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뉴욕4
태호와 제마가 도착한 곳은 맨해튼 중심에 있는 한 로프탑 커피숍.
태호는 제마가 이끄는 데로 향하긴 했지만, 눈빛은 공허하게 풀려있었다.
그런 눈빛으로 한참 동안 뉴욕의 하늘만 바라보던 태호를 두고 제마는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했다.
"이곳에서 제일 단 음식이 뭐죠?"
"런던 포그 티 라테 입니다."
"이거 괜찮아?"
제마가 물었지만, 태호는 여전히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걸로 두잔 주시고, 단 케이크는 뭐가 있나요?"
"시폰 케이크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 조각 주세요."
제마는 태호가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렸다. 차와 케이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도 태호가 멍하니 있자 차와 케이크를 태호 앞에 두고 자신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왔지만, 이 차도 괜찮았다. 한 모금 마시자 부드러운 우유 크림 뒤로 강한 얼 그레이 티가 입안을 채웠다. 바닐라 향도 조금 났다.
"태호, 이거 정말 괜찮다. 마셔봐."
여전히 말이 없는 태호를 두고 제마는 혼잣말을 시작했다.
"마크가 일주일 휴가 줬어. 다음 주까지 너 돌봐주래. 파리 먼저 가 있겠다고 하네."
"..."
"너무 힘들면 이번 시즌은 안 와도 된대. 자기가 어떻게든 꾸려가 보겠다고 했어."
"..."
"엄마가 안부 전해 달래. 아빠도. 오빠도 그랬고, 레이나도 나한테 전화해서 안부 전해 달래. 엄마는 괜찮으면 집에 와서 며칠 쉬다 가래."
"그래···. 고맙다고 전해줘."
"응"
"..."
"할아버지 보고 싶으면 나랑 한국 갔다가 올래? 아빠가 비행기 쓰게 해 주신대."
제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 가면 군대 갈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네 얘기 듣고 이해가 안되어서 데이비드에게 물어봤어. 걔가 아빠 찬스 써서 수소문해서 물어봤는데 그거 불가능하데. 혹시나 몰라 한국 출신 변호사한테까지 물어봤데."
태호는 허탈하고 허무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지금 간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돌아가시고 없는데."
태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책은 그만해도 돼.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니야."
제마는 위로나 연민의 목소리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듯했다.
이후로도 제마는 어떻게든 태호를 위로하려 했고 태호는 자신을 혐오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갔다.
제마는 태호 옆으로 다가가 태호를 끌어안았다.
"뭘 해야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가 좋아하실까? 네가 이렇게 슬퍼하고 자기 부정하는 말을 계속해서 하는 걸 원하실까? 내가 만난 할아버지는 쾌활하신 분이라 네 이런 모습 싫어하실 거 같아."
잠시 후, 제마는 태호의 품으로 더 파고들며 말했다. 아직 늦여름이라 얇은 옷을 입었기에 태호의 체취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아줘. 이렇게 끌어안으면 기분이 좀 풀릴 거야."
태호도 채근에 제마를 끌어 앉았다. 그러자 제마가 태호의 귀에 조곤조곤 말했다.
"넌 남들 앞에서 차가운 척 도도한 척은 다 하지만 정작 이용만 당하는 바보 같아."
"... 내가?"
"어. 내가 알기로 네 지인 중 예랑이란 사람은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네 다큐멘터리를 많이 찍은 거로 알아. 네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 일 터졌을 때 어떻게 도와줬어?"
"... 글쎄."
"큰 도움이 안 됐잖아. 그리고 그 서현인가? 그 친구의 데이트 상대는 왜 만나러 간 거야?"
"같이 가 달라고 해서."
"꼭 가야 했던 자리야? 한국에서 제일 큰 재벌 집이라며. 네가 그 데이트 상대를 만나고 안 만나고가 그들의 결혼에 큰 영향을 미칠까?"
"..."
"넌 한국에 있는 네 친구와 지인에게 할 만 큼 했어. 내가 화나는 게 뭔지 알아? 그 친구들이 왜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없냐는 거야. 지금이 네가 제일 힘들 때인데 옆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은 왜 나 혼자야?"
"그거야 그들이 한국에 있으니까."
"왜 그들의 그런 사정까지 헤아려 줘야 해? 넌 여기서 술병과 우울증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네가 서현이 생각하는 맘의 반만큼이라도 서현이가 널 생각했다면 네가 이렇게까지 우울하게 있었을까?"
"?!"
"만약 내가 한국에 있고 뉴욕에서 네가 이렇게 우울하게 있다는 걸 알았다면, 네가 전화도 안 받고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었다면, 난 바로 비행기 타고 날아왔을 거야. 뉴욕이 넓다지만 너 같은 유명인 하나 찾는 게 뭐가 어렵겠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닐텐데."
"..."
"난 태호 네가 지금까지 만났던 서현이나 엘리라는 사람과는 달라. 난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루이뷔통 모델이란 직업이나 로웰이란 이름도 버릴 수 있어."
"..."
"사랑해. 네가 전에 만났던 어떤 사람들보다 내가 널 더 사랑해. 내가 늘 네 옆에 있어 줄게. 그러니까 더는 우울해하지도 말고 바보처럼 굴지 말고 일상으로 돌아와 줘. 부탁이야."
제마는 울먹이며 간청하듯 애원하듯 말했다.
태호가 제마를 보자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태호는 그런 제마의 눈물을 입으로 핥아 말린 다음 제마의 입술에 뜨겁게 키스했다.
둘의 키스는 플라톤의 시처럼 입술에 영혼을 담아 서로에게 불어넣는 의식 같았고 조각가 브란쿠시의 키스와도 닮았다.
*
한국에서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온 지 2개월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태호는 그때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였다.
파리의 패션쇼를 갔다 온 다음부터 태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제는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영감을 주는 건 제마와의 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만족감과 충만함이었다.
낮에는 제마를 놓고 최고의 옷감과 액세서리로 어떻게 아름다움을 드러낼까 고민했다면, 밤에는 제마의 옷은 다 벗겨 놓은 체 어떻게 하면 이 육체를 성스럽고 고귀하게 묘사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태호는 제마와 자신의 태초의 모습을 놓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철저히 둘 사이의 비밀로 남겨놓을 뿐 대중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3개월 정도는 서로의 육체를 정신없이 탐닉하는 데 집착했고, 그 뒤로는 좀 더 감정교류와 정서적 유대감을 쌓는 데 집중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모습을 찍어 그림을 그렸고, 손바닥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최대한 밀착시킨 채 서로 딥키스를 하는 장면도 사진으로 찍어 그림을 그렸다.
태호는 제마와 둘이 같이 있으면 비 오는 날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에도 행복해하는 그림을 그렸다. 특별히 파란색으로 강조한 빗방울이 눈앞에 가득한 장면에서 그 앞에 당당히 손을 잡고 서 있는 자신과 제마를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마치 우울한 파란색이 별거 아닌 것처럼 묘사했다.
둘이 함께라면 세상의 어떤 편견과 모순, 그리고 비극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려진 많은 그림은 나는 ‘너무너무 행복해’라고 세상에 외쳐 자랑하고픈 태호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렇게 회사 일과 제마와의 연애를 즐기는 사이 사랑이라는 주제의 그림들은 완성되어 갔지만, 태호는 곧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행복해 죽을 것 같다고 그림으로 떠들고 있었지만, 정작 '그 끝없이 우울한 그림들을 보고 난 사람들을 충분히 위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글쎄'라는 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 제마가 물었다.
"최근에 내가 그린 그림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린 그림은 우리 둘의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해."
태호와 제마는 손을 잡고 뉴욕 시내와 공원 등을 걸으며 어떤 요소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책도 찾아보고, 미술관과 갤러리를 다니면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확인을 했다.
둘은 다니면서 행복해 보이는 장면이 있다면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를 했다.
10년을 넘게 같은 시간을 보낸 두 마리 골든래트리버와 걷는 두 노부부,
그리고 여섯 마리의 새끼 골든래트리버,
3마리 새끼 고양이,
학교의 임시 공휴일,
축구의 골 장면,
가족과의 추수감사절 파티,
자신의 아이와의 첫 만남,
야구에서의 홈런,
첫차,
첫 집,
대학 졸업식,
화창한 날씨,
콜라,
일과 후 맥주,
해변에서의 일광욕,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남녀 골반 부위···.
이런 장면들이 두 사람의 눈에 띄었다.
이제 태호는 늘 제마와 손을 잡고 다녔고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키스했다. 이 모습이 많은 파파라치에 잡혀 다음날 타블로이드에 큼지막하게 났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두 사람과의 관계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아 했다.
단 뉴욕에서만 그랬다.
*
태호의 병역 기피 사건 탓에 화가로 알려질 때보다 더 쉽게 언론에 이름과 얼굴이 오르내렸다.
(뉴욕의 톱 모델 제마, 태호와 열애 중)
마크 제이의 뮤즈이자 루이뷔통의 전속 모델인 제마 로웰이 한국 출신 화가 태호와 열애 중이라는 소식으로 뉴욕이 떠들썩하다. 맨해튼 센트럴 파크에서 제마와 손을 잡고 걷는 장면과 뉴욕 거리 곳곳에서 키스하는 장면이 잡힌 것. 두 사람은 루이뷔통 직원으로 같이 일하며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자주 목격되었으나 이렇게 대중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기는 처음이다.
...
제마는 로웰 가의 막내딸로 알려졌다. 로웰 가는 뉴욕에서 100년 이상 된 전통적인 부호 중 하나로 롱아일랜드의 저택을 비롯하여 맨해튼 및 뉴욕에 다양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 은행, 자동차, 항공, 식음료, 최근 닷컴 붕괴 후 IT 산업에도 투자를 진행해 현재 미국 200대 부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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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현재 LVMH 산하 Theo라는 브랜드의 사장이며 이 회사는 그림 제작을 주요 매출로 하며 고객에 맞춰 옷과 핸드백, 구두 등 액세서리까지 같이 제작해 고객에게 제공하는 특이한 영업 전략을 쓰는 회사이다. 제마가 전속 모델이며, 그림의 제작비용은 정확한 것은 아니나 최소 2백만 달러를 상회한다고 알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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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의 인맥으로는 절친인 루이뷔통의 마크 제이부터······. 빌바오 미술관의 토마스 등이 있으며, 한국에서의 인맥으로는 다움 미술관의 김유미 관장과 한국대 김창기 교수 발해대 강 재범교수가 있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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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얼마 전 병역 기피 문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으며 최근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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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니 태호를 비난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주로 저럴 바에는 그냥 결혼하고 자연스럽게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 되었을 것을 왜 그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건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어떤 댓글은 태호의 외모와 제마의 외모를 보며 세상의 불공평함을 한탄했고. 그런 댓글을 보며 왜 외국인을 신경 쓰냐는 비아냥도 만만치 않았다.
서현은 댓글을 읽어보며 어이가 없었다. 태호는 결코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건 돈을 받고 기사를 쓴 언론이지 태호도 아니었다. 태호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인터넷에 써놓은 글과는 맞지 않았다.
태호가 제마와 열애 중이라는 기사를 보자 그제야 자신의 멍청함과 이기심 그리고 용기 없음에 마음이 몸에서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