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의 제안2
문화관광청장 '카레드 빈 술라엠'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계약은 30년. 작품 구매 금액은 매해 1억 달러로 책정했소. 필요하면 증액할 계획이고. 우리는 당신에게 아부다비 정부의 공식 고문 직함을 부여할 거요."
1억 달러면 미술 시장의 전체 거래 금액으로 보면 그저 5~10명 안팎의 컬렉터가 일 년에 쓰는 금액이지만 1억 달러를 한 사람이 그것도 태호가 쓴다면 이건 엄청난 영향력 행사가 된다. 한마디로 전 세계 미술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당신 작품은 우리가 항상 최고가에 구매하고, 당신이 원하면 작품가를 공개해 당신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오."
이건 아랍에미리트가 태호에게 공식적으로 힘을 실어주겠다는 말이었다. 국가와 개인의 이상한 야합이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합이었다.
"세금 문제는 우리 쪽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오. 당신 계좌를 아부다비와 스위스에 열어 합법적으로 절세를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소.
구매해야 하는 예술품이 있으면, 우리 직원에게 연락만 하면 구매 자체는 우리가 가서 할 것이오. 그게 바젤의 아트 페어이든 소더비의 경매이든 상관없다오.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현재 가치로 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 해마다 카운셀링 비용으로 지급될 것이요. 물론 당신의 작품을 구매하는 비용은 별도로 나갈 것이오.
천만 달러에는 국왕 폐하의 의뢰에 대한 비용도 포함이오. 이게 아무래도 의뢰를 했다는 사실을 밝히기는 어려우니···. 다만 국왕 폐하의 의뢰는 마감 기한은 없소. 5년에서 10년 정도면 어떨까 하오. 한 가지 부탁은 불경한 말이지만 국왕 폐하의 건강이 허락하는 시일 내에 작품이 완성되기를 바라오. 작품이 완성되면 알려주시오. 우리가 비밀리에 조용히 가져가겠소."
청장은 국왕의 눈치를 살핀 후 말을 이었다. 국왕의 표정이 별 변화가 없는 것이 사전에 조율된 듯했다.
"빛의 마리아 그림과 조각상도 이 일의 연장선에서 제작해줬으면 하오. 우리는 작가의 영역에 침범할 생각이 없소. 다만 국왕 폐하의 생각이 담긴 제안서를 보내드릴 테니 반영해 준다면 매우 고맙겠소. 그저 폐하의 취향이 조금 담긴 것뿐이라오."
태호는 천만 달러의 돈보다 30년 후지만 아부다비에 건설될 거대 미술관을 자신이 고른 작품으로 채울 수 있다는 데 훨씬 더 큰 매력을 느꼈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거기에 해마다 1억 달러의 구매라니. 이는 곧 권력이다.
잠시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제안은 받아야 했다.
"어째서 날 선택했습니까?"
"자네도 들었겠지만, 토마스 메서 박사는 우리의 자문위원이기도 하지만 박물관 업무와도 깊은 연관이 있소. 루브르와의 계약도 그의 제안 중 하나였소. 그에게 30년 이후의 박물관 운영에 대해 질문을 하니 차라리 컨템포러리 작품을 지금부터 수집하자는 제안을 했소. 30년이란 기한을 두고 작품을 수집하면 충분히 미술관을 채울 수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 일을 가장 잘하고 오래 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군지 물어보니 당신을 추천하더군. 우리는 뛰어난 안목과 일관성 있는 컬렉션을 할 역량 있는 젊은 인재를 원했소. 우리가 봐도 당신이 여기에 매우 적합해.
더불어 당신의 작품이 왕가의 품위와 결을 같이 한다는 점도 매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소. 그런 당신이 구매할 작품들이라면 적어도 이슬람교도가 봐도 괜찮은 좋은 작품들일 거라 믿고 있소."
"1억 달러라는 큰 금액을 작품 구매에 사용하려는 계획은 어떻게 나온 겁니까?" 태호가 물었다.
"토마스의 추천을 받고 당신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소. 오해하지 마시오. 외교가에 들리는 소식에 신문기사에 나온 내용 정보를 붙여 정리한 것뿐이니.
당신에게 카운셀링 비용으로 천만 달러를 제시해도 거부하리라 생각했소. 당신이 운영하는 Theo 사업은 차치하더라도, 지금 제작하는 작품들도 손쉽게 천만 달러를 넘어서는데 우리가 제안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겠지.
그래서 난 각 술탄에게 연락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은 후 판을 더 키우기로 했소. 한 1억 달러 정도 마련하여 당신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말이오.
그 정도면 앞으로 30년간 당신은 현대 미술 시장에서 가장 큰 손 중 하나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이 구매하는 작가의 작품이 곧 시대의 걸작이 되겠지.
여기에 당신 작품 중 최고를 수집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소. 우리가 이런 호의를 보인다면 당신도 좋은 작품을 우리에게 넘기지 않겠소?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최고의 작가가 되고 우리는 최고의 작품을 수집할 수 있소. 이만한 윈윈 전략은 찾아보기 힘들다오. 어떻소? 우리의 제안이?"
태호는 아랍에미리트의 제안이 너무나도 맘에 들었다. 영국의 찰스 사치는 불과 몇백만 불로 영국의 미술가들을 발굴하였고,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군림했다.
그가 영국 미술계 및 현대 미술에 이바지한 공은 어마어마하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폐해 역시 크다. 작품의 순수 미학보다는 사람들 입에 쉽게 오르내리고 상업적으로 성공할 자질을 갖춘 작품들만이 그에게 선택되어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예술가를 비즈니스맨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태호가 그와는 약간 다른 길을 걸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좀 더 미술의 본질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작품을 구매한다면? 태호가 제시할 금액이 사치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기에 미술계 트렌드까지 바뀔 수 있다. 많은 컨템포러리 작품들의 깊이 없음을 한탄하던 태호가 진정으로 원하던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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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알현이 끝나고 에미리트 팰리스 호텔로 돌아온 태호는 국왕이 전한 제안서를 열어봤다. 눈을 보석으로 꾸미는 것과 색이 들어간 스테인리스를 쓰는 것. 백금이 들어갈 것 등이 담긴 내용이었다. 자신이 고려 중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에 안도했다.
제안서에 있던 다른 종이에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제안도 있었다. 아랍권에서도 국왕의 초상화는 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기에 부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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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아랍 에미리트 아부다비의 문화관광청 청장은 태호가 아랍 에미리트 대통령과 문화관광청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태호의 역할을 아랍 에미리트가 구매할 예술 작품에 대해 조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행간을 읽은 사람들은 태호가 아랍에미리트가 예술품 구매와 관련된 전권 혹은 상당히 큰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 판단했다. 미술계에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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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에미리트에서 한 발표가 나온 지 얼마 후, 한국의 포탈에 태호와 관련된 기사가 여럿 올라왔다.
<권태호 미술계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다>
아랍 에미리트의 문화관광청은 한국계 미국인 권태호를 대통령실과 문화유산청의 고문으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교체가 아닌 추가 임명으로 권태호 고문에게는 예술 작품 구매와 관련된 조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랍 에미리트는 2007년 프랑스 정부와 2017년 개장할 미술관에 30년 동안 매년 300여 점의 작품을 대여받기로 협약을 맺었다. 이번 권태호 고문의 임명은 30년 이후의 미술관 운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 미술 시장 전문가인 다움 미술관의 최진영 단장은 이번 임명이 미술계에 새로운 권력자의 탄생으로 보고 그의 움직임에 대해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 미술계는 가고시안이나 사치 같은 갤러리가 작가를 발굴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상업주의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번 발표는 이런 시장 구조에 변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보입니다.
아랍에미리트가 어느 규모의 자금을 운용할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점은 앞으로 아랍의 권력자와 부호들이 권태호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고 그를 통해 현대 미술 작품을 구매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권태호 고문은 한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수재로 현재 미국에서 활동 중이며,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가장 비싼 가격에 작품이 거래되는 생존 작가 중 하나이며 조만간 그의 작품 가격은 이번 발표로 더 오를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태호를 봐왔기에 그의 성향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태호는 심각한 상업주의에 빠진 현대 미술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최진영 단장은 인터뷰 마지막에 태호의 국적 논란까지 언급했다. 평소 보스인 김유미 관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적 관련 논란으로 훼손된 그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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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 관련 기사 밑에는 대부분 욕설과 그와 비슷한 수준의 댓글이 달렸지만 몇몇 댓글은 태호가 가진 역할에 대해 궁금함과 향후 예상도 있었다.
"태호가 우리나라 작가들 작품을 안 사면 어떻게 되는거임?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작가들은 계속해서 국제무대에서 외면당할 것 같은데? 해외에서 성공한 한국계 작가들이 그렇게 많은데 한국에서 떠서 해외에서 인정받은 작가는 없다고 보는 게 맞는 듯. 있어도 적어도 태호 급은 안됨."
"왜 태호를 통해 아랍 에미리트가 작품을 구매하는 것임?"
"서로 주고받은 게 있다고 보는 게 맞음. UAE가 태호 작품을 비싸게 사주는 대신 제일 좋은 작품을 받는다거나."
"태호가 고르겠지만 아랍 에미리트가 사는 것이기에 국제 미술 시장에 아랍 에미리트가 큰손으로 등장한 것으로 봐야 함. 태호 작가가 수집하는 것이기에 일관성 있는 컬렉션이 가능하고 전체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을 구매할 게 확실함."
"권태호의 갑오브갑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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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 돌아온 태호는 얼마 뒤 두 스승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갔다. 강 재범 교수와 김창기 교수는 이제 50대 중반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다.
"네 덕분에 요즘 전화기 꺼 놓고 산다. 기억도 안 나는 고등학교 동창부터 문교부 장관까지 전화해서 말이지." 강 교수의 말에 김 교수도 동의하는 듯했다.
"그렇게나 연락이 많이 와요?"
"권력에 민감한 자들 아니냐. 네가 21세기 미술계를 휘저을 권력을 잡았다는 걸 알아채고 올라타려고 하는 게지. 네 연락처는 모르니 만만한 우리에게 연락하는 거고.
우리가 그렇게 도와 달라고 할 때는 알았다고만 하고 뒷짐 지고 서 있던 양반들이 이제는 앞다퉈 연락하는 꼴이 아주 가관이더구나."
두 교수의 눈에 담긴 감정은 경멸이었다.
태호와 소주를 마시며 대화하는 두 교수는 태호가 쫓기듯 미국에 건너간 이후 태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나중에 태호는 자신을 위해 애쓰는 두 스승이 안쓰러워 말리기까지 했었다.
"후후, 그럼 즐기세요. 이 기회에 한국 미술계를 바꿔보는 것도 좋잖아요."
태호는 두 스승에게 자기 일을 분담할 생각으로 한국에 왔다. 자신이 보기에 두 사람은 이런 일에 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