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업계의 제왕을 만나다1
스티브 케인.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위에 항상 포함되는 IT 업계의 거물이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어려운 암이고 또 늦게 발견한 암이라 의사의 말대로라면 최대 2년 정도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미국 내 최고 권위자의 말이니 오진이나 기적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스티브 케인의 아내, 로라 케인은 스티브의 마지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생각한 하나는 자서전이고 다른 하나는 초상화였다.
"스티브, 당신의 레거시 (유산)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로라, 난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아."
스티브는 지금까지 누가 자기의 전기를 집필하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냈었다. 하지만 로라의 두 눈을 본 스티브는 더는 반대하기 어려웠다. 로라의 두 눈은 이미 눈물로 그렁그렁했기 때문이다. 한숨을 푹 쉬고 고민하던 스티브는 고개를 들어 로라에게 물었다.
"혹시 생각해 둔 전기 작가가 있어?"
스티브의 승낙에 로라의 안색이 조금은 나아졌다.
"윌터 아이언. 닐스 보어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전기를 쓴 적이 있어. 괜찮은 작가야."
로라가 괜찮다면 꽤 좋은 작가일 것이다.
"만나보고 판단하면 안 될까?"
"그래도 돼."
스티브의 동의를 쉽게 얻기 힘들다는 것을 아는 로라는 바로 두 번째 요구를 했다.
"이번에 초상 화가도 부를까 해."
"초상화는 왜?"
"당신 그림."
"사진으로 충분하지 않아?"
"난 그림으로 남겼으면 좋겠어."
타협하지 않겠다는 로라의 얼굴을 본 스티브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초상화가도 만나보고 결정하지."
스티브의 승낙에 로라는 미리 골라둔 5명의 리스트를 내밀었다.
"허버트 아브람스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 사람이 지미 카터와 조지 H.W 부시 대통령 초상화를 그렸었거든."
"넬슨 생스. 빌 클린턴의 초상화가 이자 영국 여왕, 다이애나 왕세자빈, 마거릿 대처 등을 그렸어."
"시미 녹스. 빌과 힐러리 클린턴의 초상화를 그렸어. 대통령을 그린 최소의 흑인 화가이고."
"왜 넬슨 생스하고 시미 녹스하고 빌 클린턴을 그린 거지? 2명이 그리는 게 가능해?"
스티브가 물었다.
"넬슨 생스는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의뢰한 거고, 시미 녹스는 대통령이 의뢰한 거고. 넬슨의 작품은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걸릴 예정이고, 시미의 작품은 백악관에 거릴 거야. 공식적으로는 시미 목스가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공식 화가가 되었어."
꽤 유명한 얘기지만 스티브는 큰 관심은 없다는 듯 빠르게 곧 네 번째 화가를 소개했다.
"다음은 케힌데 와일리. 앞선 세 명이 클래식한 초상화를 그린다면 컨템포러리하고 클래식한 그림을 섞은 작품을 제작해. 아마도 이 화가가 오바마의 초상화를 그릴 거 같아."
"마지막으로는 태호 권. 케힌데 와일리보다 4살 어려. 같은 학교 출신이고. Faceless 복원 작가로 유명한데, Theo라는 의류회사 사장이기도 해."
"의류회사 사장이 초상화를 그려?"
"본업이 화가래. 그리고 초상화를 정말 잘 그린 데. 의류사업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부업처럼 하는 것 같아. 그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힘들 때 위로도 되어준다고 해. 그림에 어떤 힘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거든. 뉴욕부터 롱아일랜드까지 부유층 사이의 인기가 대단해서 대기가 일 년이 넘어가는데, 내가 누군지 알아보고 빨리 작업해 주겠다고 했어."
"그 태호라는 작가가 당신의 선택인 거야?"
"맞아."
"당신 하자는 대로 할게. 다만 만나보고 아닌 거 같으면 다른 작가를 알아보자."
*
로라는 뉴욕에 거주하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친구들로부터 태호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소수의 친구에게만 공개된 트위터에 초상 화가를 찾는다는 글을 올리자 다양한 의견이 올라왔는데, 그중에서 제일 많이 언급된 건 태호였다.
"초상 화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 최고는 태호 아닌가? 동부에선 더는 이견이 없어."
"그가 그린 빛의 마리아를 보면 다른 화가를 찾을 이유가 없어. 비싸서 그렇지."
"그에게 작품 의뢰를 하면 2백만 달러는 있어야 해. 그 돈만 투자하면 누구든 신데렐라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돈도 문제지만 예약이 너무 많이 찼어. 그 작가 요즘 다른 그림 그린다고 바빠서 많이 그리지도 않아."
"태호 연락처는 이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돼. 여기 링크."
"보통 연락 안 오는데, 로라라면 연락이 올 거야."
*
로라가 Theo의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놀랐던 것은 웹사이트에 아무 연락처도 없이 메모만 남길 수 있었던 점이다. 메모도 전화번호와 이름, 간단한 프로파일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 다였다. 길게 써봐야 읽지도 않을 테니 정말 간단히 적었다.
'로라 케인, 123-456-7890, 스티브 케인의 아내.'
글을 남긴 시간이 캘리포니아 기준으로 밤 11시였는데 아침 9시에 맞춰 전화가 왔다.
"로라 케인입니다."
"Theo의 영업 담당 이사 사라 웨인 입니다. 로라 케인이십니까?"
사라는 Theo의 초상화 영업을 위해 고용된 VIP 담당 스페셜리스트였다.
"맞습니다."
"어젯밤 남겨주신 메모를 보고 연락을 드립니다. 잠시 시간 되시면 10분 정도만 얘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사라는 로라에게 의상을 만들고 초상화를 그리기까지의 절차를 차분히 소개했다.
"저희는 보통 고객을 저희 의상실로 초대합니다. 이곳에서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는 이곳에서 작업하는 게 저희로서는 매우 효율적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아는 고객님은···."
"여기서 비행기를 보내죠."
로라는 사라의 말을 끊고 선뜻 비행기를 보내겠다고 했다. 뒷얘기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 번호로 내 비서가 연락을 줄 겁니다. 일정은 메리하고 얘기해요. 빨리만 부탁합니다. 제 상황을 아실 테니."
*
며칠 동안 제마랑 멕시코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파블로의 결혼식이 멕시코시티에서 있었다. 몇 달에 한 번은 통화하기에 결혼식 준비에 신경 쓸 것이 많아 힘들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막상 가보니 상상 초월이었다.
멕시코 뉴스에 날 정도로 규모도 컸고 모인 사람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멕시코에서 힘 있거나 유명하다는 사람들은 다 모인 듯했다. 제마는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었고, 태호는 부담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멕시코에서 돌아온 태호를 보자 사라는 가뜩이나 빠른 말투에 총이라도 달았는지 정신없이 쏘아 대며 누구에게 연락이 왔는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로라 케인? 혹시 내가 아는 그 케인인가? 스티브 케인의 아내?"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케인인데 모르면 안 되지."
"언제 와 달래?"
"가능한 한 빨리 와 달라고 해."
"스티브 케인은 괜찮나?"
"안 괜찮으니까 빨리 와 달라는 거 아닐까?"
"난 잘 모르는데···. 그 사람 성격 안 좋다며? 성격 최악이라고 들었는데···. 지금도 그런가?"
태호는 스티브를 만나러 가기 전 그를 조사했다. 인터넷에는 그에 대한 자료로 넘쳐났다.
사기꾼에 통제광 (Control Freak)이라는 평가부터 마케팅의 귀재에 시대의 아이콘까지 다양했다.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말을 종합해 보면 22살에 세계 최초로 퍼스널 컴퓨터를 판 사람이다. 컴퓨터 교과서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화려한 복귀. 인생 전체가 한 편의 영화 같았다. 태호가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태호와 공통점도 많았다. 특히 성격이 비슷했다. 아마 만나면 동족 혐오를 강하게 느낄 듯했다. 스티브의 특이점 중 하나는 신비주의에 대한 탐닉이었는데 태호는 이 부분을 눈여겨봤다.
자기 제품을 안 쓰면 그 성격에 삐질 듯해서 핸드폰도 하나 더 준비했다. 유어폰이 아닌 오성폰을 쓰는 태호는 컴퓨터도 맥 (Mac)과 윈도우 (Windows) 운영체제 (OS)를 다 썼다. 그냥 있길래 쓰는 거지 제품에 대한 호불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태호는 이제 고객의 취향까지 조사해 기분을 맞추기 위해 핸드폰을 바꿀 정도로 사업에 적응했다.
*
태호는 로라에게 전화했다. 의뢰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와도 남편을 설득하기 어려울지 몰라요. 워낙 자기 고집이 있는 사람이니까.
나중에 와보면 알겠지만, 우리 집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소파를 들이는 데 8년이 걸렸어요. 집에 무언가를 들이는 건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에요. 그 물건이 왜 있어야 하는지 받아들이는데 걸리는 시간이죠.
난 그 터틀넥 말고 정상적인 멋진 옷을 입고 사진도 찍고, 가족들이 담긴 그림도 집에 걸고 싶어요. 남편을 설득해 주실 수 있을까요?"
로라의 고민을 듣고 이틀을 고민한 태호는 머릿속이 정리되자 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담, 로라. 알겠어요. 제 방식대로 스티브를 설득해 보겠어요. 다만 설득 방법이 좀 엉뚱해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주고 동의해줘요. 많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어요."
준비를 마친 태호는 로라가 보낸 전용기 편에 캘리포니아 알토에 있는 케인 부부의 집으로 향했다.
*
알토로 출발하기 전, 사라는 태호에게 이번 방문의 의미에 대해 누누이 강조했다. 사라는 Theo의 마켓 전략을 책임지고 있기도 했다.
"태호, 너 성격 있는 거 아는데 스티브 앞에서는 철저히 성격 죽여야 해. 아무리 스티브가 아프지만, 널 보면 분명히 본 성격 다 드러낼 거야. 이건 마치 동족 혐오 같은 거라고."
동족 혐오라는 말에 태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케인 부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네가 스티브의 초상화를 그리고 그 초상화가 스티브의 모든 활동에 쓰여야 해. 그게 자서전 표지던, 장례식이던. 스티브의 다음 프레젠테이션에는 Theo 옷도 입고 나오게 하자고.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야. 방송 탈 만한 일이 있으면 우리 옷을 입고 나오게 해야 한다고."
사라가 강조하지 않아도 이번 만남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현재 Theo가 가진 문제는 세 가지인데, 하나는 고객이 미국 동부에 집중되어 것이다.
초상화에 관심이 있는 보수적인 지역이라 장사가 더 잘되는 측면이 있지만, 지금의 고객 분포는 개선이 필요했다.
두 번째는 남성 고객의 확보다. 여성 그것도 노년층에 현재 고객이 집중되어 있다. 초상화이기 때문에 몰리는 측면도 있지만, 지금은 한쪽으로 너무 쏠려 있다.
세 번째는 초상화가의 확보다. 이 문제가 가장 태호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태호처럼 그림을 그려줄 초상화가를 찾아야 했는데 이는 절대로 흔한 게 아니었다. 아마도 중견급 이상의 작가를 찾아내고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야 할 일이었다.
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해 줄 사람이 바로 스티브 케인이었다. 스티브가 방송에 나올 때 Theo 브랜드 옷도 같이 화면에 담아 준다면 이보다 좋은 홍보가 없었다.
*
스티브는 살이 조금 빠져있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괜찮았다.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조금 더 가족과 함께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 회사에 병가를 낸 것처럼 보였다.
초상화가가 의뢰인을 만나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라포르 (rapport, 상호신뢰)를 형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해서 여기서 파악한 의뢰인의 성향이 모두 그림에 드러난다. 이런 라포르 형성 과정이 없이 그려진 그림은 사진보다 못하며, 이는 마치 어둠에서 사진을 찍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태호에겐 누구보다 어려운 작업이 이 작업이 되리라 생각했다.
태호를 처음 본 스티브의 표정은 시큰둥 그 자체였다. 로라의 부탁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내켜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겼다.
아쉬운 건 태호였기에 차분히 앉아서 자신을 소개했다. 가지고 온 도록을 꺼내 케인 부부에게 건넨 후,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했다.
얼마 후, 조금은 태호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림 자체를 그리기 싫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스티브, 초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자네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나도 Faceless의 원작자를 이렇게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인지도 알고 있고. 다만 난 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몇 시간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참지 못할 것 같아."
"아, 그런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모델을 두고 몇 날 며칠을 작업하는 건 컬러 사진이 발명되기 전이라고요. 요즘처럼 디지털카메라가 잘 나와서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한 시대에, 바쁜 의뢰인의 시간을 뺏는 그런 구식 방법을 취하지 않는답니다. 이 시대에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 중에 한가한 사람은 없어요."
한참을 케인 부부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가방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들렸고, 스티브는 얼른 받든지 끄든지 해달라는 눈치를 줬다.
유심도 비행기에서 바꾸지 않았고, 자신이 왜 핸드폰을 두 개나 가져왔는지 순간 잊어버린 태호는 전화를 받아 전화 건 사람을 확인하고 전화기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 찰라, 스티브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우리 회사 폰은 왜 안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