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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152/181)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알토로 향하기 전 사라는 로라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스티브의 집에는 Theo 회사 직원들이 앉을만한 테이블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여업체에 전화를 걸어 태호 일행이 도착하는 날짜에 맞춰 대형 테이블과 의자를 주문했다. 마실 음료수와 간식은 케이터링 업체에, 숙박을 위해 호텔까지 예약했다. 2박 3일 일정이었다.

태호는 잔뜩 준비해 간 온 옷과 가방 및 액세서리를 스티브 집에 펼친 후 설명했다.

"이건 마크 제이가 디자인한 가방이에요. 그는 로라를 위해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디자인을 이번 SS 시즌에 올리는 걸 포기했어요. 아마 로라가 들고 다니는 걸 못 본다면 마크가 정말 섭섭해할 거에요."

"이건 존 갈리아노의 이브닝드레스고요. 몸에 착 달라붙어 로라의 여성성을 돋보이게 할 걸작이라고요. 나중에 꼭 입고 다녀봐요."

"이건 크리스챤 의 이브닝드레스에요. 좀 튀긴 하죠? 그래도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랍니다. 실용성은 떨어지지만 그림으로 표현하기엔 이만한 옷이 없어요."

가봉을 위해 수십 벌의 옷을 가져온 태호 일행은 스티브의 집을 패션쇼 스테이지 뒤편처럼 만들어버렸다. 태호는 사진작가가 되어 사진을 찍었고 사진을 어색해하는 스티브네 식구를 위해 제마도 이번 출장에 합류해 사진 찍는 것을 도왔다. 얼마 뒤 로라는 제마와 자매처럼 보일 정도로 친해졌다.

로라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어색해했지만, 곧 적응했고 즐기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자신의 집에 이렇게 많은 방문객이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지만 즐거워하는 로라를 보며 이 악물고 버텼다. 대신 나갈 때 깔끔히 정리하고 나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라는 청소업체와의 계약서까지 보여주며 스티브를 안심시켰다.

태호는 가지고 온 옷을 케인의 가족에게 입힌 후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난 후 스티브와 로라가 원하는 초상화 구도까지 확정하고 초상화에 쓸 사진을 골랐다.

떠나기 전 스티브에게 슬쩍 그림에 담을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묻었지만, 아직 못 찾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

옷은 일주일 뒤 스티브의 집에 도착했다. 사라가 직접 옷을 들고 찾아와 스티브 집의 옷장에 걸리는 것까지 확인했다.

태호의 그림은 6개월 뒤에 도착했다.

작정한 듯 태호는 온갖 정성을 다해 10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렸다. 미국 대통령 초상화를 그려도 이 정도 정성은 못 들이겠다며 투덜거렸다.

스티브에게 갈 청구서를 보면서도 손해가 막대하다며 다음부턴 이런 출혈 마케팅은 하지 말자며 사라를 설득했다.

반면 옷과 그림을 받은 로라는 정말 행복해했다. 사라의 이메일을 통해 태호와 Theo 직원들에게 장문의 감사 편지를 보내왔고, 제마에게도 특별히 감사 인사를 보냈다.

"레몬보다 마케팅을 잘하는 회사가 있다면 네이키고, 내가 아는 최고의 사기꾼 아니 마케터는 태호다."

나중에 스티브가 태호의 청구서를 받고 이를 갈며 한 말이었고, 그의 자서전에도 올랐다.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천만 달러였다.

*

200x년 기준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2위

200x년 기준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 선정

타임지 선정 20세기 이후 최고 아티스트 86위.

이는 제프 쿤이나 데미안 허스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마우리치오 카텔란보다는 위의 순위로 태호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이제 8년 정도 인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였다.

사람들은 태호가 워홀이나 피카소와 같은 미술계에서의 위치에 다다르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로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위치에 어느 정도 다다랐으며, 그렇기에 태호의 작품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작품을 제작하는 족족 팔려가기에 지금 구하지 못하면 경쟁자가 늘어나서 나중에는 더 구하기 힘들 거라는 전망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작품 수가 많으면 돈은 더 벌 수도 있겠지만 태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데미안 허스트처럼 백 명이 넘는 조수를 고용해 그림을 그린 후 자신은 몇 번의 붓칠과 사인 정도만 한 작품을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는 예도 있었지만, 태호는 이를 예술적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태호는 겨우 15명 정도의 조수만을 유지하고 있었고 자신이 직접 작업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다 보니 완성하는 작품 수는 제한이 있었다. 그래도 비교적 물량이 많이 풀린 행복 시리즈 미니 버전들이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고 그림값도 올라갔다.

돈도 잘 벌었고 최고의 아티스트 소리를 듣기 시작했지만,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응어리가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를 잃게 만들고 국적까지 포기하게 만든 3년 전 그 일이었다.

태호는 3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가끔 꿈에도 나와 그를 괴롭혔기에 한국에서 사람을 고용해 정기적으로 자신을 물 먹인 그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한가지 계획은 세울 수 있었다. 돈으로 복수하는 방법이었고 생각해 낸 게 Theo의 하위 브랜드를 런칭이었다.

그걸로 돈을 벌고 그놈 회사의 지분을 사들여 그놈을 현재 직위에서 해임시켜 버리는 방법을 생각했다. 무모하지만 그나마 제일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로 보였는데, 그게 아니면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고민이 끝낸 태호는 새 브랜드 런칭을 위해 아르노 회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파리로 날아갔다.

한동안 근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사업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뭘 도와줬으면 좋겠나?"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고 싶습니다."

태호의 말에 아르노는 브랜드 얘기보다는 루이뷔통 얘기를 먼저 꺼냈다.

"마크가 자신의 브랜드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싶어 해. 언제가 루이뷔통과의 마지막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남지 않았지. 마크를 대신해 루이뷔통의 헤드 디자이너 자리는 어떤가? 마크도 동의한 부분일세."

매력적인 제안이긴 했지만 그렇게 끌리지는 않았다. 일 년 내내 적어도 6번은 패션쇼를 해야 하는데 그걸 끌고 갈 자신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태호는 제안을 고사했다.

"감사한 제안이지만 제가 적임자는 아닌 것 같아요."

그리 어렵지 않게 거절하는 태호를 보며 아르노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네."

예의상 물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르노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생각하는 새로운 브랜드는 타겟 고객층이 어떻게 되는가?"

"Theo의 하위 라인이자 루이뷔통의 상위 라인이 적정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늘 고민하는 라인이군."

"Theo가 너무 하이 엔드급이고 루이뷔통은 점점 대중화가 되어가다 보니 에르메스랑 경쟁할 브랜드가 LVMH 내에 없어요. 필요한 럭셔리 라인이라고 생각해서 제안 드리는 겁니다."

"맞아. Theo는 지금 나와 있는 어떤 패션 브랜드와는 태생부터 다르니 경쟁 대상에 놓기는 그렇고. 루이뷔통 제품은 너무 시장에 흔하지. 수익은 늘어 좋긴 했지만 이렇게 브랜드가 흔해진 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잠시 생각을 하던 아르노는 바로 새 브랜드의 런칭을 수락하지 않았고, 태호도 이를 기대하지 않았다. 태호는 Theo를 대표하고 또 브랜드의 상징이었지만 새로 런칭하는 브랜드에 태호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게 맞는 건지는 다른 얘기였다. 회사 내부에서 논의를 거쳐야 할 일이고 최소 6개월에서 1년의 기간을 두고 견적을 뽑아봐야 했다.

아르노 회장은 새 브랜드에 대한 고민이 정리되자마자 태호에게 다른 걸 물었다.

"갑자기 이쪽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이유는 뭔가? 정작 루이뷔통 헤드 자리는 고사하면서?"

말하기를 주저하는 태호를 보고 회장은 한마디를 더했다.

"자네는 돈에 비교적 초월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은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오는군. 그게 뭔가? 무엇이 자네를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게?"

태호는 말이 없다.

"혹시 돈이 필요한가? 아니면 권력?"

말을 꺼내면서 태호의 표정을 살피던 아르노는 어제 태호의 근황을 보고 받다가 들은 내용을 언급했다.

"자네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인가?"

표정이 굳어지는 태호를 보고 회장은 확신했다.

"나에게 어찌 된 일인지 풀어서 설명해보게. 나도 간략히 보고를 듣긴 했네만, 파리에서는 서울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알기 어려워."

"휴···."

짧게 한숨을 쉰 후 태호는 서울에서 있었던 일을 비교적 간략하지만 숨기지 않고 얘기했다. 얘기를 듣던 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상대 회사가 패션 관련 회사도 아니지 않은가? 자네가 새로운 회사를 런칭해서 매우 성공적으로 회사를 이끌고 돈을 번다고 하더라도 전자와 화학이 주력인 상대 회사에 줄 수 있는 타격은 없어. 돈을 벌어서 그 회사의 지분을 가져오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나? 게다가 그 큰 회사의 1%를 가져온다 해도 자네에겐 손해일세. 차라리 LVMH 주식을 사는 게 훨씬 이익이지. 내가 더 큰 수익을 안겨줄 테니까."

아르노는 태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태호 할아버지 얘기만 아니었으면 더 크게 웃었을 거다.

"이제야 자네 나이 또래로 보이는군. 아니, 어른이 되어 간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씀인지?"

태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르노를 바라봤다. 아르노는 한껏 풀어진 얼굴로 마치 아들에게 타이르듯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실패 없이 커왔지 않나? 어렸을 때부터 하는 대부분의 일에서 성공했을 것이고. 그때 일이 아마 처음 맛보는 패배였을 거야. 아니, 사실 패배도 아니야. 그냥 불운한 사건이지. 자네의 기분을 약간은 이해하네만, 현실만을 놓고 보자면 돈으로 그 회사와 싸우면 안 돼."

"그럼요?"

"영향력으로 싸워야지. 자네는 자네가 잘하는 것으로 그 회사와 싸워야 해. 왜 두 손 가득 무기를 들고 있는데 처음 접하는 새로운 무기를 찾고 있는 건가?"

아르노는 와인을 들이키고 내려놓은 뒤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가진 무기가 뭔지 알긴 하는가? 표정을 보니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자네는 하이 컬쳐의 거의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이야. 더군다나 젊다 못해 아직 어려. 그 영향력을 최대한 키워보게."

영향력을 키우라는 말을 태호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영향력을 어떻게 키우라는 얘기인지 조금만 더 설명해주세요."

"후후. 그래. 쉬운 예를 하나 들어주지. 태호라는 막강한 브랜드를 가진 예술가가 아니면 날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었겠나? 그것도 일주일 만에? 내 스케줄도 웬만한 국가 정상들 못지않게 빡빡해."

아르노는 웃으며 말했고 그제야 태호도 아르노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정도 되니까 나를 움직이지, 아니면 짧은 시간 안에 날 만나긴 쉽지 않아. 왜냐면 나도 자네 그림을 기다리는 사람 중 하나고 늘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거든.

그런데 이게 나만 그렇겠나? 나처럼 자네 작품을 기대하거나 미술관을 가지고 있거나 원하는 그림이 있는 모든 사람은 자네에게 호감이 있고 자네의 다음 작품을 구매하기를 원하고 있어. 이걸 이용해야지.

사람도 더 만나고 정치권에도 영향력을 미칠 방법을 알아보게. 뉴욕의 각 공원에 행복 시리즈 그림을 영구 전시한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뉴욕뿐만 아니라 원하는 다른 대도시에도 자네 작품을 설치하면 좋겠지. 자네 할 일이 많아. 그렇게 영향력을 키우다 보면 기회가 올걸세. 그때 한방 크게 먹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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