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노란색3 (Happy Yellow)
로버트는 빌바오의 특별 전시관에 들어오자 천국 일부를 본 듯했다. 얼마 전 키우던 골든래트리버를 하늘나라로 보낸 후 우울증이 부쩍 더 심해졌는데 노랗게 빛나는 전시실에 들어오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문득 생각이나 근처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 폐장 시간이 언제입니까?"
"평일은 5시 30분이지만 오늘은 8시까지 엽니다."
시계를 보니 이제 2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처음 맛본 이런 편안함이 이제 2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자 다시 불안 증세가 올라올 정도였다.
우울 시리즈가 있는 전시실은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 웹사이트에서 확인한 바로는 절대 방문 금지였다. 그 사이트엔 지금까지 이런 미술관 후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호평인지 악평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글이 사이트 상단에 있었다.
"빌바오의 우울 시리즈 관람은 나에겐 마치 공포 영화 16편을 차례로 보고 나온 것과 같았다. 난 여기서 더 멍청한 짓을 했는데 모마에 가서 다른 우울 시리즈 16편을 더 봤다는 것이다."
이 글 아래에는 위로와 격려의 댓글이 수백 개가 달려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서로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묻고 대답하는 글들이 많은 커뮤니티 사이트를 채우고 있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말도 꺼내지 말라는 글도 상당히 많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사이트를 방문했으며 이게 계기가 되어 더 많은 사람이 두 미술관으로 향했다.
로버트는 우울함이나 불안한 마음은 애써 잊고 벽에 걸려있는 행복 시리즈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8점의 큰 그림들이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림 하나하나를 영화 감상하듯 쳐다봤다. 머릿속에서 가끔 떠오르던 환청 같은 속삭임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다 큰 덩치의 골든래트리버 그림 앞에 섰다.
"몰리. 네가 여기 있었구나?"
입에는 미소가 번지는데 눈에는 눈물이 났다. 몰리가 하늘나라에서 뛰어노는 장면을 이 그림에 옮겨 놓은 듯했다. 그림 앞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도 그림 안에 들어가 몰리와 뛰어노는 상상을 하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생각에는 한 20~30분 정도 지났거니 생각했는데 미술관 직원이 다가와 폐장까지 10분 남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거밖에 안 남았습니까?"
"네.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로버트는 문뜩 자신만 이렇게 정신없이 그림을 봤는지 궁금해서 직원에게 물었다.
"혼자만 그러신 건 아니에요. 선생님처럼 그림에 집중하는 분들을 종종 본답니다."
로버트는 내일 뉴욕 관광 스케줄을 모두 다 취소하고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고 결심하며 미술관을 나섰다.
*
뉴욕 시민은 행운아였다.
돈이 들긴 했지만 언제든지 빌바오나 모마에 가서 그림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쪽 미술관이 정기 휴일이면 다른 미술관을 가도 된다.
두 군데서 전시하니 양쪽을 오고 가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돈도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어이가 없기도 했는데 미술관 측 설명에 지금은 수긍이 갔다. 첫째로 전시공간이 부족했고 둘째로 두 미술관 중 누구도 이 전시를 늦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이렇게 행운 시리즈 그림에 푹 빠져 사는 사람 수는 매우 적었다. 다만 방문객이 늘어나니 이 숫자도 점점 늘어나서 지금은 꽤 인원이 많아졌다.
제일 곤란한 사람들은 이들 중 미술관 접근이 어려운 외지 사람들이었다. 주말에 차를 끌고 뉴욕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나은데 로버트처럼 LA에서 온 사람들은 답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양 미술관에 비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이런 그림을 구매하고 싶으시다는 거죠?"
"네. 최근 한 달간 오십 평생 다닌 것보다 미술관을 더 많이 방문했습니다. 저 황금빛 그림을 보겠다고 말입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이 그림들은 태호 작가가 그린 그림으로 공식 딜러는 썬 갤러리입니다. 그곳에서 그림을 찾으시는 게 빠를 듯합니다. 저희는 그림 판매를 중개하지 않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썬 갤러리를 방문하지 않고 여기에 왔겠습니까? 아직 준비 중이라는 말만 할 뿐 뭉그적거리고 있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저희도 알아보고 미술관 홈페이지에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원이 누적되고 곧 제이슨과 토마스의 귀까지 들어갔다.
"그림은 언제 팔 생각이야? 우리는 남는 것도 없는데 자네 민원을 왜 듣고 있어야 하냐고!"
제이슨은 윌슨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기 시작했다.
"그림 아직 마르지도 않았어. 어떻게 팔라는 거야?"
"마르든 말든 팔라고! 나중에 바니쉬 발라준다고 해!"
"이건 지금 개인에게 팔 그림이야. 지금까지야 태호 고객들이 워낙에 부자라 작품 관리도 알아서 잘할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내 갤러리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다 일반인이야. 나중에 관리 안 돼서 그림 갈라지면 그들 마음도 같이 갈라질 거라고!"
"언제부터 성인군자였다고 그런 소리를 해?"
"이제부터 그러려고. 너도 우울증 환자 매일 열댓 명씩 봐봐. 걱정이 안 되나!"
태호의 그림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는지는 몰랐던지 제이슨은 매우 놀랐다.
"그렇게나 많이 와?"
"하도 많이 보니까 나도 우울해져. 아무리 봐도 우울증은 전염성이 있는 거 같다고."
"그건 네가 나중에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얘기해보고, 지금은 먼저 미술관에 이런 항의가 더는 안 들어오게 무슨 수를 써봐!"
"일단 알았어. 그렇게 태호에게 전달하지."
전화를 끊으려는 제이슨을 붙잡고 윌슨은 고민하고 있던 걸 물었다.
"행복 시리즈 작은 거 얼마에 팔아야 할까?"
"크기는?"
"70 cm x 90 cm"
"적절하네. 이 정도 크기의 태호 그림이라면 못해도 오십만 불 이상인데. 행복 시리즈라면 백만불도 받을 수 있겠네. 좀 비싸긴 해. 그림 찾는 사람들이 과연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절대 못 하지."
"지금 그게 제일 고민이야. 얼마에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태호 생각은?"
"싸게 팔자고 해."
"얼마나?"
"십만 불."
"십만 불?"
"그래."
"그럼 내 것도 하나 잡아줘. 내가 태호 그림을 꿈에서도 사고 싶었는데, 이제는 하나 살 수 있겠네."
"태호가 실제 그린 부분은 적은데?"
"얼마나 적어? 그래도 스케치는 직접 하지 않아? 수정도 직접하고 마무리도 직접하고?"
"그 정도는 하지."
"그래야 십만 불이 설명되지. 아니면 그 가격에 팔 수도 없잖아."
"그건 그래."
"이건 어때? 최소한의 노동력이 들어간 십만 불짜리 버전하고 전체를 다 그린 백만 불짜리 버전하고. 이렇게 두 버전으로."
"받아들일까?"
"아마 뉴욕에서 지금 가장 자본주의적 심리를 가진 화가가 태호일걸? 한번 물어봐봐. 받아들일 거야."
윌슨이 설명하자 태호는 제이슨의 제안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 버전의 그림은 몇 점 못 그리겠네요. 지금도 워낙에 바쁜데."
"몇 명이 작업하고 있나?"
"나 포함 15명이요."
"잠깐만. 5명에 8명. 자네 포함 14명이지 않아?"
"제이크도 그리고 있어요."
"그 친구가 왜?"
"이 녀석 돈독이 올랐는지 퇴근하고 4시간씩 그리다가 가요. 주말도 나오고. 주말에도 한 16시간씩 그리는 거 같더라니까요."
이렇게 작업하는 사람이 제이크 혼자만이 아니기에 태호의 작업실은 자정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아침 9시에 다시 켜졌다. 이런 수고에 태호의 작업실에는 행복 시리즈의 미니 버전이 하나씩 빠르게 완성됐다.
얼마 뒤 미술관에선 태호 작가가 열심히 작업 중이며 한 달 뒤에 초도 물량이 나온다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다. 그리고 미술관 측은 앞으로는 어떠한 경우라도 태호 작가의 작품 판매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것을 알렸다.
*
윌슨의 갤러리에 그림을 전시하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윌슨은 16종류의 그림을 하나씩 전시했는데 같은 구도의 그림이라도 받아들이는 게 다 달랐고 그래서 사람마다 원하는 그림이 다 달랐다.
고객들은 '그림이 자신을 끌어당긴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 정도가 그림마다 다 다르다고 했다. 윌슨은 그림을 구매해 가는 고객들이 정말 민감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윌슨 씨. 원하는 구도는 저쪽 왼쪽 벽에 걸려있는 그림인데 이상하게 끌리지가 않아요. 혹시 같은 버전의 다른 그림이 있으면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한 고객이 윌슨에게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1번 그림인가요?"
편한 설명을 위해 윌슨은 그림마다 번호를 매겨놨다.
"맞아요. 같은 구도의 그림이 여러 점이 있다고 들었어요. 1번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끌리지 않아서요. 다른 게 있을까 해서···."
"제가 다른 그림을 꺼내오겠습니다."
윌슨은 보관실에서 다른 그림을 꺼내오자 고객은 그림을 확인하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구매했다.
"이게 저에게는 훨씬 맞네요. 그림도 좋고."
윌슨은 자신의 눈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데 고객이 다르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며 팔았다.
사람들은 갤러리를 방문해 마치 마트 물건 고르듯 그림을 골라 신용카드를 꺼내 액자값까지 계산하고 차에 싣고 사라졌다. 윌슨도 10만 불이나 하는 그림을 이렇게 손쉽게 신용카드 결제로 판매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카드 수수료는 이미 그림값에 얹혔다.
투명한 거래에 세금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했다. 이리 최고 수준의 예술가라 국세청이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고 있어 탈세는 꿈도 못 꿨다.
계산할 때 어느 순간부터 작품 이름은 사라지고 번호로 대체됐다. 고객들은 이미 작품에 대해 다 파악을 하고 왔는지 윌슨과 제시카에게 그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빈도도 확 줄었다.
곧 그림과 썬 갤러리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후 제이슨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궁금해 전화했다.
"갤러리가 아니라 코스트코 같다던데, 정말 그래?"
이 얘기를 들은 윌슨은 허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도 마. 내가 무슨 마트 캐셔 같아."
"얼마나 팔았어?"
"한 6백만 불어치?"
"두 달만인가?"
"그래. 지금은 팔고 싶어도 그림이 없어서 못 팔아."
"많이 팔긴 했는데 실속은 없네. 6백만 불 어치를 팔았는데 실속이 없다고 얘기하는 게 정신 나간 소리 같긴 한데 사실인 걸 어떻게?"
평소 태호의 그림 판매를 생각해보면 한점 가격밖에 안 되기에 나온 얘기였다.
"실속이 없긴? 내가 볼 때는 현재 돌아가는 게 태호에겐 제일 좋아.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직원들과 바쁘게 일하는 거 보니 태호 정신 건강에도 좋아. 혼자 골방에서 파묻혀 그림 그리는 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아."
"그건 그렇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행복 시리즈 뒤에는?"
돌려 말했지만 이제 팔 만큼 판 거 아니냐는 제이슨의 물음에 윌슨은 바로 그의 생각을 정정해줬다.
"자네 왜 이렇게 계산이 느려? 지금 빌바오 방문객이 얼마나 늘었나?"
"한 20%? 연간 회원권을 구매하는 고객이 많이 늘었어."
"그거 보고 배 아파하는 미술관이 많아. 행복 시리즈로 특별관을 꾸미고 싶어 하는 개인 미술관들도 많고. 지금 16점을 세트로 주문하는 미술관도 늘어나고 있어. 크기는 좀 더 크게 해서. 주문이 밀려서 정신없이 바빠."
"돈을 긁어모으는군."
제이슨은 감탄하다 물었다.
"그 많은 주문량을 어떻게 감당해?"
"나도 몰라. 직원을 더 뽑아야 하는데, 내가 옆에서 봐도 더 뽑는 게 쉽지가 않아. 지금도 태호는 정말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거든. 그림의 시작과 끝을 태호가 하기에 시간을 더 낼 형편도 아니고."
"그럼 그림값이 오를 거 아니야? 수요는 높은데 공급이 적으면."
"그래서 고민이야. 그림값을 올리면 애초 의도가 퇴색되니. 지금 하는 것도 의도는 좋지만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