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복한 노란색 (Happy Yellow) (139/181)

행복한 노란색 (Happy Yellow)

행복이라는 주제에 대한 기본 구상을 마치자 태호는 작업실 3층 전부를 이 작업에 할당했다. 2층은 이미 살롱 관련 주제의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공간이 없었고 1층은 Theo 사무실과 작업실이었기에 빈자리가 있어도 이 작업에 할당할 수 없었다.

태호는 자기 일이 점점 커지자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명칭이 조수든 비서든 간에 말이다. 괜찮은 사람이 있긴 했다. 예일대 동창이자 금단의 영역에 눈을 뜨게 했다는 소문을 돌게 만든 주인공 제이크였다.

다만 연락처가 없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기록을 뒤져도 찾질 못해 결국 예일 아트 클럽에 전화를 걸어 제이크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제이크? 나야 태호."

"정말 태호? 예일대 태호 맞아?"

점심때 전화했는데 제이크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맞아. 잘 지냈어?"

"그럭저럭. 네 소식은 신문으로 봤다. 뉴욕 타임스가 알차게 네 소식을 전해 주더라."

제이크의 목소리엔 지금까지 연락 한번 없었던 태호에 대한 원망이 없진 않았다.

"어, 조금 바빴어. 요즘 뭐해?"

"직장 알아보고 있다."

"직장? 너라면 어디 신청만 쓰면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지금까지 뭐 했고?"

"너처럼 작가로 데뷔해 보려 했는데 쉽지 않더라. 직장도···. 쉽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뉴욕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더라. 넌 무슨 바람이 불어 전화했어?"

"제안이 있어서 전화했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말에 제이크의 목소리는 바로 변했다.

"제안?"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영화 대부에 나온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제이크의 귀에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이었다.

"어디서 만날까?"

"내일 12시에 브루클린 몬트로즈 애비뉴 xx로 와. 거기 1층에 커피숍이 있어. 시간 맞춰 올 수 있어?"

"집하고 그리 머지않으니 시간 맞춰 갈 수 있을 거야."

*

피어싱은 물론 귀걸이까지 모두 제거한 제이크는 정말 말쑥한 세미 정장 차림으로 태호 앞에 나타났다. 정말 못 알아볼 정도로 변했기에 태호는 깜짝 놀랐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 아니지? 스타일까지 싹 변해서 너 아닌 줄 알았다." 태호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냥 클라스 메이트 였지만 지금은 보스가 될 수도 있는데 보스 취향 맞춰야지."

"하하하. 내 취향이 어떤데?"

"너 되게 보수적인 거 아니었어? 귀걸이도 용납 안 하는?"

"내가?"

"우리 과 애 중에 네가 제일 건전했어. 아니다. 건전한 걸 넘어서 엄격했지. 너 귀걸이도 안 해, 염색도 안 해, 엘리 이후에 여자 만난 적 없었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네."

"학교에서 너 노린 애 정말 많았는데 전 여자친구가 엘리여서 아무도 너에게 대시 안 했어. 또 한국에 약혼녀라도 있는 줄 알았다. 지금 보니 제마였지만."

둘은 학교 얘기만 식사가 끝날 때까지 했다. 제이크는 예일 아트 클럽에서 여전히 활동을 하다 보니 여전히 학교 소식에 빠삭했다. 태호는 회비만 내고 참석을 안 한 지 오래였지만.

"내가 여기저기 일을 벌인 게 많아."

태호가 본격적으로 포지션을 제안하려 하자 제이크는 바짝 긴장하며 희망찬 눈으로 태호를 쳐다봤다.

"두 가지 일이 있는데 LVMH 산하 Theo 브랜드의 의상 제작 관련 사업이 한 파트고 순수 예술 관련 사업이 한 파트야. 지금까지 내가 직접 둘 다 관리를 했는데 일이 많아지니까 혼자서는 관리하기가 힘들어. 순수 예술 관련 사업을 도와줄 코디네이터가 필요해."

"JD (Job Description, 직무 명세서)가 어떻게 돼?"

"그런 거 없어. 일 생기면 다 네 일이라 생각하고 해야 해."

"악덕 업주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대신 돈을 잘 줘."

"뼈가 가루가 되게 일하겠습니다요. 얼마나 주실 것인지?"

"얼마면 돼?"

태호는 다소 거만하게 물었다. 영화 대사 같기도 했다.

"5만은 주셔야···."

"5만?"

"아니 그럼 4만···."

"아니 아니. 왜 내리는 거야? 5만 가지고 생활이 돼? 이 동네 세금이 미친 걸로 아는데?"

"뉴욕 다운타운은 힘들어도 브루클린에 집 얻으면 그래도 풀칠은 할 수 있어."

태호에겐 큰 충격이었다. 사실 5만이면 예술 계통 전공으로 정말 괜찮은 벌이였지만 태호는 학교 수업 (혹은 세미나)을 워낙에 대충 들었을뿐더러 전미 톱 레벨 수입을 올리다 보니 피라미드 아래쪽에 있는 예술가의 수입에 무지했다.

"이럴 거라는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알잖아. 네가 다 벌어간다는 거."

제이크의 디스에 태호는 피식 웃었다.

"내가 다 버는 게 아니라 난 시장을 확대하고 있어. 시장 참여자들은 내게 절해야 해."

"그렇다고 치자. 내 연봉은 얼마로 할 생각이야?"

"네 생각에 얼마가 적당할 거 같아?"

"6만은 받았으면 좋겠어."

태호가 봉급을 더 줄 것처럼 하자 제이크는 슬며시 희망 연봉을 만 달러 더 올렸다.

"그거면 돼?"

"그거 받으면 딴 데 가서도 취직 잘했다는 얘기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단 말이지···."

태호는 잠시 고민했다. 갑자기 연봉 측정에 자신의 평판이 들어오자 어느 수준의 봉급을 주는 게 적절한 건지 다시 계산해야 했다.

제이크는 태호가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평결을 기다리는 피의자처럼 태호만 쳐다봤다. 태호는 결심한 후 판결하듯 말했다.

"8만으로 하자."

잠시 멍하던 제이크는 눈이 확 떠지며 환호했다.

"와~! 정말? 우와. 고마워."

제이크는 태호가 봉급을 자신이 제안한 것보다 더 불러 버리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마음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회사 가보면 알아. 아니, 알려 하지 마. 그냥 계속 행복해해."

직원은 몇 명 없었지만 사실 제이크의 연봉이 제일 적었다. 왜냐하면, Theo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명품 제작이 가능한 경력직만 있었고 살롱 그림을 제작하는 직원들은 자신이 제작한 작품에 대한 커미션을 상당히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

제이크가 출근하자 태호는 고민할 거리를 잔뜩 떠넘겼다.

"그러니까 행복이란 주제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거의 시리즈로 그려야 된다는 거네? 가능하면 많이 그려야 되고?"

"사람들이 봤을 때 그림을 보고 행복하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실패작이야. 다시 그리든지 폐기하든지 해야 해. 아마 폐기하고 다른 구도로 새로 그릴 거야."

"어렵네."

"내가 뉴욕에 다니면서 그림에 대한 콘셉트는 대부분 잡아놨는데 콘셉트만 잡아놓고 실제 구도를 못 잡은 것들도 많아. 그 작업도 해야 해."

태호가 생각하는 구도란 실제 그림에 사용될 장소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해변에서의 일광욕'이라는 주제라면, LA의 산타모니카 해변을 할지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을 할지 골라야 했다. 상상 속의 해변을 그리는 것보단 이게 쉽고 편했다.

"기한은?"

"가능하면 빨리하는 게 좋겠어."

"너한테 구체적인 안 혹은 장소를 제시해 달라는 거야?"

"맞아. 내가 여기 사람들 감성을 잘 몰라서 말이야. 첫차를 그린다고 하면 아무 차나 그리면 안 될 것 같아. 사람들이 실제로 사서 행복을 느낄만한 차를 원한다는 거지. 그런 추억이 있는 차가 있잖아. '이 차는 정말 갖고 싶다'라는 생각. 물론 비싼 고급 차가 좋긴 하지만, 그걸 손에 실제로 넣는 사람은 적잖아."

"일종의 대중성을 확보하라는 얘기네?"

"맞아. 네가 하다가 막히면 외주 줘서 맡겨버려."

"그래도 돼?"

"그럼. 네가 끙끙 앓으면서 비용 절약하는 것보다 돈은 쓰더라도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게 훨씬 도움이 돼. 난, 이 행복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목표로 한 게 있어.

난 이 시리즈의 그림을 비싸게 파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간직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정말 많이 그려야 해."

"피카소처럼?"

"아니, 반 고흐처럼."

생전 2천여 점이 넘는 그림을 그린 고흐가 태호의 롤 모델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수량은 많아도 상당수가 저급해 태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많이 그리면서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 태호는 이걸 원했다.

"수량이 많아지면 작품가가 떨어질 텐데, 괜찮겠어?"

"내가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린다면 수량이 많아져도 일정 수준을 유지할 거야. 그리고 이 시리즈만 그렇게 할 거고 다른 걸 그렇게 그린다는 건 아니니까."

"잘 될까 모르겠다."

"난 돈독이 올라서 그림을 찍어내서 팔려고 하는 게 아니야. 많은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행복해하길 원해. 그래서 싸고 좋은 그림을 공급하려고 하는 거라고."

"네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게 이 바닥이잖아."

"그러니까 내 생각대로 돌아가게 홍보를 해야지."

"어떻게?"

"네가 알아보고 알려줘."

"하아···. 알았어···."

제이크는 한숨이 절로 나왔고 8만 불 연봉 값을 이런 식으로 한다는 생각까지 들어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너무 맨땅에다 헤딩이었다.

"도와줘?"

표정이 구겨지는 제이크를 보며 태호가 말했다.

"어! 당연히 네가 도와줘야지!"

"내가 LVMH 홍보 담당 직원에게 얘기해 둘 테니까 가서 속성으로 배우고 와. 내가 Theo OJT (on the job training, 직무 교육)은 못해도 LVMH는 부탁해서 해줄 수 있어. 널 예술 사업에 특화된 인재로 키워줄게!"

*

제이크가 LVMH에 인턴 아닌 인턴을 나가 있는 사이, 구도가 명확해 쉽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먼저 제작하기 시작했다.

먼저 고양이나 새끼 골든래트리버는 손쉽게 완성을 했다. 직접 찍은 사진도 있었고 인터넷에도 사진이 많아 손쉽게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 고양이 사진에 초상권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고민하는 걸 접었다.

일과 후 맥주나 콜라도 쉬웠다. 그저 맥주 브랜드를 뭐로 쓸 거냐 콜라 브랜드를 뭐로 할거냐만 고민하면 됐다. 직접 맥주 회사나 콜라 회사로 전화를 할까 생각하다 이것도 홍보 업체에 맡겨 버리려 했다. 다만 문제는 이 모든 게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었다.

"누구 시라고요?"

"Theo의 태호입니다."

"어쩐 일로 전화하셨죠?"

"내 작품에 특정 브랜드를 써야 하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서요···."

"혹시 회사에 방문하실 수 있으시면 저희가 들어보고 도와드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바빠서 그런데 이쪽 회사로 와주실 수 없을까요?"

"저희도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그럼 할 수 없죠. 이만."

'빡' 전화를 부실 듯 끊은 태호는 뻗쳐오는 짜증과 귀찮음에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결국, 이 일은 제이크에게 떠넘기기로 하고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시작했다.

대학 졸업식은 예일로, 화창한 날씨는 얼마 전 센트럴 파크에서 찍은 사진으로, 학교의 임시 공휴일도 근처 브루클린의 한 학교 사진으로 결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