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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비엔날레2 (149/181)
  • 베네치아 비엔날레2

    “학장님. 오랜만이에요.”

    태호는 스토를 부른 후 다가가 인사를 했다. 큰 키의 안경을 낀 스토는 말쑥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비엔날레 총감독의 자리가 결코 쉬운 자리는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토 학장은 스트레스와 피곤에 푹 담겼다가 나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오랜만에 보는군.” 스토는 애써 피곤함을 감추고 웃음 띤 표정을 한 채 악수를 청했다.

    태호도 비엔날레 구경 왔다는 얘기를 간략히 하고 제마의 가족을 소개해줬다.

    “이번에 출품한 자네 작품 정말 좋더군. 재활용 플라스틱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은 정말 높이 사네. 자네 같은 사람이 뉴저지 쓰레기 매립장까지 찾아가 트럭 한 대분의 쓰레기를 수집하고 세척해 조각 작품으로 제작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와도 잘 연결되었어. 영상으로 그 모든 걸 담아 상영해 더 좋았다네. 정말 잘해줬어. 덕분에 내가 다른 감독들이나 교수들 앞에서 목에 힘 좀 주고 있지."

    "하하. 만족하셨다니 다행이에요. 학장님은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바쁘세요?"

    태호가 보기에 스토가 향하는 방향이 자기와 같은 것 같아 물었다.

    “자르디니의 미국관에 가려는 길이었네만, 자네가 같이 갈 텐가?”

    “그래요. 우리도 자르디니로 가는 중이었거든요.”

    스토와 태호는 약 10분 정도 걸어 본 전시장과 국가관이 있는 자르디니로 이동했다. 제마 식구가 바로 근처에 있었고, 그 뒤로 이십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뒤따라 오고 있었다. 그들 중 이번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스토를 알아본 사람도 있었는지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사람을 모아 따르는 사람은 더 늘었다.

    비엔날레 총감독은 큐레이터가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지위 같은 것이다. 보통 일 년 반 전에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임명되면 그때부터 전시 주제부터 어떤 작가를 초대할지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로 전 세계를 여행하며 비엔날레 기획 업무에 매진한다. 태호 생각엔 스토가 안식년을 내고 이번 총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을 것 같았다.

    비엔날레의 기본 취지에 따르면 총감독이 낸 주제에 따라 젊은 아티스트들이 신규 창작물을 제작하고 이를 전시해야 한다. 본 전시장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그렇지만, 모든 국가관이나 작가들이 총감독의 전시 주제에 따라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예술 올림픽 같은 비엔날레에서는 기본적으로 국가 간 경쟁이라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비엔날레의 주제와 전통과는 상관없이 국가에서 자신의 앞선 문화 수준을 드러내고자 골몰하고 또 이를 전시회에 반영한다.

    예를 들면 비엔날레는 컨템포러리 아트를 전시하는 게 주목적이기에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추모전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난 비엔날레 때 96년 타계한 시각 예술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추모전을 미국관에서 버젓이 열어버렸다.

    올해도 미국관의 이런 제멋대로 튀는 행동 혹은 자신의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비엔날레와 따로는 노는 행보는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인이 총감독이기에 조금 다를까 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덕분에 자본주의의 총아이자 이번 비엔날레 주제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제프 쿤의 작품이 미국관에 버젓이 전시되고 있었다. 태호는 이걸 보면서 올해 주제인 '세상을 만들자'와 이 실버 토끼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한참을 애썼지만 잘 안 되었다.

    빛의 마리아도 제프 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상업성에 매몰되다시피 한 작품이긴 하지만 자신은 욕을 안 먹기 위해 뉴저지의 쓰레기 매립장을 뒤진 기행을 선보였다.

    스토의 표정에서 미국관이 이렇게 운영되는 것에 대해 썩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태호의 작품은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게 있다는 듯 태호를 보며 말했다.

    "참, 작년에 전시되었던 행복 시리즈 중에 학교 졸업식 장면이 담긴 그림이 있었는데. 아직 팔렸다는 얘기는 못 들었네. 학교에 기증 안 할 텐가? 그렇게 하나둘 기증하다 보면 나중에 학교에서 자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줄걸세. 어떤가?"

    명예박사 학위를 바로 주는 것도 아니고 몇 점 더 기부해야 준다는 말에 태호는 질려버렸다.

    "저 학교에 기부한 그림 여러 점인데. 그냥 주시면 안 될까요?"

    "흠···. 내 학교에 건의는 하겠네. 그래도 학교 졸업식 그림은 학교에 전시했으면 좋겠어."

    비엔날레 총감독을 하면서도 이 바쁜 와중에 태호를 붙잡고 그림을 달라는 스토의 정신력 혹은 기억력 혹은 집념에 태호는 질려버렸다. 명예박사 학위를 준다면 가능하다는 말을 던지고 서둘러 미국관을 빠져나왔다. 태호를 따라왔던 관람객들은 미국관 내 태호 작품 근처에 잔뜩 몰려 있었다. 태호가 급히 이동했음에도 이를 놓친 듯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

    미국관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일행을 이끌고 다른 전시관으로 급히 향하자 제마가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 나왔어? 미국관도 제대로 다 못 본 거 같은데."

    제마의 말에 태호는 쓴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스토 학장님 옆에 있으면 가만히 있다가 작품을 빼앗길 거 같아. 옆에서 조곤조곤 그림 달라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셔. 무슨 맡겨둔 그림 받으러 온 사람 같다니까."

    태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 좋은 날씨에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제마네 식구를 이끌고 다른 국가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괜찮은 작품이 있다면 기꺼이 구매할 생각이었지만 지금까지 봐온 작품들 덩치가 너무 커서 쉽지는 않아 보였다.

    *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는 토마스 사라세노의 ‘거미줄 가닥을 따라 물방울처럼 필라멘트를 따라 형성되는 은하’라는 긴 이름을 가진 작품을 구경한 뒤 쇠창살로 가득해 마치 감옥을 걷는 듯한 프랑스 국가관을 지나쳤다. 그곳에는 막 리노베이션을 끝내고 새로 오픈한 러시아관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것 같은 은빛 구슬이 잔뜩 걸려있는 방을 볼 수 있었다.

    노르웨이관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많이 끌었던 작품은 국가관 앞에 설치된 조그만 수영장에 죽은 채 떠 있는 남자를 표현한 설치 예술품으로 이름은 컬렉터의 죽음이었다.

    자르디니에 있는 모든 국가관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은 Padiglione Centrale (센트럴 파블리온)이고 여기에서 관객에게 제일 큰 호응을 받는 작품의 작가는 나탈리 뒤르버그였다.

    그녀는 도자기 인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을 상영했는데 외계인이 한 여자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괴롭히는 장면이 포함된 심히 난해한 애니메이션이었다.

    그 뒤로는 마찬가지로 그녀가 만든 기괴한 꽃과 나무들을 도자기로 제작한 조형물 (실험, Experiment)들이 자리 잡고 있어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한껏 띄워 올렸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제일 불만 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언젠가 본 것 같은 장면이 많았기에 태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토비아스 레베르거가 디자인한 카페테리아는 피카소의 큐비즘과 쿠오미의 물방울을 거울과 다양한 패턴으로 표현한 듯했는데 나탈리 뒤르버그의 작품만큼 인기가 있었다.

    미국관에서 봤던 브루스 나우만의 토폴러지 가든은 지금까지 그가 제작해온 작품을 다시 한번 모아서 전시한 것이었기에 아무런 새로움이 없었고, 굳이 늘 보던 작품들을 왜 비엔날레까지 다시 들고 왔는지 태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

    국가관 관람을 마친 네 사람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오늘 5시간을 넘는 관람으로 네 사람은 거의 녹초가 되어 버렸다.

    “오늘 본 작품들을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는 건가요?” 앨리스가 궁금해하며 물어봤다.

    “작품들이 어렵고 집에 설치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데?” 평소와 다르게 마틴도 궁금한 게 있는지 태호에게 물었다.

    “집에 걸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미술관이 좋아할 만한 작품들이 많아요. 일본관의 미와 야나기의 사진들도 그랬고요.” 태호가 대답했다.

    "솔직히 오늘 본 작품 중에 네 것만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다른 건 전혀 구매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던데?" 제마가 태호에게 물었다.

    그 말에 엘리스와 마틴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혹시 이번에 제작한 조각은 팔릴 거 같아?" 제마가 물었다.

    "아직 연락 받은 게···. 잠시만."

    태호는 핸드폰을 열어보니 부재중 통화가 2통은 와 있었다. 윌슨의 전화였기에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세 조각상 합쳐서 5백만 달러. 6백만 달러까지 가능함.'

    문자를 확인한 태호는 바로 윌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구경은 잘하고 있는가?"

    "그럭저럭요. 재밌는 작품은 많지만 살만한 작품은 잘 안 보이고, '사볼까?' 마음먹어도 실제 손이 가기 쉽지 않더라고요. 설치 예술은 그래서 어려운 거 같아요."

    "그건 자네가 미술관이 없어서 그래. 개인 미술관이 있으면 그곳에서 보는 작품들이 훨씬 더 와 닿을 거야. 그림만 있어서는 미술관을 채울 수가 없거든. 재미도 없고. 미술관에서 실제 관객들에게 더 와 닿는 건 조각이나 지금 비엔날레에서 볼 수 있는 설치 작품들이니까."

    "그런 거 같아요. 여기가 살만한 작품은 눈에 안 들어와도 재밌는 작품들은 많으니까요."

    "요새 왜 제프 쿤이나 데미안 허스트가 상한가를 치는지 알겠지? 아, 말이 헛나왔군. 데미안 허스트는 못 들은 거로 하세. 그놈만 생각하면 지금도 열 받으니까."

    태호도 데미안 허스트가 벌인 일을 전해 듣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못 다물었다.

    "아무튼, 지금 자네 조각상에 5백만 달러라는 가격이 붙었어. 조금만 지나면 6백 달려고 가능하고."

    "팔자고는 얘기를 안 하시네요?"

    "그 가격에 팔기는 아까우니까. 이 작품이 가진 상징성을 생각하면 5백만 달러로는 부족해. 자네 최초의 조각상인 데다가 재료도 직접 수집했고 비엔날레 출품작이기도 하지. 어떻게 스토리 라인을 세우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작품들은 어떻게 봐도 자네의 최초 조각 작품이지. 그 말은 들고 있으면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거지. 자네가 조작으로 전업을 해도 그렇고 안 해도 그렇고. 그래서 5백만은 아니야."

    윌슨은 5백만 달러로는 팔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해서 얘기했다.

    "그럼 천천히 파세요. 어차피 5개월인가 6개월 동안 전시해야 하는 작품 아닌가요?"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시는 오래 하지만 그림을 실제 구매할 수 있는 VIP들은 이미 자네 작품을 다 보고 갔어. 너무 늦게 팔리면 수상하게 생각할걸세. 적어도 일주일 안에 이미 판매되었다는 'Sold Out' 꼬리표를 달아야 할 거야."

    "윌슨 씨가 알아서 팔아주세요. 5백만 불이던 6백만 불이던 잘 판단해 주실 거잖아요?"

    태호는 웃으며 말했다.

    "이틀 뒤에 있을 시상식은 보고 팔아야지. 미국관이 뭐라도 상을 받으면 아마 자네 덕분일 거야. 비엔날레에 제프 쿤이라니. 뭔가 맞지 않아."

    호텔로 돌아와 하루 쉰 뒤 본 전시장까지 다 둘러본 후 태호와 제마네 식구들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이번 비엔날레 수상자 발표가 있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작가에 대한 시상과 국가관에 대한 시상을 따로 한다. 대상에 해당하는 황금 사자상이 있고 35세 이하 젊은 작가에게 주는 은사자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구성을 선보인 국가관에 주어지는 특별 언급상이 있는데 미국관이 특별 언급상을 수상했다. 브루스 나우만 작품과 태호 작품 덕분이라는 해석이 뒤를 이었다.

    수상 소식에 힘입어 태호의 작품은 결국 6백만 불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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