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비엔날레1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국제예술전시회로 1895년 이후 해마다 열렸다. 짝수 해는 건축 전시회가 있으며 홀수 해는 예술 전시회가 개최된다.
크게 두 개의 전시실이 있다. 하나는 본 전시인 아르세날레와 국가관별 전시실이 있다. 문화예술위원회는 태호에게 미국 국가관에 작품을 전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태호가 기대한 것은 비엔날레 총감독의 초청이었기에 국가관 전시를 제안받자 고민에 빠졌다.
"뭘 고민하나? 여유가 있으면 하게. 국가관도 수상 대상이라네."
"그것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설치 작품이 강세라 굳이 그림을 출품해야 하나 해서요. 이번 비엔날레 주제와 제 작품이 맞는지도 모르겠고요."
"주제가 뭔가?"
"세상을 만들자 (Making Worlds)에요."
"뭘 하라는 건지 감도 안 오는군."
"총감독의 얘기는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완성작보다는 창조와 교육의 현장에 더 가까운 전시회를 원한다고 하네요."
"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완성한 작품이 돈이 안 될 것 같다는 건 알겠어."
"하하.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으려고요."
"그래. 어떤 작품을 제작할지 결정하면 알려주게. 내가 위원회에 접촉해서 배송 방법 등은 알아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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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학장이자 이번 비엔날레 총감독인 스토가 제시한 주제에 맞는 새로운 작품을 고려했는데 평소 자신의 작품세계와 동떨어진 작품이 나올 듯해 포기했다. 대신 다른 접근 방식을 택했다.
태호는 빛의 마리아를 조각으로 제작할 결심을 한 후 제작 업체와 접촉했다. 세 작품을 구성했는데 크기는 1m에 남짓했으며, 업체와 상의해 조각을 구성하는 플라스틱을 모두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선택했다.
"우리 이렇게까지 해서 작품 제작해야 하냐?"
태호는 제이크를 이끌고 뉴저지의 쓰레기 매립장에 왔다. 뉴욕의 쓰레기 매립지는 진작에 폐쇄되어 뉴욕은 오래전부터 쓰레기를 타주로 반출하고 있었다.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비엔날레에 출품하지. 아니면 아트페어에 출품하는 거와 뭐가 달라?"
두 사람은 돌아다니며 조각상의 재료가 될 PE 과 PET 등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을 수거, 씻은 후 조각상 제작 업체에 넘겼다. 트럭으로 한 대분은 될 양을 수집했는데 이 모든 과정을 영상 녹화 및 편집 전문 업체가 찍어갔다. 영상으로 만들어져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별도 모니터를 통해 상영할 계획이다.
이렇게 모은 플라스틱으로 제작할 작품은 다양한 색으로 구성될 계획이었다. 한 작품은 투명 플라스틱, 한 작품은 황금빛 플라스틱, 마지막 작품은 여러 색의 플라스틱으로 제작하기로 했다.
마지막 작품의 경우 옷과 피부는 흰색, 머리카락은 황금색 플라스틱이 사용되었다. 바람에 날리는 매우 동적인 모습에 제작 자체도 까다로웠고 이동 역시 까다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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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스테인리스로 제작하지 그래?"
윌슨이 제작 전 도안을 보고 물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반응이 좋으면 그렇게 하려고요."
"반응은 당연히 좋겠지. 최종 작품을 봐야 알겠지만, 도안만으로 갖고 싶은걸."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겠어요. 잘 나와야 할 텐데."
"잘 나올 거야. 그리고 안 나오면 어떤가? 이걸 프로토타입 삼아 다음 작품을 만들면 되지."
"말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빛의 마리아만 우려먹는 듯해서."
윌슨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다.
"자네도 알잖아. 한 주제로 평생 그리기도 한다는 걸. 세상에 자네만큼 주제를 자주 바꾸는 작가가 어디에 있다고."
"그래도 대표작은 빛의 마리아잖아요. 그것도 저의 오리지널도 아니고."
"자네 아직 20대야. 자네 나이에 자기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이고. 그거 아나? 자네 나이에 이미 대표작이 있는 경우는 딱 한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자네만큼 유명했군. 누군지 아나?"
"아니요."
"장미셸 바스키아. 자네가 이룬 건 20대에 죽어야 가능한 경지라고. 난 바스키아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지금 같은 인기를 누렸을 거라고, 자네만큼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을 거로 생각하지도 않아."
젊은 나이에 큰 성취를 이뤘다고 말하는 윌슨의 의도를 태호도 바로 알아챘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위로해줘서."
"조바심 갖지 말게. 예술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고 평생을 걸쳐 이뤄야 하는 마라톤이자 인생 그 자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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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의뢰한 세 조각상은 비엔날레가 개막되기 한 달 전인 5월에 완성되어 문화예술위원회에 전달되었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국관에 설치되었다.
태호는 마틴의 비행기 편으로 베네치아로 향했다. 마틴, 앨리스, 제마, 태호 등 4명을 태운 비행기는 6월 6일 토요일 아침에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비엔날레 개막 하루 전이지만 전시는 시작되었고 도시는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일행은 곧 숙소인 Gritti Palace 호텔로 이동했다. 베네치아 카날 그란데가 보이는 이 호텔은 귀족의 저택을 호텔로 복원한 곳으로, 베네치아 스카이라인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보이는 곳에 있다.
태호가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푼 다음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를 풀기 위해 잠시 쉬다가 곧 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배를 타기 위해 호텔 근처 선착장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웰컴 드링크로 나온 프로세코 복숭아 퓌레 칵테일을 한잔하니 정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났다.
날씨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는데 약간 습한 것과 한낮에는 햇볕이 좀 따갑다는 걸 제외하면 정말 좋은 날씨였다. 가끔 비가 쏟아지기도 해 우산을 필수로 챙겨야 하지만, 지금 보기엔 오늘은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선착장에서 본 전시인 아르세날레를 가기 위해 아르세날레 선착장까지 이동한 다음 거기부터는 걸어서 이동했다. 선착장으로 접안하는 많은 배는 사람들을 토해내듯 쏟아냈기에 지체할 틈이 없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주위에는 지난 시즌 패션쇼에서 소개된 샤넬, 루이뷔통, 에르메스 신상 가방을 든 사람들부터 견학을 나온 교복 입은 초등학생들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북적거렸다.
아르세날레을 영어로 표현하면 아스널. 영국 EPL 프로 축구팀 이름에 아스널이 있는 것처럼 아르세날레는 과거 베네치아의 조선소이자 병기창이었다.
지금은 전시장으로 쓰이는 이 건물은 산업 혁명 이전까지 유럽 최대 규모의 산업 시설이었으며 길이는 500m가 넘고 면적은 7천 평이 넘는다.
공간이 넓은 만큼 안에 전시된 작품들 수도 많았기에 제대로 보려면 반나절은 걸린다. 다행히 건물 구조가 간단했기에 입구로 들어가 출구로 나오면 놓치는 작품 없이 모든 작품을 다 관람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미술관과 아트 바젤과 다른 점은 바로 지금 생존해 있는 작가의 가장 최신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작가는 총감독의 기획 의도에 맞춰 새로운 작품을 제작해 출시한다.
아트 바젤에서도 최신 작품을 만날 수 있지만 아트 바젤이 갤러리가 주축이 된 상업적 목적의 전시회라면 비엔날레는 예술세계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세계의 올림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르디니에 있는 국가관 때문이다. 아르세날레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자르디니 공원에는 다양한 국가관들이 있는데 각 국가에서 인정받은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비엔날레 기간 베네치아 곳곳에서 비엔날레 공식 이벤트가 벌어지며, 그 외 비엔날레의 공식 행사는 아니지만 방문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전시회 등이 있어 방문객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만큼 관광객 수가 어마어마했는데 이것 때문에 비엔날레 주최 측은 기자와 VIP에 별도 패스를 발급했다. 윌슨을 통해 태호도 VIP 패스를 받았지만, VIP 행사는 이미 수요일에 진행되었다.
태호도 시간이 맞았다면 수요일에 도착해 VIP행사를 통해 그림을 구매했겠지만 뉴욕에서의 일정상 도저히 시간이 안 되어 오늘 도착한 것이다. 제마와 손을 잡고 두어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 보니 몇 년 전 아트 바젤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것 같은 사람들도 눈에 하나둘 띄기 시작했다. 아르세날레 전시관 근처에 있는 가림막이 있는 테이블을 겨우 잡아 앉았고 바로 샴페인을 주문했다.
"마틴, 앨리스, 마음에 드는 작품 있어요?"
"흥미로운 작품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대부분 설치 예술품이라 집에 옮겨놓기가 좋지는 않아. 궁금한 게 여기 전시된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건가?" 앨리스가 물어봤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윌슨에게 물어봤어요. 여기에 작품을 낼 정도의 작가라면 이미 거래하는 딜러가 있고요. 딜러가 있으면 거래는 어떻게 되었든지 가능하다고 하네요. 작품 옆에 딜러가 대기하고 있기도 하고요.
일부 국가관은 거래를 허용하지 않기도 하지만 어떤 국가관은 수수료를 떼어가기도 해요. 웃기죠? 비엔날레는 국가 간 경쟁의 의미도 있어서 국가에서 다양한 비용을 부담하는데 정작 딜러들은 작품을 아트페어에서 작품 팔 듯 거래를 하고 있으니까요.
공공연한 비밀이죠. 우리가 작품을 보는데 딜러가 다가와 설명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의미에요. 작품이 이미 팔렸거나 작품을 팔 의지가 없거나. 보통은 이미 팔렸다고 보는 게 맞죠.”
“특별히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작가가 있나?” 마틴이 물어봤다.
“나탈리 뒤르버그, 토비아스 레베르거, 브루스 나우만이라는 작가가 이번 비엔날레에서 수상이 유력하다고 하던데 세 사람 다 조각가이거나 비디오 아티스트에요. 토비아스 레베르거가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들었는데 가서 봐야 알 것 같아요.”
“태호가 관심 있는 작품들은 뭐가 있어?” 앨리스도 물어봤다.
“사실 여기 작품 건 사람들은 다 자기 나라에서는 굉장히 성공한 작가들이라 작품성만 따지면 뭘 골라도 상관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은데?”
제마가 주위를 살짝 둘러보더니 말했다. 태호를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근처에서 맴도는 게 보였다. 지난번 아트 바젤에서 있었던 일이 재현될 것 같았다. 하지만 태호는 그때 했던 기행을 여기서는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트 바젤과는 다르게 이곳은 공개적으로는 상업성을 최대한 배제한 채 개최되는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올해 주제가 ‘세상을 만들자’ 인데, 우리 주변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그런 욕망이나 열망을 담은 전시회이거든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회화보다는 조각이나 설치 작품이 더 주제를 담아내는데 어울리는 거 같아요. 자르디니로 이동할까요? 그쪽이 더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을 거예요.”
태호를 알아본 주위에 사람이 모이는 듯했지만 태호는 신경 쓰지 않고 일행과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자르디니는 베네치아의 지명으로 카스텔로 자르디니 공원을 의미하며 본 전시장이 이곳에 있었다. 태호는 일행을 이끌고 자르디니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갤러리들을 태호를 따라 이동했다. 태호를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다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통화를 했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태호는 근처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번 비엔날레의 총감독이자 예일대 예술대 학장인 로버트 스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