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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에미리트의 제안7 (162/181)
  • 아랍 에미리트의 제안7

    마침내 12점 그림이 다 걸리고 직원들이 전시실을 빠져나갔다.

    국왕은 그림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12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무함마드의 삶은 국왕도 익히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머릿속으로 늘 상상만 하던 신화를 이렇게 실제 눈으로 보니 그림의 있는 모든 게 달라 보였다. 감동이 서서히 뇌혈관 속으로 파고들어 물감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고 형형색색의 사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은 국왕을 강제로 600년대 아라비아반도 메카로 이끌었다. 그림 속의 모든 인물이 살아있는 듯했다. 천사는 방금 하늘에서 내려와 무함마드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고, 전쟁터에서 전사들은 칼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웃고 울고 있었다. 작가가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짧은 역사 지식으로 봐도 그림에 있는 모든 등장인물이 1400년 전 사람들의 모습 같았다.

    익숙하고도 친숙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감동이 더했다. 마치 새로운 역사의 한 장면을 발견한 듯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이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진실하고도 진한 감정이 영혼을 울리는 듯했다. 왜 자신이 나이 어린 작가인 태호를 콕 찍어서 작품을 의뢰했는지 이해했다. 자신의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왜 선지자 무함마드가 우상을 경계하고 심판의 날 형상을 그린 사람을 제일 먼저 벌하겠다고 하신 지 이해했다. 선지자가 살아있을 당시보다 1400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자신이 봐도 여기 있는 그림에 절을 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올라오는데, 과거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 충동을 어떻게 참을 수 있었겠는가? 사원을 짓고 그림을 모셔 놓고 절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는 선지자가 메카에 가서 우상을 파괴했던 행동의 정당성을 뒤엎는 것이다.

    12 그림 중 제일 감동을 준 그림은 선지자가 부족에서 쫓겨나 메디나로 향하는 장면이었다. 부족을 등 뒤로 한 채 험난한 사막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 올랐다. 그의 어깨선에서 부족을 고향을 떠나보내는 비애가 느껴졌다. 그의 뒤로 비치는 그림자마저 쓸쓸했다. 명 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비서 한 명이 의자를 가져오자 국왕은 털썩 앉았다. 그러나 곧 일어서서 그림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뜯어봤다. 무함마드의 얼굴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자신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통의 이슬람교도들이 봤다면 거품을 물고 넘어갈 행위지만 태호는 태연히 선지자의 얼굴을 그렸다. 비밀을 지키겠다는 자신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12 작품을 두 시간 넘게 살펴보다 국왕은 마지막 작품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림이 주는 감동이 여전히 영혼을 흔들고, 주먹으로 온몸을 때리는 듯했다. 머릿속에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듯하더니 곧 정신을 잃었다.

    *

    대통령 궁은 발칵 뒤집혔다. 미국에서 넘어온 작품을 두어 시간 관람하던 국왕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의사들이 뛰어오고 경호실은 테러의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전시실에 독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그림에 독성 물감이 있었는지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의료진이 검사 결과를 내놓으며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국왕 폐하께서는 과로가 겹쳐 탈진하셨을 뿐, 지금은 회복해 매우 건강하신 상태이다."

    탈진했는데 건강하다니 앞뒤가 안 맞았다. 그래도 대통령 궁 발표 이후, 아부다비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국왕은 의사가 하는 말을 듣고도 믿기가 어려운 듯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내 몸 상태가 크게 좋아졌다고?“

    "예, 폐하. 혈압이 내려갔고 스트레스 호르몬이라는 코르티솔 수치가 상당히 낮아졌습니다. 혈당 수치도 조금 내려갔고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 수치도 조금의 개선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약물 복용 수치를 높여야만 가능했었는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개선이 이루어져 저희 의료진도 이유를 파악 중입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의료진의 축하 말에 국왕은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날 밤, 국왕은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급하게 움직일 때 숨이 가쁜 것도 조금 줄었고 무호흡 증상도 개선된 듯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심장도 크게 개선되었다. 의사의 권유에 따라 운동을 시작했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국왕은 자신에게 이런 신의 은총이 오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에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근 10년간 건강은 악화하면 악화하였지 개선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태호의 12연작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대통령 비서실을 통해 태호의 그림에 대해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 혹시나 국왕의 건강이 개선된 것 같은 신비로운 현상이 더 있었는지 궁금했다. 조사 결과 5년 전 행복 시리즈라는 그림을 제작할 당시 우울증이 개선된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방송에도 소개되었지만, 인터넷에 떠돌던 뜬소문 같은 취급을 받던 이야기였다. 이제 루머가 아닌 사실이라는 게 확인이 되었다. 태호의 그림에는 무언가 신비한 힘이 있는 게 확실했다.

    *

    국왕은 왕세자를 불러 함께 전시실로 향했다. 국왕은 뒤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고 왕세자는 그림 앞에서 세심하게 그림을 살펴봤다. 왕세자는 아버지의 건강 상태에 대해 비서를 통해 들었다. 집안 식구들 DNA가 가히 좋다고 할 수 없기에 젊은 나이 때부터 관리를 해오는 게 있긴 하다. 그래도 이 그림을 보고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까 호기심에 왔다.

    그림은 무척이나 잘 그린 그림이다. 12점이나 되는 대작들이 전시실을 가득 메우고 관객을 압도하고 있었다. 신비한 힘은 차치하고 그림 자체만으로도 왕가의 보물로 정할 만했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영향을 준 건 없었지만 추가로 주문을 하고 싶어졌다. 왕가의 초상화도 태호에게 맡기고 싶었으며 앞으로 무슨 작품이 되었던 태호에게 의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작품을 관람하던 왕세자는 태호의 다른 그림들도 관람하고 싶어졌다. 다음 달 한국 방문 일정이 잡혀 있는 게 생각이 났다. 비서에게 보고 받기로 태호의 고향이다. 비서에게 지시해 한국에 있는 태호의 작품을 관람할 일정을 만들고 가능하다면 한국에 있는 모든 태호의 작품을 다 사 올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

    다움 미술관은 어제 외교부로부터 날아온 공문을 보고 비상이 걸렸다.

    "UAE 왕세자가 여기를 방문하겠다고요? 다음 달에요? 갑자기 여긴 왜 온답니까?“

    관장은 기름 사업을 하지 않는 모기업 때문에 UAE와 인연이 없었는데 갑자기 왕세자가 방문하겠다고 하니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외교부에 따르면 권태호 작가의 작품을 관람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허. 태호 작가 그림은 갑자기 왜요?“

    "재작년 권태호 작가를 문화재청 고문으로 임명한 뒤 UAE나 태호 작가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UAE는 그대로였는데 태호 작가의 활동이 무척이나 뜸했습니다. 그래서 UAE가 태호 작가를 통해 그림을 수집하겠다고 한 게 말뿐이 아니었냐는 추측이 돌았었죠. 지금까지 양쪽이 계약에 대한 세부사항을 논의 중이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고, 아니면 태호 작가가 UAE가 제안한 작품 활동을 하느라 조용했을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단장이 말했다.

    "계약에 대한 세부사항을 논의했다고 하기엔 너무 기간이 깁니다. 그렇게 오래 끌 양쪽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왕가에서 작품 제작을 의뢰했고, 오랜 기간 제작을 했다는 게 설득력이 있겠네요."

    김유미 관장은 말을 이었다.

    "두 가지를 알아보시고 보고해 주세요. 하나는 UAE 왕세자가 우리를 방문하러 왜 오는지. 다른 하나는 태호 작가가 지난 일 년 반 동안 무슨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지. 최대한 빨리 보고해 주세요. 단장님은 수장고에 있는 태호 그림을 다 꺼내서 전시할 공간 마련해 주시고, 외교부를 통해 정확한 방문 일자 시간 파악해서 이동 동선 짜세요. 왕세자의 방문 시 관람객들에게 갈 피해도 최소화 해주시고요."

    *

    국왕은 태호 작가가 약혼녀가 있다는 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위라도 만들어 왕가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태호에게 추가 보상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림 하나하나가 대작이라 어떻게 가치를 매겨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비서실장은 먼저 샤키르를 통해 작품 제작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각각 20만 불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한참 동안 내부 논의를 거친 끝에 태호에게 20년간 천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12 작품에 대한 가치를 2억 달러로 판단한 것이다.

    *

    UAE 왕세자는 한국에서 공식 일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움 미술관으로 향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기에 이동하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김유미 관장과 단장 그 외 과장급들 모두가 UAE 왕세자의 방문을 환영했다.

    한참을 태호가 그린 그림을 관람하던 왕세자는 예정에도 없던 회의를 요청했다. 김 관장은 이 시나리오 예상해 현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태호의 작품에 대한 감정을 진행했었다. 평가액은 약 3천5백만 달러. 평가액만 이럴 뿐 경매에 올라가면 가격은 더 오를 수 있다.

    요즘 미술품 가격이 워낙에 빠르게 올라 6천만 달러는 받아도 된다는 내부 평가가 있기도 했다. 이 가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탱화 시리즈. 이 작품을 2천 5백만 달러로 감정했다.

    팔 것 인가에 관한 결정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태호의 작품을 사랑하는 김 관장이 결정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움의 회의실.

    왕세자의 비서가 요구사항을 간단히 나열했다.

    "왕세자 저하께서는 다움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태호 작가의 모든 작품을 구매하길 원하십니다. 가격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그림을 왜 구매하려고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UAE는 태호의 그림을 수집할 이유가 넘쳤기 때문이다.

    단장은 김 관장의 눈치를 봤다. 김 관장은 태호의 그림도 사랑하지만 최근 호크니의 그림에 더 빠져 있었고 최근 총알을 모으는 중이었다.

    김 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미리 약속했던 금액보다 더 불렀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에서 한 이사가 이렇게 낙찰가를 올려 회사에 수백만 달러의 추가 이익을 보게 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7천만 달러면 팔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왕세자의 비서는 간단히 수락했다. 왕세자로부터 상한선에 대한 얼었는지를 받은 게 분명했다.

    "내일 왕세자 저하의 출국에 맞춰 작품이 모두 비행기에 옮겨지기를 원합니다. 가능하시죠?"

    비서가 당연히 될 것을 가정하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단장도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준비가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듯 대답했다.

    "좋은 거래가 되었군요. 이렇게 좋게 끝나서 기쁩니다.“

    계약 서류에 사인한 뒤, 왕세자는 김 관장과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은 후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축하드리옵니다, 저하.“

    "자네도 고생 많았어. 생각했던 것보다 1억 불보다는 3천만 불 적게 주고 샀군. 1억 5천만 불도 각오했었는데 말이야. 하하하.“

    왕세자와 비서는 아랍어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미술관에는 아랍어 통역도 이미 대기 중이었다. 단장은 통역에게 다가와 두 사람이 나눈 말이 무엇인지 들었고, 허탈해했다. 이걸 보고해야 하는지 순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찰라, 김 관장이 다가와 물었다.

    "두 사람이 뭐라고 얘기한 거죠?"

    머뭇거리는 단장을 재촉했다.

    "예상가는 1억 달러. 최대 1억 5천만 달러까지 쓸 각오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들으라고 일부러 가격을 부풀린 게 틀림없습니다, 관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UAE 측에서 태호를 띄우기 위해서 하는 립서비스가 분명합니다.“

    김 관장의 귀에는 립서비스 같은 단어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1억5천만 빼기 7천만 불인 8천만 불만 머리에 윙윙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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