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크리스티3 (147/181)

크리스티3

행복 시리즈 중 어떤 작품이 인기가 많았는지는 그림 주문량을 통해 또 미술관에서의 관람객 반응을 통해 파악이 끝났다. 대중적인 주제가 많이 팔렸는데, 골든래트리버나 고양이, 날씨, 일광욕 등이 인기가 많았고 졸업식이나 학교의 임시 공휴일 같은 주제는 많이 안 팔렸다.

세상사가 그렇듯 태호의 행복 시리즈를 두 미술관이 구매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빌바오의 제이슨과 모마의 짐이 지속적인 작품 전시를 희망하는 것과 달리 여러 가지 반대 의견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가장 많이 의견은 이미 뉴욕 곳곳에 전시 중인 거의 똑같은 그림을 미술관에서도 이렇게 큰 공간을 차지하며 전시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많이 보러오니까! 작품 전시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대표 그림만을 전시하고 나머지는 창고에 넣던지 다른 미술관에 넘기면 되지만 관람객이 꾸준히 오는 걸 어쩌라는 건가?"

제이슨은 전시 작품의 균형도 물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결국은 관람객이 많이 오냐가 미술관 운영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림을 사서 전시하면 되잖아!"

"그러기엔 너무 비싸."

"이건 어떤가? 빌바오가 가지고 있는 빛의 마리아 중 하나를 팔아서 사면 되지 않을까?"

윌슨은 빌바오가 잔뜩 가지고 있는 빛의 마리아의 한 버전을 욕심냈다. 윌슨의 고객 중 하나가 오랜 기간 빛의 마리아를 손에 넣고자 했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그러면 일이 더 복잡해져."

제이슨은 진심인지 아니면 이것도 행복 시리즈를 전부 손에 넣을 방법의 하나로 생각했는지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딱히 복잡해질 것도 없어. 행복 시리즈 그림 몇 개를 넘길 테니 초기 버전의 빛의 마리아를 우리에게 넘기면 되지. 교환 방식으로. 미술관은 세금도 안 낼걸? 우리는 조금 내겠지만."

"8점 전체를 말하는 거지?"

"농담도 참. 때 쓰는 것만 늘었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고, 미술관에서 왜 그림을 안 파는지 잘 알잖아. 뭘 빼든지 간에 말이 나올 거야."

"복잡하게 하지 말자고. 계약 종료를 핑계 삼아 내가 회수해 간 후에 미술관에서 몇 점 사가면 되지 않겠나?"

"못 잡으면 못 잡았다고 난리니 그렇지."

"그래도 나은 방법이 없잖아."

"흠. 일단 내부에 얘기해 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시간이 얼마 없어. 계약 기간 얼마 남지 않았다고."

*

모마도 행복 시리즈 전시로 재미를 봤지만 빌바오와는 다른 접근 방법을 취했다. 행복 시리즈와 우울 시리즈 한 작품만 구매하고 나머지는 모두 윌슨에게 돌려보냈다. 구매한 두 작품은 모두 두 시리즈의 대표작품이라 할 만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계약 기간 끝나서 돌려주는 건데 뭘 그러는가? 우리야말로 그림을 적절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어서 괜찮았어. 그저 우리가 부탁한 것만 잊지 말게."

"한꺼번에 판매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시지요?"

"급하게 팔아서 가격만 떨어뜨려 주지 말게."

"알겠습니다. 혹시 이런 결정을 내리신 배경이 있으십니까?"

윌슨의 질문에 짐은 순간 한숨을 쉬었다.

"돈 문제 아니겠는가? 전시 공간도 부족하고. 또 우리 이사진 중에 태호 작가 팬이 많이 없어."

"그게 다가 아닌 듯합니다만?"

짐은 그냥 사실대로 미술관 내 공유되는 의견을 알려줬다.

"이사진 중 몇몇은 조수와 작업하는 걸 썩 좋지 않게 본다네."

"혹시 얼마 전 런던 소더비에서 있었던 데미안 허스트 단독 경매 때문입니까?"

"... 그렇지."

"심하긴 했습니다. 한 자리에서 200점이 넘는 그림을 팔아버리다니."

얼마 전 런던 소더비에서 열린 데미안 허스트 단독 경매에서 전체 작품 223점에서 5점 빼고 모두 다 거래되는 기염을 통했다. 거래 금액도 역대급으로 1억 1천 파운드 (원화로 2천2백억)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워낙에 작품수도 많았고 비슷비슷한 작품이 한꺼번에 경매로 나와 그의 기존 작품가도 폭락시켰다. 많은 사람이 그가 과거의 유명세를 다시는 누릴 수 없다고 결론지을 정도였다. 이번 경매는 자신의 명성과 돈을 맞바꾼 최악의 거래 방식이었다.

만약 223점의 작품을 작가가 다 손수 제작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였고, 223점의 작품 중 작가가 어디까지 제작에 참여했는지조차 불확실했다. 생존 작가 작품 거래에 대한 회의론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걸 보고 경악한 이사진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허스트 작품도 진작에 팔았어야 했다며 이를 갈고 있지."

"이해는 합니다만, 태호와 직접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맞아. 둘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 아무튼, 허스트 작품에 대한 평도 혹평 일색이야. 자네 그 청동상 봤는가? 누군가 그러더군. 중국에서 열린 '인체의 신비전'을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듯하다고."

목소리밖에 안 들리지만, 윌슨은 짐의 어이없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청동상이라는 말에 윌슨도 그 어처구니없는 조각상이 생각나 인상을 찡그렸다.

"썩은 사과 하나가 전체를 망치는 법이지요."

"그렇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시장 분위기가 좋지는 않으니 경매는 천천히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네."

"영국이라 괜찮을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좋은 작품 나오면 먼저 소개해주게."

얼마 후.

빌바오는 행복 시리즈 2점과 우울 시리즈 1점을 구매하고 나머지는 모두 윌슨에게 반환했다. 모마와 비슷한 사유였다.

*

영화 Faceless가 개봉된 다음 해 1월.

태호가 한창 작업실에서 행복 시리즈 제작에 열을 올릴 때였다.

마크에게 전화가 왔다.

"축하해. 영화 Faceless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네."

"아카데미?"

태호는 Faceless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정신없이 바빴기에 무슨 얘기인지 깨닫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 그렇구나. 몇 부문 후보에 올랐어?"

"9개던데?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각색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의상상, 음악상. 이렇게."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부문의 후보 선정에 태호는 얼떨떨했다.

"발표가 언제죠? 2월 24일이었나?"

"그럴걸? 너 이번에 뭐 입고 갈 거야?"

"그거야···."

"내 옷 안 입고 가면 절교다. 그리 알아?"

"하지만 마크. 나도 브랜드 사장이에요!"

"너도 루이뷔통 디자이너야. 루이뷔통 안 입고 가면 아르노한테 이를 테니까 그리 알아."

"쳇. 루이뷔통이나 Theo나 같은 LVMH 그룹 밑의 브랜든데."

"모르겠고. 내가 준비한 루이뷔통 옷을 입고 간다고 하고 있을게. 제마는?"

"제마도···. 마크가 골라줘야죠. 거기 모델이기도 한데."

태호는 이번엔 자신이 양보해 마크의 옷을 입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네가 그래도 생각은 하는구나. 둘 다 시간 내서 사무실에 와. 나도 지금 뉴욕에 있으니까 두 사람 옷 골라줄 시간은 있어."

"알았어요."

*

2월 24일, 할리우드 코닥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태호도 초대받아 제마와 함께 엘에이로 향했다.

마크가 최선을 다해 제작한 의상을 입은 제마는 눈이 부셨다.

그리스 여신을 연상시키는 한쪽 어깨끈만 있는 장밋빛 가운을 입었는데 왼쪽 어깨끈에서 시작된 장미 장식이 왼쪽 가슴으로 흘러내려 와 오른쪽 젖가슴 밑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에서 제마가 가운 이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탈의실 밖을 나섰을 때 유두가 그대로 비춰 태호를 기함하게 했다. 결국, 태호가 난리를 쳐 결국 패드를 덧대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제마는 여성미가 한껏 드러낸 아름다운 의상에 만족감을 표하며 레드카펫을 리드미컬하게 걸었다.

반대로 태호는 좀 타이트하다가 느낄 정도로 꽉 낀 정장이었지만 슈트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는 디자인이었다. 태호는 차라리 디테일이 확실히 살아있는 작년에 크리스천이 제작해준 정장이 나았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제마와 함께 시상식 포토 라인에 섰다.

이날 사진에서 너무나도 행복하게 웃는 제마의 모습은 영화팬들이 뽑은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었다.

"And the Oscar goes to... Faceless!"

이날 시상식에서 영화 Faceless는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시각효과상 등 4부문에서 수상했다. 시각효과상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황금나침반을 제치고 수상을 하였는데 영화 관계자뿐만 아니라 영화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수상이 태호 그림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는 미술감독인 아담 리차드의 수상 소감에서도 잘 나타났다.

“오늘, 이 상을 받게 되기까지 엄청난 도움을 준 안톤 밀즈 감독과 촬영 스태프들 그리고 미술팀에서 같이 고생한 팀원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가 이번 작품 Faceless를 촬영할 때의 목표는 영화 전체를 아름다운 유화처럼 찍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으로 우리들의 노력이 성과가 있었음을 증명하게 되어 더없이 기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의 아름다운 수많은 장면이 누구의 노력으로 탄생하였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영광을 있게 해준 태호에게 다시 감사합니다.”

태호 옆의 사람들이 아담 리차드의 수상 소감에 동감하듯 환호를 보냈고 카메라도 태호와 옆에 있는 제마를 줌인해서 보여주자 태호도 일어서서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주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로 꼽는 장면이자 영화의 마지막인 장면인 Faceless를 그리는 장면에서 태호와 그의 스태프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여 작품을 제작했는지 다시 하면 상기시켰고 여우조연상을 받은 나탈리도 살롱에서의 촬영 장면을 자신이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봤던 가장 아름다웠던 장소라고 소개하며 태호를 추켜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본상 수상 소감에서 감독과 작가인 휴고 디아즈가 올라와 태호가 그토록 기다렸던 수상 소감을 말했다.

“지금까지 Faceless로 수상할 때마다 미술감독과 두 배우 역시 저쪽에 앉아 있는 태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카메라는 다시 태호의 얼굴을 비추었고 태호는 짐짓 부끄러운 듯 점잖은 체를 하고 있었다.

“많은 영화가 그렇듯 Faceless도 원작 소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소설의 작가가 누군지 모르시는 분들도 아직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말이 나가자 태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영화에 필요한 그림뿐만 아니라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태호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다시 ‘와’ 하는 소리가 들렸고 태호는 다시 일어서서 주위에 인사를 건넸다.

시상식이 끝난 후 작품상을 받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감독보다 더 많은 환호를 태호가 가져갔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기사가 올라왔을 정도였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태호가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부수적으로 그의 소설 판매량은 다시 껑충 뛰어올랐다.

태호의 시나리오가 매력적이었던 점은 태호가 이미 시나리오에 적힌 중요한 그림 소품들을 이미 제작을 완료했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그 그림들은 명화의 반열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미술 관계자들로부터 받기 시작했다.

태호의 아카데미 시상식 소식은 뉴욕을 떠들썩하게 만든 행복 시리즈 작품과 더불어 미국의 문화예술위원회 위원들 귀에도 들어갔다. 평소 태호를 눈여겨보던 위원들은 이만하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태호를 비엔날레에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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