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비밀
브루클린 대로변에 있는 태호의 작업실 외벽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어 지나가는 차나 행인의 눈에 쉽게 띄었다. 원래 학교 건물을 사들인 것이라 위치도 좋고 교통도 좋았다.
그 외벽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1층부터 4층까지 커버했기에 높이만 거의 20m에 폭도 20m 정도 되는 거대한 크기의 그림이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새로 설치된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노랗고 환한 그림은 근처 행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닳아빠진 광고보다는 훨씬 더 눈이 갔다. 만약 흔히 아는 스포츠웨어 광고였다면 눈길도 잘 안 줬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태호가 예상했던 바와 다르지 않았다. 달랐던 부분은 태호의 그림을 정말 크게 기대했던 우울증 환자들로부터의 반응이었다.
*
일주일 전이자 그림을 설치한 후 2주 뒤.
"사람들이 정말 많이 그림 보러 찾아왔나 봐. 너도 알지?" 제이크가 태호에게 말했다.
"어, 들었어. 일부러 하루에 한 번씩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퇴근할 때 보면 구경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태호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랑스러워했다.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하지만, 소수의 사람은 이번 그림이 뭔가 다르다고 사람들이 실망해서 안 온다고 하더라. 회사에도 이메일을 보내고 있고 관련 사이트에도 간간이 올라오고 있고."
태호는 정말 놀랐다.
"무슨 일이야? 뭐라고 하는데?"
"난 우울증을 앓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아무튼, 여기 와서 그림 보고 간 사람들이 후기에 너무 네 작품 같지 않다며 일부러 시간 내서 보러올 필요 없다고 적어놨더라고."
태호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표정으로 말했다.
"내 그림으로 우울증 개선되는 거 어차피 플라세보 효과 아니었어? 내가 우울증약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래?"
"모르지. 어떻게 대응할까?"
"뭘 어떻게 대응해. 일단은 그냥 둬야지. 지금도 일이 많아 죽겠는데 그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
지금 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를 스스로 이해시킨 후 벽화에 대한 소문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하지만 일은 태호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불평인지 불만인지 부탁인지 모를 글이 특정 사이트에 계속해서 올라왔고 회사로 이메일도 날아왔다. 설치 작품에 대한 혹평도 갈수록 빈도가 높아지고 있어 태호의 민감한 신경을 긁었다. 그냥 그림을 떼어 버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태호야. 손님이 찾아왔어. 처음 보는 분들인데 너랑 잠시 얘기를 하고 싶으시대. 어떻게 할까?"
제이크가 초인종 소리에 나갔다가 처음 보는 손님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정말 Theo 고객처럼 보이지 않았다. 태호의 작업실에 찾아오는 고객들은 보통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로고가 있거나 명품 로고 조차 없는 옷을 입고 오는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깔끔하게 세탁된 옷을 입었지만 정말 길이나 백화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얼굴에 생기가 부족했다.
태호는 손님들을 회의실에 모시라고 한 다음 하던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한 후 회의실로 향했다. 얼굴에 자꾸 피어나는 의아한 표정은 마른 세수로 계속해서 지워냈다.
회의실에는 한 명의 흑인 남성, 두 명의 백인 남성, 그리고 한 명의 백인 여성이었다. 나이는 다들 상당히 있어 보였고 표정에는 인생의 고단함이 애잔하게 묻어있었다.
"태호 작가 맞으십니까? 이렇게 불쑥 찾아와 실례합니다. 전 새뮤얼 존슨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저와 우연히 태호 작가의 벽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오늘 동행하게 된 리아, 오스틴, 콜입니다."
태호도 얼떨결에 회의실에 모인 모두와 인사를 나눴다.
"모르시겠지만···. 당연히 모르시겠지요. 저희는 태호 작가의 그림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팬이죠. 하하. 팬이긴 한데 가난해서 태호 작가의 작품을 살 형편은 안됩니다. 그저 레플리카만 겨우 구해 집에 전시해 놓고 매일 봅니다."
"팬이라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태호도 자신의 팬이라 하니 약간의 호의가 생겨났다.
"이번에 큰맘을 먹고 매우 저렴한 가격에 작품을 팔고 계시긴 하는데, 저희는 부끄럽지만, 그 가격의 그림도 살 형편도 되지 않습니다."
리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벌써 눈물을 글썽거려 태호를 당황하게 했다.
"얼마 전 작가님이 작업실 벽에 대형 그림을 설치하신 걸 보고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뻤습니다. 저 같은 환자에게 기쁜 날이 그다지 흔하지 않아서 얼마나 설렜는지 모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찾아와 그림을 보고 갔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그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태호가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짓자 사무엘은 설명을 이어갔다.
"태호 작가님의 그림을 모마나 빌바오에 가서 보면 가슴에 딱 다가오는 그림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고양이 그림을 좋아하고 리아씨는 화창한 날씨를 좋아하고 이런 식이죠. 여기 외벽에 걸린 그림은 16개 행복 시리즈 테마가 다 그려져 있기에 모두가 크게 기대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겁니다. 누구도 그림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마치···."
"마치?"
"레플리카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미술관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동이 없었던 거죠. 이상하다 싶어 웹 사이트에 글을 올려 의견을 나눠보니 저처럼 여기까지 와서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이 똑같습니다."
태호는 충격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 작업실 외벽에 걸린 그림은 자신의 손이 직접 닿은 게 전혀 없는 작품이었다. 기존 작품을 짜깁기한 것이었으며 제이크가 일은 다 했고 태호는 입으로만 떠든 작품이었다.
강한 충동이 태호의 머리를 잠식했다. 여기까지 와 준 사람들이 고마웠고 한편으로 테스터가 되어줄 것 같았다. 우울증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사 간다는 건 알았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생각이 있긴 한데 먼저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이 3층에 올라가실까요?"
네 사람을 이끌고 3층 작업실에 올라갔다. 3층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네 사람의 표정은 초콜릿 낙원에 들어온 어린아이처럼 환해졌다. 태호는 그들을 안내해 완성된 그림을 건조하는 곳으로 갔다.
"여기서 자기에게 맞는 그림이 있는지 찾아보시겠어요?"
네 사람은 한참을 신중하게 그림을 살폈고 한 10분 정도가 지나자 모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찾았다. 태호는 근처에 있던 즉석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누가 어떤 그림을 원한 건지 표시했다. 연락처도 같이 받았다.
"오늘 선택하신 그림을 바탕으로 제가 벽화를 그릴 겁니다. 지금 외벽 자리는 아니고 다른 공간이 있으면 그릴 예정인데 그림이 완성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 벽화를 보시고 받은 느낌을 솔직히 알려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알려 드리면 되죠?"
"이메일도 좋고 손 편지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떠나는 네 사람은 자꾸만 돌아서서 자기가 선택했던 그림을 돌아봤다. 얼굴 가득한 아쉬움과 슬픔으로 범벅이 된 표정으로 떠나는 네 사람을 보니 태호의 마음엔 자꾸 갈등이 생겼다.
아까 그들이 고른 그림을 줘 버리고 싶다가도 그 행동이 가져올 영향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소문이 돌 때 미국 전역에서 우울증 환자들이 다 몰려올 수도 있다. 이건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다른 방안을 꺼냈다.
"그림에 대한 평가를 해주시면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보상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는 했지만 아쉬움은 감추지 못한 채 작업실을 떠났다.
*
그다음 날부터 태호는 학교 건물 바깥쪽에 충분한 공간이 되는 곳이 있으면 벽화를 그렸다.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사다리 없이 손이 닿을 수 있는 공간을 기준으로 그렸다.
하나는 태호가 직접 전체를 그렸고, 하나는 스케치만 했고, 하나는 채색만 했다. 나머지 하나는 제이슨이 태호 그림을 따라 그렸다. 네 작품을 완성하자 문자를 보내 그림의 완성을 알리고 그들의 평가를 기다렸다.
문자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왔다. 이멜로도 오고 다음 날 손편지를 써서 작업실로 가지고 온 사람도 두 명이나 됐다.
"저희를 위해 직접 그림까지 그리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태호는 4명에게 받은 편지와 이메일을 읽어봤다. 다 읽은 후 옆에서 궁금해하는 제이크에게 편지를 넘겼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네 노동력이 더 많이 투입된 그림이 우울증 환자에게 더 효과가 좋다는 거네? 그런데 이건 신기하다. 네가 채색을 한 게 스케치만 한 것보다 더 반응이 좋게 보여."
"난 스케치는 빨리하니까. 채색이 시간이 많이 들지."
제이크는 문뜩 태호를 놀려줄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너, 잘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 시리즈만 그려야 할 수도 있겠는걸? 사람들이 이 그림만 찾을 것 같아."
제이크의 농담 같은 진담에 태호는 기겁했다.
"내가 우울증약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고 평생 같은 그림을 어떻게 그리라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같은 그림 그리는 거야! 이 행복 시리즈도 겨우겨우 그리는 거라고."
태호는 기겁하며 말했다.
"워워. 진정해. 진정. 좋은 방법이 있는지 같이 알아보자."
제이크는 태호가 상당히 심각하게 여긴다는 걸 깨닫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답은 태호가 더 빨리 냈다.
"결론은 간단해. 이왕 시작한 거 마무리만 하자. 지금 외벽에 설치된 거 철거하고 시멘트칠 해서 벽화 그리기 좋게 만든 다음 내가 직접 다 작업할 거야. 그리고 끝. 주문도 지금까지 받은 것만 소화하자고."
태호가 선언하듯 말했다.
"있는 직원들은?"
"그만두고 싶은 직원들은 그만두고.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 직원들은 살롱 그림으로 넘기자고."
"알았어."
"참. 그만두겠다는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해. 계약서에 있는 대로 나중에 내 이름이나 내 작품 팔아서 먹고살지 말라고. 이력서에 쓰고 나에게 추천서를 요청하는 건 받아들이겠지만, 그들이 판매하는 작품에 나와 관련된 뭔가가 들어가는 건 절대로 안 된다고."
"직원들 나갈 것 같지도 않지만, 다시 한번 얘기할게."
*
며칠 뒤, 그림은 간단히 철거되었다. 그리고 곧 시멘트 칠이 새로 되고 가림막이 쳐지고 고소 작업차를 대여했다. 미리 스케치한 그림은 차량의 버킷 (사람이 타는 부분)에 고정되고 버킷의 바닥은 각종 페인트로 가득했다. 그 옆에는 제이크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보스의 강요에 울며 겨자 먹듯 올라왔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내가 여기서 혼자 작업하는 게 불쌍하지 않냐?"
태호는 페인트칠은 계속하면서 대답했다.
"그거야 네 작품이니까 그런거고."
"넌 직원이니까 그런 거야."
"끙···."
"여기서 이렇게 공중에 매달려서 그림을 그리니까 옛날 생각난다."
제이크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태호는 자신 앞에서 한 번도 과거 일 같은 개인적인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절에 갔다가 환상이라고 해야 하는지 환영이라고 해야 하는지를 보고 그걸 그리려고 일 년 넘게 끙끙거렸거든."
"네 부처 그림 얘기하는 거지? 13살에 그렸다고 했던가?"
"어. 알아?"
"오프라 쇼에 네 에피소드 나온 거 찾아서 봤어."
"오. 제이크 출세하겠어. 직장인이 지녀야 할 자세가 됐네."
태호가 벽에 매달려 있던 시간만큼 제이크도 벽에 매달려 대화 상대이자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태호와 제이크 둘 다 고소 공포증이 약간은 있었는데 벽에 매달린 채 3개월 넘게 있다 보니 높이에 대한 공포는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태호는 목숨 걸고 옆에 있어 준 제이크에게 위험수당까지 계산해서 통장에 꽂았다.
"돈도 좋은데 다시는 벽화 그리지 말자. 못 할 짓 같아."
제이크의 말에 태호도 동감했다. 석 달을 벽에 매달린 채 그림을 그리는 건 정말 할 짓이 못되었다. 새삼 미켈란젤로가 존경스러웠다.
자신은 석 달밖에 안 했는데도 이가 갈려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누운 자세로 3년 동안 천장에 벽화를 그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