼식 초대까지 하지 않으면 안될 듯하여 연락했고 두 사람은 흔쾌히 결혼식에 참석했다.

결혼식장을 찾은 하객들은 두 번 놀랐는데 하나는 태호와 제마의 그림을 보고 놀랐고, 다른 하나는 아랍 에미리트 대사가 대통령 대신으로 보낸 초호화 화환을 보고 놀랐다. 한국 대통령 화환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중동의 국왕이 보낸 화환은 처음이었기에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례는 김창기 교수가 봤다. 두 교수가 한참을 자신이 하겠다고 싸우다가 결국 동전 앞뒤를 맞추는 것으로 합의를 봤고 김 교수가 그 내기에 이겨서 결정됐다. 보통 강 교수가 우기면 김 교수는 들어줄 때가 많았는데 결혼도 안 한 사람이 무슨 주례냐며 김 교수가 양보를 안 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도 만나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태호가 혀를 찼다.

마틴, 엘리스는 열흘 정도 한국 관광을 즐긴 후 뉴욕으로 돌아갔고 태호와 제마는 그길로 따이띠로 허니문을 떠났다.

*

허니문에서 돌아온 태호는 웹사이트를 새로 개설한 후 태호-리스트를 발표했다. 이 리스트는 아트넷과 아트뉴스에 기사가 크게 났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 리스트에 대한 비판 기사가 여기저기 올라오더니 마침내 주말 뉴욕 타임스 문화란에도 리스트를 비판하는 사설이 실렸다.

"재능있는 예술가를 발굴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한 사람의 견해인지 다수 전문가의 견해인지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만들어진 리스트는 시장을 왜곡하고 교란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요구된다.

다수의 전문가는 리스트의 담긴 작품들이 권태호 작가의 취향이 상당히 반영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작품 구매 리스트이기에 초보 컬렉터들이 따라 하기엔 위험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예술계 전반이 확 들고 일어나 갖은 짜증과 불만을 언론을 통해 쏟아냈다. 이게 소위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리스트만 떡하니 뽑아 놓고 선정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컬렉션이다.

얼마 뒤, 태호는 작품을 구매한 이유를 상세히 나열해서 리스트에 첨부했다. 작가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작품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니 작가, 작품에 대한 진가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자세한 설명이 초보 컬렉터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정보였다. 돈은 있지만 뭘 사야 할지 몰라 작품 구매를 망설이던 사람들이 저평가 우량주인 태호-리스트에 있는 작가의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작품가는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존 컬렉터들도 이에 뒤질세라 작품 모으기 동참해 갤러리에 내놓은 작품들이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태호-리스트에 있던 작가들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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