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의 제안1
아랍에미리트 (UAE)는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자 세습 왕정 국가이다. 아랍에미리트 국토의 86%를 차지하고 있는 아부다비의 국왕이 대통령직을 세습하며, 5%를 차지한 두바이가 총리직을 세습한다. 현 아부다비의 국왕 (셰흐)이자 제2대 대통령인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얀' 은 8년 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대통령 자리와 아부다비를 물려받았다.
토마스는 태호를 만난 자리에서 아랍에미리트 국왕에게 전달받은 제안을 설명했다.
“아랍에미리트 국왕의 제안이라는 거죠? 어떻게 이런 제안을 토마스를 통행하게 된 거예요?”
“내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문화관광청의 자문위원직도 가지고 있어서 종종 국왕 폐하의 예술 자문 업무도 한다네.”
그 말에 태호도 다소 안심하며 정말 묻고 싶었던 말을 했다.
“이 제안 받아도 될까요?”
“괜찮을 거야. 국왕의 예술에 관한 관심이 남다르기에 뭘 제안하든 간에 자네에게 손해될 일은 없을 거네. 자신들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라 시시한 보상을 제안하지도 않을 테고.”
긍정적인 토마스의 답변에 태호는 의뢰 내용을 들어보기로 하고 토마스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권태호입니다. 빌바오 관장인 토마스 메서 박사로부터 전화번호를 받아 연락 드립니다."
전화기로 들리는 목소리는 젊은 여성의 것이었다. 비서인 듯했는데 중동 지역의 여성 인권이 비교적 낮다고 알고 있었는데 적어도 아랍에미리트는 다른 듯했다.
"네 태호 작가님.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부다비 문화관광청에서 일하는 나다 살렘 입니다. 혹시 토마스 메서 박사가 설명한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거로 생각해도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언제쯤 방문하실지 알려주시면 교통편을 마련하겠습니다. 동행이 있습니까?"
"혼자 갑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이 박 삼일 정도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맞춰 비행기가 도착하게 하겠습니다. 자세한 일정은 제게 비서 연락처를 주시면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뉴욕에서 일반 여객기를 타고 갈 생각이었는데 비행기를 보낸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아랍에미리트가 이번 초대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월요일. 아부다비에 도착한 태호는 공항 근처의 특급 호텔에서 하루를 쉬었다. 다음날 늦은 밤 청장의 초대를 받았다.
호텔에서 태호를 태운 리무진에는 나다 살렘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태호에게 양해를 구하며 비밀서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구두로 끝내리라 생각했는데 공식 서류까지 작성하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제안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호텔이나 문화관광청 사무실로 갈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태호를 태운 차는 국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부다비 방문을 환영하오. 비밀서약서를 쓰게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오늘 나눌 대화가 국내외 극비라서 말일세."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얀 국왕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태호를 맞이했다. 60대가 많다고 하기는 그런 나이이지만 다크 서클이 가득한 얼굴에 그다지 안색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밤늦게 불러서 미안하네. 낮에 부르고 싶었지만, 일정을 조정할 수가 없었어."
국왕의 뜻밖의 사과에 태호는 국왕에 대한 호감이 올라갔다.
"아닙니다, 국왕 폐하. 무척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 바쁘긴 하지. 바쁘지만 고귀한 피를 타고 태어난 자의 신성한 의무를 소홀히 하면 안 되네. 이 왕이라는 직위가 꽤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는가? 하하."
국왕의 유쾌한 태도에 태호의 호감은 더 올라갔다. 작품 제작을 제안하기 위해 부른 것이지만 태호를 배려하는 게 느껴졌다.
"자네를 이렇게 부른 이유는 예상하듯이 작품 제작을 제안하기 위함일세."
이렇게까지 비밀스레 초대한 것을 보면 제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빛의 마리아를 원하는 듯했다. 태호는 뉴욕에서 아랍에미리트까지 오는 내내 조각상까지 끼워 팔 생각에 골몰했었다.
"빛의 마리아를 원하시나요?"
"빛의 마리아도 원하는 작품 중 하나네. 그리고 다른 제안도 있지. 조금은 특별한."
원하는 작품 중 하나라는 말에 놀랄 틈도 없이 국왕은 갑자기 다른 주제를 꺼냈다.
"자네 이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태호는 국왕이 주제를 바꾼 의도가 궁금했지만, 특별한 제안이라는 것과 연관될 거로 생각해 공손히 대답했다.
"코란을 한번 정독한 적이 있습니다."
"오, 그런가? 읽고 나서의 소감은 어떠했나?"
"훌륭한 종교입니다. 특히 배고픈 자를 이해하기 위해 단식을 하는 라마단이란 전통은 다른 종교도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태호의 대답에 국왕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어려운 질문을 했다.
"그럼 단점은?"
머뭇머뭇하는 태호를 보고 국왕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 말을 이었다.
"이 질문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군. 그럼 내가 먼저 얘기를 하지. 이슬람에 시아파와 수니파가 있다는 걸 아나? 아랍에미리트는 수니파를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누구로 선출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로 생긴 두 계파는 지금도 뿌리 깊은 갈등의 원인이다. 태호는 국왕의 질문 의도를 몰라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다.
"시아파가 수니파보다 딱 하나 잘하는 게 있다면 회화에 대한 포용력이네. 시아파는 그림을 허용하지. 물론 가톨릭처럼 허용한다는 얘기는 아니야. 그저 눈감아 주는 수준이지. 난 그저 눈 감아 주는 수준의 허용도 부럽다네."
태호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림 제작과 관련된 아주 개인적인 제안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비밀서약서까지 작성하게 한 듯했다.
"난 예술을 사랑하네. 이탈리아에 갔을 때 제일 부러웠던 게 르네상스 때 제작된 많은 예술품이지. 왜 이런 작품들이 이슬람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이유야 코란에 적힌 내용과 그에 따른 해석이지만."
국왕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코란에 적힌 문구를 기계적으로 해석해 적용하는 원리주의자들을 난 좋게 보지 않는다네. 이만하면 내 얘기는 충분히 한 거 같은데 자네도 대답해줄 텐가? 코란을 읽고 느낀 점을?"
태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든 종교가 가진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이슬람은 거의 천 삼백 년 전 세계에 아직도 갇혀 있습니다. 유목민의 전통이 무척이나 강하게 남아있죠."
국왕은 태호의 대답이 재밌었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맞아. 우리는 실제로 정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아랍에미리트가 독립한 후 유목 생활을 정리한 것도 실제 100년도 되지 않았다.
“자네가 생각하는 이슬람의 단점을 물어본 건 자네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파악하기 위함이네. 아무것도 모르는 작가에게 이런 작품을 의뢰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국왕은 태호의 눈을 응시하며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저런 문제로 난 자네에게 그림 제작을 공식적으로 의뢰하기는 힘들어. 그 말인즉슨 난 자네에게 비밀리에 작품 제작을 의뢰하고 싶네."
비밀 의뢰라는 말에 태호의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전 세계 최고 부호로 꼽히는 국왕의 제안이라는 건 금전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영향력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될 게 뻔했다.
"난 위대한 예언자 모하마드의 일대기가 담긴 그림을 원하네."
'두둥'
태호는 머릿속에서 북소리가 나는 듯한 충격을 억누르고 두 눈을 감았다. 곧 머릿속은 맹렬히 이 제안의 득실을 머릿속에서 계산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의 일대기를 그린다는 건 자신이 이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영광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의뢰하는 제안이다. 무척이나 끌렸다. 다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제일 큰 문제는 작품의 제작 방법.
"작품 제작에 따로 참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랍에미리트의 종교 지도자 같은 분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실지 궁금합니다."
태호는 누군가에게 방해받길 싫어한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부정적인 기운을 잔뜩 담아 물었다.
"어째서 그걸 물어보는 건가?"
"작품 제작에 영향을 받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태호의 말에 국왕 대신 문화관광청장 '카레드 빈 술라엠'이 뒤를 이어 설명했다.
"우리는 태호 작가가 원하는 요청이 있을 때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오. 예를 들어 작품 구상을 위해 이슬람 성지를 비밀리에 방문하고자 한다면 그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할 계획이오. 비이슬람교도인 태호 작가가 방문하기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
가장 큰 걸림돌이 해결되자 다른 문제가 생각났다.
아랍에미리트나 태호나 이런 그림을 의뢰했고 제작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밝히는 순간, 이 종교를 믿는 근본주의자들의 좋은 살해 대상이 될 뿐이다. 영광을 가져갈 수 없다면 다른 보상이 있어야 했다.
태호는 이 정도의 퀘스트에 보상이 뭔지 궁금해졌다. 국왕도 청장도 이러한 태호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국왕은 청장을 쳐다봤고, 청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부다비 정부는 석유 시대 이후를 늘 고민하고 있소."
태호는 국왕에 이어 청장도 갑자기 다른 주제의 얘기를 하자 혼란스러웠지만, 잠자코 경청했다.
"아부다비나 두바이 등에 대규모 호텔을 짓고 미술관과 박물관 건축을 계획하는 등, 문화 관광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이에 대한 대비 중 하나요.
우리는 2007년에 프랑스 정부의 협약을 근거로 미술관을 건립하고 있소. 2017년 개장을 목표로 지금 한창 공사 중에 있기도 하고.
루브르의 이름과 그들의 예술품을 빌어서라도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소. 자존심은 상하지만 어쩌겠소. 아랍에미리트에는 그 거대한 미술관을 채울 수 있는 예술품이 없다오.
정말 문제는 루브르와 계약이 끝나는 30년 이후요.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30년 후 미술관을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을 했소. 아무리 고민을 해도 루브르가 공유하는 수준의 예술품을 수집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 비용 문제는 차치하고 저런 예술품들은 시장에 나오지도 않소.
그래서 나온 대안이 경매보다는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초기부터 수집하는 게 더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미술품 구매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보았소.
그래서 제안하고자 하오. 우리는 30년 후에 비워질 이 미술관에 당신의 작품과 당신이 수집한 작품을 전시하게 할 생각이오."
태호의 심장은 더 거칠게 뛰었다. 이건 정말 태호가 상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간절히 원하던 권력이다. 열망 가득한 그리고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는 태호의 표정에 청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상상을 해보시오. 30년 후, 미술관에는 당신의 이름을 딴 별관이 들어서 있고, 그 안에는 당신의 작품 중 최고걸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소. 다른 별관들 역시 당신이 고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겠지.
30년 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오. '2010년대부터 2040년대까지 현대 예술의 진수를 보고 싶다면 아부다비로 가라'라고 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