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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업계의 제왕을 만나다2 (151/181)
  • IT 업계의 제왕을 만나다2

    태호는 순간 당황했다. 보통이면 잘하지 않는 실수인데 사라가 신신당부를 하며 압박하자 평소답지 않게 긴장했다. 평소 갑 중의 갑 혹은 갑 같은 을로 지내다가 정말 을이 되자 벌어진 일이었다.

    태호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핸드폰 자체를 잘 안 써요."

    "아니 어떻게 우리 회사에서 만든 훌륭한 핸드폰을 안 쓰고 그 쓰레기 같은 핸드폰을 쓰지?"

    스티브는 유어폰의 장점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빙자한 주입식 교육을 할 태세였다. 태호는 이건 정말 피하고 싶었다.

    "스티브, 내가 이 폰을 쓰는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내가 한국 출신인 건 알죠? 그 오성 폰을 만드는 회사가 나를 어렸을 때부터 후원한 그 미술관이랑 같은 집안이에요. 그 집 막내딸이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해서, 난 그 집 가서 같이 저녁을 먹은 적도 있어요."

    태호는 횡설수설했지만, 곧 능숙하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다만 조금 지나쳤다.

    "스티브는 내게 핸드폰 하나 보내본 적 있었어요?"

    정답이 아니었는지 잔뜩 눈살을 지푸리는 스티브를 보자 태호는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태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서 유어폰을 꺼내 스티브에게 보여줬다.

    "이제는 오성폰은 너무 구려서 바꾸려고요. 봐요, 이렇게 유어폰도 준비한 상태라고요."

    그제야 조금은 얼굴이 풀어진 스티브. 하지만 아까까지 꽤 괜찮았던 분위기는 흐트러졌고 스티브의 눈은 식어있었다.

    스티브를 완전히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태호에게 이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할 수 없이 플랜 B를 실행해야 했다.

    "로라, 스티브와 조금 개인적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자리를 정리해 줄 수 있나요? 매우 개인적인 얘기이고 스티브 이외엔 밝히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태호는 옆에 있던 로라에게 말했다.

    "자네의 개인적인 얘기가 초상화하고 연관이 있는 건가? 거기에 로라까지 자리를 비워야 하나?"

    "초상화와 연관이 있어요. 그리고 내가 할 얘기가 로라의 가치관과 맞지 않을 수 있고요. 스티브가 듣고 로라에게 공개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해요. 단, 로라에게만 공개해야 해요. 듣고 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예요."

    병간호를 위한 고용인과 로라까지 자리를 비우자 태호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자신이 쓴 소설 '앙리 보나' 였다.

    "몇 년 전에 쓴 소설이에요. Faceless의 원작자 '앙리 보나'에 대한 소설이에요. 특히 마지막 100페이지는 앙리 보나가 Faceless를 그리면서 보낸 마지막 100일에 대한 기록이에요. 눈으로 보는 듯 묘사했다며, 비평가나 독자들이 극찬한 소설이죠."

    스티브는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눈빛이었다.

    "Je ne connaissais pas le Paris du XIXe siècle. Comment ai-je pu écrire ce genre de roman?"

    태호는 불어로 대답했다. 스티브는 불어는 모르지만, 원어민 수준의 불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태호, 난 불어를 할 줄 몰라. 왜 나에게 갑자기 불어로 말하는 건가?"

    "'난 19세기 파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요?'라고 말했어요."

    태호는 불어로 설명했던 말을 다시 영어로 말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이 정도로 잘하진 않았어요. Faceless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마치 식스 센스에서 콜 시어가 말콤 크로우를 보고 '나는 죽은 사람들을 봐요.'라고 한 대사 같았다. 물론 스티브는 못 알아들었다. 말콤 크로우가 못 알아들은 것처럼.

    "난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어요. 원하는 이미지를 기억하고 그림으로 옮기는 능력은 그 누구도 날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물고기가 물에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능력이었죠.

    그 정도로 난 그림 그리는 건 완전히 타고났어요. 내 부모님은 전혀 그림에 재주가 없는데도요. 재수 없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피카소의 어린 시절도 나와는 비교 대상이 아니에요."

    스티브는 그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내가 Faceless를 실제로 본 건 미국에 건너온 고3 때가 처음이에요. 이런 내가 어떻게 Faceless의 원작자를 찾는 논문의 제1 저자이고 이런 소설을 썼을까요? 난 미국에 오기 전에 이탈리아 말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제법 잘 쓸 수 있죠."

    태호는 이탈리아어도 유창하게 말했다.

    "대학 때 사귀던 여자친구는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제 발음을 듣고 19세기 말의 옛날 파리 말을 쓰는 것 같다고 했죠. 이탈리아어도 마찬가지예요. 옛날 이탈리아에서 쓰던 말투를 쓰더라고요."

    스티브는 점점 놀라는 표정을 하다가 말했다.

    "자네, 지금 나에게 전생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

    이제 스티브의 얼굴에는 태호의 말을 불신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전생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앙리 보나에 대해 짧은 순간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어요. Faceless를 보는 순간. 마치 매트릭스의 파란 약을 먹은 기분이었어요. 정보가 뇌로 쏟아져 내려와 기절할 뻔했죠."

    "태호, 지금은 21세기야."

    "그래서 더 신기한 거예요. 문명이 이만큼이나 발달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난, Faceless의 복제품에도 어떤 영혼의 끌림을 느꼈어요. Faceless가 나에게는 토템이었죠. 토템 알죠? 인셉션에 나오는 그 팽이. 모든 진실을 꽤 뚫을 수 있는 아이템."

    다행히 이 영화들은 워낙 유명해서 봤는지 바로 이해하는 눈치였다.

    "상상해 봐요. 당신이 100년 뒤에 태어났어요. 태어날 때부터 지금의 당신과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을 거예요. 아마 어떤 분야에서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겠죠. 토템을 만나기 전까지 전생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냥 자연스럽게 타고 나는 거죠. 주위에서는 보통 천재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으로요.

    나 같은 경우는 그림에 대한 재능이라 쉽게 눈에 띄었고 조기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집도 넉넉해서 미국에 빨리 넘어올 생각을 했고요. 물론 Faceless를 보려고 넘어온 것은 아니지만. 전생이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한국에서 태어날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당신도 어떤 환경에서 다시 태어날지 알 수가 없어요. 당신이 미국에서 태어날지, 한국에서 태어날지,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날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 어디에 태어나도 당신이 원하는 장소로 와서 당신의 유산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안배를 해야 해요.

    티베트 불교를 예로 들어 볼게요. 티베트 불교는 윤회를 믿어요. 그래서 전대의 라마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이용해 다시 태어난 라마를 찾죠. 달라이 라마도 그랬고 판첸 라마도 그랬어요. 중국 정부가 그 전통을 망가뜨려 버리긴 했지만.

    환생할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메시지 같은 걸 남기는 것도 좋겠죠? 당신만이 아는 수수께끼를 풀면 당신이 안배한 유산을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이런 건 어때요? 어느 날 미래의 당신이 우연히 내가 그린 당신 초상화를 보고 캘리포니아 알토로 찾아와요. 아니면 캘리포니아의 레몬사 본사로 올 수도 있겠죠.

    거기서 당신이 남긴 토템을 보고 전생을 깨달아요. 그리고 당신의 자손이 있는 집으로 찾아가던지, 아니면 레몬사 본사의 어떤 비밀의 방을 찾아가서 과거의 당신이 남긴 편지를 공개해 달라고 요구해요.

    그럼 당신의 후손이 와서 물어보겠죠. 수수께끼의 정답이 뭐냐고. 그러면 미래의 당신이 정답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당신이 안배한 유산을 미래의 당신이 받고 또다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거예요. 어때요? 이런 스토리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티브를 태호의 말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달래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조금은 기분이 풀린 듯했다.

    "정말 영화 같은 얘기를 하는군. 영화광인가?"

    스티브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태호를 바라봤다. 그래도 조금은 풀린 표정에 태호도 안도했다.

    "믿으라고는 얘기 안 해요. 나도 내가 겪지 않았다면 안 믿었을 것 같은 이야기니까. 하지만 여기 살아있는 증거가 있어요.

    속는 셈 치고 해봐요. 난 딱히 당신을 속일 생각도 없고, 당신이 동의하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작업할 거니까. 수수께끼는 당신이 만들어요. 이걸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활력소가 될 거에요."

    태호의 말이 끝나도 스티브는 말이 없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태호는 스티브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참 영화 같은 이야기야. 사이비 종교 같기도 하고. 장난이라면 악취미고. 내가 건강할 때 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면 당장에 내 앞에서 꺼지라고 난리를 쳤을 텐데.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에게 다음 생을 말하는 것처럼 솔깃한 게 없지."

    태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숨을 쉰 스티브는 태호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뭘 하면 좋겠나?"

    태호는 스티브와 로라, 세 자녀 사진까지 잔뜩 찍고 몸 치수까지 다 잰 후 준비가 되는 데로 다시 돌아오겠다며 뉴욕으로 떠났다. 스티브는 로라에게 태호와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태호도 동의한 부분이었다.

    "난 환생이든 윤회든 믿지도 않고 그게 나에게 중요하진 않아. 그냥 태호의 말 자체가 재밌었어. 보물 지도를 설계하는 것 같지 않아? 꼭 탐정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로라는 태호의 말에 홀라당 넘어간 스티브를 보는 게 즐거웠다. 또 신기한 이야기로 남편을 설득한 태호도 유쾌했다.

    *

    뉴욕으로 돌아온 태호는 스티브 가족 사진을 놓고 초상화의 구도를 잡았다. 그 후, 가족 전체가 나오는 그림, 케인 부부만 나오는 그림, 케인 부부가 젊었을 때의 그림, 등등. 스티브가 죽지 않고 나이를 먹었을 때의 모습까지 상상하며 스케치했다. 그의 다양한 스케치는 비록 채색은 하지 않았지만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로 디테일에 충실했다.

    태호와 Theo의 직원들은 케인 가족을 꾸밀 수 있는 모든 디자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고민했다. 스티브가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에게 터틀넥을 주문하자 100벌을 받아 입은 것처럼, 케인 가족이 앞으로 입을 만한 옷을 이 기회에 몽땅 만들어 보내버리기로 했다. 스티브는 몰라도 로라는 만족할 것이다.

    Theo에 디자인을 보내주는 LVMH 내의 모든 디자이너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고 케인 가족이 입을 옷 제작을 위한 디자인도 받았다. 평소보다 반의반도 안 되는 커미션이었지만 그들은 흔쾌히 응했다. 태호는 아니었지만 레몬사의 디자인에 열광하는 의류 디자이너는 발에 채도록 많았다.

    디자이너의 콘셉트가 담긴 일러스트는 태호의 손에 의해 옷으로 구체화 되었다. 일러스트에 나온 옷을 입었을 때의 모습을 태호가 그림으로 그리면 그걸 바탕으로 옷 제작에 들어갔다.

    마크 밑에서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프린터로 찍어내듯 옷을 제작해냈다. 누가 옆에서 봤다면 '레벨 업 했어'라고 알려줄 것 같았다.

    얼마 뒤, 제작된 수많은 옷, 액세서리, 직원들을 잔뜩 데리고 전세기를 띄워 알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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