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에미리트의 제안8 (feat 스티브 장례식)
UAE 왕세자가 한국에서 태호의 어린 시절 그림을 모두 샀다는 소식이 돌았다. 금액은 7천만 달러. 여기에 얼마 뒤 추가 루머가 돌았다. UAE 왕세자가 1억 5천만 달러로 태호의 작품을 평가했다는 얘기였다. 샤키르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윌슨이 뉴욕 미술계에 퍼트린 소문이었고 이는 바로 한국에서도 퍼졌다.
미국 시장에는 거래되던 태호의 작품이 싹 사라졌다. 태호의 작품을 소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지인, 미술관, Theo의 고객으로 시장에 나올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시중에 거래되는 작품은 시장에 엄청나게 풀린 행복 시리즈이며 거래 가능한 작품은 몇 점 팔리지도 않아 잔뜩 보유 중인 우울 시리즈 작품들이다.
행복 시리즈는 웬만한 미술관에서는 다 하나씩 들고 있었고 행복 시리즈를 구매한 미술관에선 컬렉션을 맞추기 위해 우울 시리즈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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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의 작품이 7천만 불에 거래되었다는 소식이 한국도 강타했다. 다움에서 7천만 달러라는 거래 액수가 공개되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태호가 뒤에서 자료를 뿌렸기에 알려지는 건 금방이었다.
1달러에 1100원인 환율을 적용하면 770억으로 한국 예술품 최고 거래가를 갱신했다. 한 작품이 아닌 여러 작품을 모두 합친 가격이지만 충격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거래된 근대 미술사의 걸작으로 꼽히며 미술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중섭의 '황소'가 36억이 안 되는 가격에 거래가 되었는데 이제 30살이 채 안 된 생존 작가의 작품가가 수백억을 하니 시장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의 작품이 최근 1070억에 거래가 된 걸 고려하더라고 770억은 상상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술자리에선 이 숫자가 화재였다.
"작년에 700억 이상 순익 낸 기업이 몇 개나 되지? 영업 이익으로 몇 위나 되는 거야?"
"잘은 몰라도 300대 기업에는 들어갈걸?"
"이게 중견기업이야, 대기업이야?"
"준대기업 정도는 될 거야."
"대단하네."
현대 미술계의 거의 정점에 오르는 일이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예술가란 직업이 사람들의 머리엔 700억이라는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작용 반작용이 일어났다. 일단 미대의 입시 성적이 크게 올랐다. 특히 태호의 스승으로 알려진 대한대와 발해대 미대의 입시 성적이 올랐는데 서양화의 인기가 높은 탓에 발해대 미대 서양화과가 대한대 미대 서양화과보다 성적이 더 높아졌다.
방송에서는 미대 교수들이 패널로 나와 이 현상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했고 방송국에는 이 시류에 편승에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리고 그 특별 프로그램이 원하는 패널의 첫 순위는 강 재범 교수와 김창기 교수였다.
"방송에 출연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아주 골머리가 다 아프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강 교수가 태호에게 전화로 한 푸념이었다.
"흐흐. 지금 즐기세요. 조만간 1~2년 후에는 방송 출연 요청이 와도 무서워서 못 나가실 거에요."
"어째서?"
"지난 2년간 예술가들 평가해주신 자료 검토하고 있거든요. 그 자료 바탕으로 구매도 꽤 했고. 올해나 내년에 구매한 작품 리스트를 발표하려고 해요."
"발표까지 하려고?"
"그럼요. 발표해야죠. 미술계의 빌보드 차트가 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요."
"하하. 비유가 적절하구나. 빌보드 차트라. 그 차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불평과 비난이 어마어마할 텐데 어찌 감당할 셈이니?"
"무시해야죠."
강 교수는 태호의 말에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괜찮겠어?"
"이제는 욕먹는 거에 익숙해서 괜찮아요."
제자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는 분명히 말이 나올 거다."
"말이 나오면 한국에서 안 뽑으면 돼요."
태호의 목소리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단호함이었다. 누가 뭐라 한들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강 교수는 이를 기뻐해야 할지 서글퍼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너도 참. 지금까지 나와 김 교수가 뽑은 리스트의 반이 한국이다. 그걸 무시하겠다고?"
"네. 어쩔 수 없잖아요. 리스트에서 지워져야 정신을 차리겠죠. 그렇다고 구매를 중단하지는 않을 거예요. 젊은 작가 위주로 뽑던지 해외 거주 한국 작가 위주로 뽑으면 되니까. 앞으로 한국 말고 좀 더 아시아 쪽 작가들 많이 확인해 주세요."
"알겠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가 아시아 쪽 작가는 살펴보고 있는데 유럽은 누가 보고 있니? 북미는? 네가 보고 있는 거냐?"
"아직 제가 북미하고 유럽까지 보고 있기는 한데, 버겁네요. 남미는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쯧쯧. 그럼 내가 아는 괜찮은 큐레이터나 대학교수들 명단을 보낼 테니 살펴봐. 신문 기자 중에도 쓸만한 사람이 있긴 하다. 큐레이터 정도의 안목을 가진 기자들도 꽤 있으니까. 받아보면 너도 익숙한 이름일 거야."
"감사합니다, 교수님."
강 교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너 결혼은 언제 하니?"
뜬금없는 강 교수의 질문에 태호는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강 교수까지 결혼을 언급할지는 몰랐다.
"결혼요? 하하···. 하긴 해야죠···. 그런데 교수님도 안 하시면서 저에게는 왜 물어보세요!"
"나야 자유로운 영혼에 이리저리 재다가 이렇게 된 거고. 너는 어리고 기회도 있으니까 하는 얘기지."
"하하. 교수님도 그냥 하세요. 비슷하게 생각을 하는 분 중에 잡으시면 되잖아요."
"시끄럽다. 너나 빨리해!"
"하하. 날 잡으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큐레이터 리스트를 바로 보낼 듯 말했던 강 교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 일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김창기 교수와도 논의를 해보겠다고 했다.
급한 일은 아니라며 천천히 하시라고는 했지만, 태호도 이 리스트가 꼭 필요한 것은 사실 이었다. 자신이 알아보고 처리하기엔 너무 귀찮았고 대충하기엔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생각난 사람이 헬렌 헌트. 기자 출신의 마당발이자 무함마드 12연작 제작에 필요한 작가를 멋지게 찾아와 태호의 일을 크게 덜어줬었다.
얼마 뒤 제이크를 통해 헬렌을 직접 만났다. 샤키르는 몇 달 전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아부다비로 돌아갔기에 이런 일은 당연히 제이크의 몫이었다.
아랍 에미리트 국왕에게 받은 수고비로 근사한 BMW 쿠페를 뽑은 그녀는 태호의 부름에 단숨에 브루클린으로 달려왔다. 태호의 작업실에서 만난 그녀는 예전에 잠시 만났을 때보다 더 젊어진 얼굴을 하고 태호 앞에 나타났다.
"갈수록 젊어지세요."
태호의 칭찬에 헬렌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아랍 에미리트와 내가 한 계약 아시죠? 혼자서 다 하려니 버거워서 도움 줄 전문가가 필요해요. 추천 좀 해주세요."
태호는 헬렌에게 미국, 유럽, 남미의 예술계를 잘 아는 전문가를 요청했다.
"호호. 그런 분들은 생각보다 많아요. 그렇지만 문제가 있죠.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태호 작가가 원하는 스타일은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사심 없이 일해줄 사람을 원하는 거 같은데 맞나요?"
"바로 보셨어요."
태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역의 한 무명작가를 세계적인 인기 작가로 만들 수 있는 태호-리스트에 올리는 일인데 사심 없이 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죠. 아시아 쪽은 물어보지 않으시는 걸 보니 미리 선점되어 있나 보군요."
태호-리스트라는 말에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추측하신 대로에요. 내 스승님들이 아시아를 커버해주실 겁니다."
"그렇군요. 그분들이라면 태호 작가님의 취향에 맞는 사람을 추천해 주실 수 있겠네요. 내게 기대하는 것도 그런 분을 찾아달라는 것이겠죠?"
"내 취향에 맞출 꼭 맞출 필요는 없어요. 그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분이 필요합니다."
"알겠어요. 최대한 그런 분을 찾아보겠습니다."
태호는 헬렌이 보내온 리스트에 강 교수가 보내는 리스트를 더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큐레이터와 기자 중에서 복수의 인원을 뽑기로 마음먹었다.
석 달 뒤. 북미에 두명, 유럽에 두명, 남미 한 명 이렇게 5명의 전문가와 계약을 맺었고, 유럽과 북미에 한 명씩 두 명의 구매 담당 직원을 고용했다. 총 7명의 교수급 전문가와 3명의 구매 담당 직원으로 구성된 태호-리스트를 위한 팀이 완성되자 그들로부터 받는 리포트와 구매 보고서로 태호는 더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강 교수가 언급하긴 했지만, 태호도 부모님으로부터 결혼에 대한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제마도 말은 안 하지만 프러포즈를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얼마 전 스티브의 장례식에 갔다 온 이후 제마의 눈에 그 열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태호와 제마는 로라의 초대로 스티브의 장례식에 초대받았다. 2년 전 2천만 불은 받아야 하는 작품을 1천만 달러에 넘긴 이유도 이 장례식에 초대받기 위함이 컸다.
로라로부터 스티브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자 제마는 Theo 팀과 로라를 방문했다. 제마는 수척한 로라를 위로하고 가족들 치수를 재고 돌아와 장례식 의복을 준비한 후 사라를 통해 보냈다.
로라와 케인의 자녀들은 Theo에서 제작한 옷을 즐겼지만, 스티브는 아니었다. 스티브는 마지막 프리젠테이션때도 여전히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나와 태호의 속을 쓰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쓰리던 속이 장례식장에 와서 많이 풀렸다.
태호가 이 장례식에 참석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그린 초상화가 장례식에 쓰일지 궁금해서였다. 공들여 그린 걸작이었지만 생전 사진을 선호하던 스티브였기에 무엇이 쓰일지는 확실하지 않았는데 와서 보니 사진 대신 자기 그림이 걸려 있었다. 로라 덕이 분명했다.
"내 그림이 걸렸네!"
제마는 반가운 목소리로 떠드는 태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다급하게 말했다.
"표정 관리 좀 해!"
"알았어. 마하반야 바라밀다···."
태호는 얼른 눈을 감고 반야심경을 외우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혹시나 사진기나 카메라가 웃는 자신을 찍을까 두려워서였다.
전 세계 언론이 IT 거인의 죽음을 애석해했고 언론에 스티브의 식구들도 어마어마하게 노출되었다. 그래서 Theo 브랜드 옷을 입은 로라도 TV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지금 로라가 입은 검은 옷은 장례식 때 입는 옷답지 않게 화려했는데, 가까이서만 볼 수 있는 그 현란하고 복잡한 패턴은 그녀가 곧 세계 100대 부자가 되는 걸 축하하는 듯했다. 태호의 아이디어로 크리스천이 완성한 옷이었다.
제마가 하염없이 우는 로라를 달래기 위해 로라 근처에 있었기에 태호도 얼떨결에 로라 옆에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제마와 태호 커플이 케인 부부의 절친 정도 되는 줄 알 거 같았다. 자서전에 뭐라 쓰여있을지 안 봐도 뻔하지만,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로 볼 것이다.
장례식은 소박했지만 모인 사람들은 절대로 소박하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이 가진 재산만 합쳐도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나 태평양의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듯했다.
장례식에 와서 별별 잡생각을 다하던 태호를 발견한 건 서현의 오빠 서준이었다. 나이가 이제는 40대 초반을 넘었기에 고령의 주진만 회장을 대신해 대외 활동을 다녔고 케인의 회사에 납품하는 핵심 거래처 중 하나였기에 장례식까지 초대를 받았다.
서준 옆에는 한국에서 날아온 40대로 보이는 기업인이 한 명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