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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마법사 (144/181)

뉴욕의 마법사

벽화는 상당히 컸지만,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린 건 아니었다. 벽화를 그리겠다고 작정하고 제일 적합한 시멘트 배합을 적용하고 그에 맞는 페인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색이 무척이나 예뻤다. 물이 새어들지 않게 처음부터 방수도 철저히 했기에 그림은 잘 말랐고 상태도 좋았다.

제마는 태호가 3개월 동안 벽에 매달려 벽화를 그리는 것을 알지만 말리지는 못하고 애만 바싹 태웠다. 거의 매일 같이 작업실로 찾아와서 벽화의 진행상태를 확인하고 태호의 건강을 살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위험한 작업은 하지 말아줘. 지켜보다가 내가 병에 걸릴 것 같아."

"알았어. 나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너무 일이 고단해서 못하겠더라."

제마가 아니어도 태호도 생각이 없었다.

*

태호는 벽화가 완성되자 제이슨을 통해 모든 지인에게 연락했다. 윌슨에게도 연락해 갤러리 고객들도 새로운 벽화가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림막이 치워지고 고소 작업차가 이동하자 아름다운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림의 크기가 상당했기에 다들 길 건너편에서 혹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경했다.

태호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네 사람도 초대되어 태호 옆에 있었다.

"그림은 맘에 드십니까? 벽화가 이전 그림보다 훨씬 예쁘긴 한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전 잘 모르겠습니다."

태호의 말에 사무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그림이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저는 예술에는 문외한이지만 조금 예민한 편이라 이런 건 빨리 느낄 수 있어요."

"맞아요. 벽화이고 페인트로 그린 그림인데도 마치 파스텔로 문질러 표현한 그림 같이 부드럽고 아름다워요."

근처에 있던 기아가 덧붙여 말했다.

"미술관에서 본 그림보다 이 벽화가 더 느낌이 좋네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이건 분명해요. 무척이나 정겹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네요. 정말 원하던 그림이 바로 이런 거였습니다."

리아 옆에서 환하게 웃던 오스틴이 말했고 근처의 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태호에게 끝없이 감사 인사를 전하던 네 사람은 조금 떨어져 그림을 계속해서 쳐다봤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마크도 태호에게 다가왔다.

"지난 석 달 동안 저걸 혼자 그린 거야? 대단하다. 노란색이 이렇게나 예쁜 줄 몰랐는데? 다음 시즌 주제로 딱 맞아. 늦지 않게 와라."

윌슨도 다가와 말했다.

"앞으로 행복 시리즈를 계속 그릴 건가? 평판에 큰 도움이 됐고 주문이 많긴 하지만 큰돈이 되는 건 아니잖아? 위험하기도 하고."

윌슨은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3개월이나 벽에 매달려 작업하는 것을 지켜본 윌슨은 말은 못 했지만, 제마만큼 걱정이 많았다.

"이젠 그만 그리려고요. 여태껏 그릴만큼 그린 것 같아요."

그 말에 윌슨도 한숨 돌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

벽화는 지역 방송에 소개되기 시작하더니 곧 전국 방송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첫 인터뷰를 한 곳은 태호에게 늘 호의적인 기사를 올렸던 뉴욕 타임스의 마크 트레이시였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으로 그림 얘기를 시작했다.

"그림이 무척이나 거대하다. 근래에 본 벽화 중에서도 이만한 대작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런 벽화를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저의 행복 시리즈를 구매하는 고객 중에 우울증을 앓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형편이 되는 분들은 그림을 사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은 미술관을 방문하시는데, 사실 매일 미술관을 방문하기는 힘들다. 그런 분들을 위해 마련한 작품이다."

"원래 있던 그림을 철거하고 벽화를 새로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

태호는 작업실까지 찾아온 네 사람을 언급하며 기존 그림을 내리고 벽화를 새로 그린 계기를 설명했다. 마크는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우울증을 호전시키는 그림이라니 정말 마법 같은 이야기이다. 태호 작가의 그림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우울증 환자들 사이에서 이런 의견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태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플라세보 효과 같은 거다. 만약 진짜 우울증을 경감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확실한 효과가 나타났어야 정상이다. 내가 아는 한 몇몇 환자들이 내 특정 그림에만 반응을 보이는 정도다."

"플라세보라도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지금까지 회화로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태호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 소식이 나가면 더 많은 사람이 태호 작가의 그림을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아는 것처럼 이곳은 장소가 협소해 많은 사람이 그림을 보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다. 혹시 이런 벽화를 더 많은 장소에 그릴 생각이 있는가?"

태호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지만, 고개는 저었다.

"지금 거의 일 년 반이 넘는 기간을 이 시리즈에만 투자하고 있다. 충분히 길게 작업했고 많이 그렸다. 이제는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크는 무슨 생각인지 태호에게 설득 조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마치 태호가 행복 시리즈를 계속해서 그려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는 논조였다.

"태호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고 싶어 하지만 사실 한 예술가가 10년 넘게 한 시리즈만 작업하는 건 흔한 일이다. 평생을 한 종류의 그림에 매몰되는 작가도 많다. 아니, 대부분이다. 태호 작가의 행복 시리즈는 이제 겨우 1~2년밖에 안 되었는데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게 매우 빠른 거다."

"기간은 짧았지만 정말 많이 그렸다. 빛의 마리아도 꽤 그렸지만 그림 수만 놓고 보자면 행복 시리즈에 비교할 수 없다."

"내 생각에 이 기사가 나가면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여러 곳에서 들어올 수 있다. 혹시 이런 요청이 들어와도 거절할 생각인가?"

"지난 3개월간 벽에 매달려 힘들게 한 작업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이런 작업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신 그림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로 이런 그림을 더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

마크는 태호와의 인터뷰에 태호의 작업실을 방문한 네 사람의 인터뷰를 더 했다. 일요일 뉴욕 타임스 한 면을 고스란히 할당해 나간 기사는 태호의 예상보다 훨씬 큰 반향을 일으켰다.

(태호, 뉴욕에 마법을 걸다)

"권태호 작가의 새로운 그림이 브루클린 몬트로즈 애비뉴에 설치되어 화재다."

마크의 기사는 처음부터 태호의 그림이 가진 신비로운 힘과 그에 대한 증언을 서술했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간증 담을 적어 놓은 듯했다.

"극히 일부이긴 하나 행복 시리즈는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어 환우들 사이에서는 기적의 그림으로 칭해지고 있다. 이번의 벽화는 태호 작가의 그림을 구매할 경제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그림으로···."

시작은 그림에 대한 소개와 얽힌 일화를 적어놓은 것으로 시작해 그림이 왜 이렇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지와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서술해 놓았다.

"태호 작가의 작품을 이렇게 제한된 장소에서 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재 설치된 몬트로즈 애비뉴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에 엄청난 교통 체증을 보이며 크고 작은 접촉 사고 때문에 보험사들도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근처에 사는 주민 이안씨는 '훌륭한 그림을 매일 볼 수 있어 좋고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어 상권이 좋아진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교통 체증과 자동차 경적 소음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밝혔다."

실제 점심때는 괜찮지만, 교통량이 많은 출퇴근 시간에는 출퇴근 차량과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멀리 돌아온 차량 때문에 신호등 대기 시간이 점점 늘고 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다 그림을 보고, 그러다 정신이 팔려 출발이 늦어지고, 그래서 뒤차가 밀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신호등이 바뀔 때쯤이 되면 뒤차는 앞차에 미리 경적을 울리기 시작해 소음 공해도 늘어났다.

태호 작가의 작품을 좀 더 넓은 장소에서 편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며 마크는 기사를 마감했다. 이 기사는 마크의 의도대로 그리고 태호는 바라지 않았던 방향으로 여론이 이끌었다.

*

"어이, 뉴욕의 마법사!"

데이비드는 태호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생긴 별명을 알려줬다.

"뭐냐 그게? 무슨 나이트클럽 DJ 이름 같은데?"

"네가 그림에다 마법을 걸었다고 그런 별명이 붙었더라. 내가 보기엔 넌 돈을 그리는 마법을 보이는 것 같다만."

데이비드는 얼마 전 마틴에게 들은 뉴욕시에서 일어나는 뒷얘기를 풀기 시작했다.

"너한테 그림을 그려도 좋다는 허락이 날 것 같더라."

"어디에?"

"여러 장소가 있긴 한데 네가 기대한 센트럴 파크는 아니야."

태호는 바로 데이비드가 잘못 알고 있는 바를 정정해줬다.

"그림 그리면서 너무 고생해서 벽화고 뭐고 작업 안 하려고. 센트럴 파크에 걸어준다고 해도 안 할 거야. 그냥 다른 그림에 집중하려고."

"정말? 지금 맨해튼하고 퀸즈에서도 그림 그려 달라고 할 것 같던데. 조금 지나면 브롱크스하고 리치먼드도 요구할 태세던데?"

"몰라. 안 해. 피곤해. 돈도 좋고 명성도 좋지만, 너무 일이 힘들어서 못 하겠다."

"그러냐? 그럼 접어야지. 그렇게 전달할게."

데이비드를 통해 전달된 의견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던지 다른 제안이 들어왔다.

"뉴욕 5개 자치구 공원에 16개 벽화를 설치해 달라고?"

"임시로 설치하는 게 아니라 영구 전시를 하겠다는데? 이건 특혜다!"

태호는 이 안은 조금 끌렸다. 다만 벽에 매달려 그림을 그리는 건 사양이었다.

"벽화 말고 다른 방식이면 고려해 보겠다고 전해줘."

"어떤 방식인데?"

"작업실에서 작업한 벽화를 그대로 옮겨가 공원에 설치하면 좋겠어. 또 조금 높게 설치해야 할 거 같아. 낙서로 파손될 수 있고 멀리서도 보이는 게 좋으니까. 가능하면 투명한 플라스틱 스크린을 설치해서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좋겠지?"

데이비드는 태호의 말에 머릿속에서 동전이 저금통에서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너 그거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인지 알아?"

"몰라. 알 게 뭐야. 시에서 돈 있으면 하겠지. 아니면 말고."

태호의 비싼 계획은 마틴을 통해 뉴욕시에 전해졌다. 얼마 뒤, 뉴욕시는 공문을 보내 태호를 공청회에 초대했다. 이 계획이 공청회까지 갈 거라고 생각 못 한 태호는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물었다.

"너 회사마다 일정 금액 기부하는 건 알지? 아빠 회사도 이런저런 이유로 기부를 많이 하는데 올해와 내년에 낼 기부금을 이 사업에 돌릴 생각이시더라고."

"혹시 이렇게 해서 회사가 얻는 이익이 뭐야?"

"부동산 회사 뭐 있어? 사람 많이 모이면 상권 형성되고 건물값 오르는 거지. 회사가 소유한 혹은 소유할 부동산 근처 공원에 네 작품을 설치할 계획인 거 같더라. 아직 어디 설치할지 결정 안 되었지만 돈 내는 사람이 아무래도 설치 위치를 결정하는데 영향력을 미치지 않겠어?"

태호는 데이비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건물이나 몇 개 사야겠다. 마틴에게 도와달라고 전해줘."

태호는 은행 대출까지 받아가며 건물을 구매했고 마틴의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태호가 작업을 시작한 이후 공원 근처의 건물 10여 채가 조용히 주인이 바뀌었다.

태호는 붓으로 현금을 그리는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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