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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뉴욕3 (137/181)

우울한 뉴욕3

급한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태호는 윌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말에 갈게요. 아, 지인들 초대해도 되죠?"

주말에 마크와 빌바오의 제이슨, 모마의 짐이 썬 갤러리에 도착했다. 제이슨과 짐은 미술관의 직원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났다. 제마와 갤러리에 도착한 태호는 일단 그림부터 공개했다. 그림부터 보고 얘기를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에서였다.

그림을 가리고 있던 가림막이 거둬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게 그림을 보기를 3분. 사람들의 얼굴에는 점점 더 그늘이 눈에 비치게 되었고 몇몇은 눈이 벌게졌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마크는 이미 한쪽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 그만 보세요. 저 그림들은 다시 가려주시겠어요? 그다지 정신 건강에 안 좋은 그림들이에요."

태호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림을 다시 가려 달라고 요청했다.

"태호. 저 그림들은 뭔가? 왜 빛의 마리아가 저렇게 그려진 거지? 난 태어나서 저렇게 우울한 그림은 본 적이 없어."

제이슨이 물었다.

태호는 한 달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얘기했다. 그러자 지인들은 태호에게 걱정과 위로의 말들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그것처럼 나쁘지는 않아요.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던 일이 그냥 벌어진 것이거든요. 각오는···. 네, 각오는 어느 정도 하고 있었지요. 물론 결말이 더 안 좋긴 하지만.

이 그림들을 공개한 이유는···. 처음에는 버리려고 했어요. 부끄러웠거든요. 제 치부 같은 게 다 드러나는 거 같아서.

그런데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꿈에 나오셔서 당신이 목숨을 잃었기엔 만들 수 있는 작품들인데 함부로 버리려고 하느냐고 혼내시는 거예요. 아마 제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소리가 할아버지의 형상을 빌어 얘기한 거겠지만요.

곧 다시 보니 내가 그렸는데도 정말 우울한 거예요. 너무 우울해서 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태호는 잠시 눈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공개하도록 해요. 한국 장례 문화 중 하나 중에 3년 상이라는 게 있어요. 자식이 태어나서 부모 품을 떠나는 데 3년이 걸리는 만큼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제를 지낸다는 의미에요. 물론 부모는 아니고 할아버지고 3년 정도로 길게 가져가진 않겠지만요. 또 하나는 솔직히 제가 이렇게 우울해했다는 걸 보고 그놈이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태호는 웃었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 든 깊은 분노가 느껴져 같이 웃어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 그림들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해 둔 게 있나?" 제이슨이 물었다.

"그걸 잘 모르겠어요. 사실 이 우울한 그림들을 공개해도 되는지. 그리고 누가 이 그림들을 보고 자살했다는 얘기가 나오면 제 멘탈이 감당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고요."

"아니. 태호.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자네 책임이 아니라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곰곰이 생각해보는 제이슨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일리는 있군. 우울증 걸린 사람이 이 그림을 보면···.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지면 안 되겠군. 이건 어떤가? 자네가 이 그림들을 공개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을 둔다면 그사이에 사람들이 이 우울한 감정을 극복할 정도의 그림을 그려주게. 저 우울한 그림을 보고 나서 행복한 그림을 오래 보면 그래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겠나?"

제이슨은 제마를 보며 말했다.

"태호는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어. 그리고 제마라고 했나? 얘기만 듣다 실제로 보니 매우 반갑네. 태호 곁에서 좀 위로해 주지 않겠나? 지금 태호를 보니 그렇게 쉽게 정리될 감정은 아닌 거 같아. 그리고 윌슨. 우리는 이 그림들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봐야겠지?"

"그러지. 제이슨하고 짐은 남고 나머지는 나가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태호에게 몸조리 잘하라는 인사를 남기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고, 태호는 그렇게 행복이라는 화두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

제이슨과 짐만 남아서 윌슨 앞에서 치열하게 그림을 선점하기 협상 혹은 우격다짐을 시작했다.

"태호에게 벌어진 일은 안타깝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저 파란색 빛의 마리아는 모마에서 가져가겠네. 이 전체 전시회도 당연히 모마에서 해야 하고. 여기 작품 중 1/3인 10점 정도를 우리가 전시하지."

짐은 그러면서 그 1/3에 해당하는 작품도 그 자리에서 바로 골라버렸다.

옆에서 그걸 쳐다보던 제이슨의 눈에서 화염이 불타올랐다.

"짐. 그 빛의 마리아는 빌바오 겁니다. 그 손 떼세요."

"자네는 이미 가질 만큼 가지지 않았나?"

"그 퍼런색 빛의 마리아는 처음 보는 작품이니까 그렇지요. 빛의 마리아는 다 빌바오에 있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언쟁이 계속해서 이어지려 하자 윌슨이 중재에 나섰다.

"저기···. 두 분. 이 그림들은 판매용이지 가져가시라고 있는 사은품이 아닙니다. 전 이 작품들을 당장에 팔 생각도 없고요."

윌슨은 짐이 자기 것이라며 주장한 모든 것을 무시하고 원점부터 재논의했다.

"전 여기 있는 32점의 작품은 전시회 후 팔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전시하실 작품을 고르세요. 16 작품씩 가져가는 거로 하시죠."

윌슨이 첫 번째 그림 앞으로 이동했다.

"이 작품은 누가 전시하시겠어요?"

"모마가."

짐이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이슨은 손을 들지 않았기에 윌슨은 포스트잇으로 짐이라고 쓰고 다음 작품으로 이동했다.

"이 작품은요?"

태호의 자화상과 비행기, 그리고 여권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건 내가 전시하지."

제이슨이 전시 의사를 표했다.

"짐도 전시 의사도 없으십니까?"

"있네."

"그럼 이건 미뤄두죠."

윌슨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

두 사람이 동시에 원하는 그림이 나오자 윌슨은 그림을 따로 뺐다. 한 시간 넘게 32 작품을 돌고 나니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다.

빌바오: 6, 모마: 5

두 사람은 무려 21점의 작품을 두고 경합을 벌였다. 즉 두 사람이 작품을 보는 눈은 똑같았다.

남은 그림 21점을 두고 다시 경합을 벌이자 조금씩 서로 조율이 되었고 이를 몇 번 반복하자 어느 정도 결론이 났다.

빌바오: 16, 모마: 15

"내가 한점 적으니 빛의 마리아 블루는 내가 가져가겠네."

짐이 웃는 얼굴로 가져가려 하자 제이슨이 막기 전에 윌슨이 막았다.

"이름을 예쁘게 지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이 그림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전시하시죠."

"어떻게?"

"빌바오에서 먼저 전시하고 남은 기간 모마에서 전시하는 거로 하시죠."

"모마에서 먼저 하면 안 되겠나?"

"이 정도의 혜택은 제가 빌바오에 드려야 상도덕에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짐의 표정은 구겨졌고 제이슨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을 했다.

"... 알겠네."

마지 못해 짐이 동의하자 이 정신없던 협상이 끝이 났다.

"그림은 언제 인수해 가실 생각입니까?"

"월요일에 직원들과 같이 와서 가져가지." 짐이 얘기했고.

"빌바오도." 제이슨이 대답했다.

잠시 후, 그림을 편하게 관찰하던 윌슨이 덤덤히 말했다.

"내가 그렇게 미국 국적을 취득하라고 해도 안 듣던 녀석인데 이제는 취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네."

제이슨과 짐도 고개를 끄덕였다. 윌슨은 그런 제이슨에게 물었다.

"참. 태호 국적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국적 취득을 빨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얘기야?"

"그래."

"내 관장님과 얘기해 볼게. 후원회에 이쪽에 힘써 줄 분이 있을 거야."

"고마워."

"그럼 그림 좀 싸게 팔아!"

"후후."

윌슨은 확답은 안 하고 웃기만 했다.

*

월요일, 제이슨은 내부 직원들과 썬 갤러리에서 그림을 인수해 갔다. 내부 회의를 거친 후 일주일 뒤 후원회를 소집했다.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앓았던 전적이 있는 회원. 또는 자신의 정신 건강에 의문이 있는 분들이 절대로 참석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연령대의 회원들이 많은 후원회 특성상 이건 필수였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태호의 정신 건강까지 해칠 테니 말이다.

제이슨의 생각은 옳았다. 짧은 시간 동안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보이는 회원들이 여러 명 있었던 까닭이다.

"빛의 마리아의 작가인 태호 군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이슨은 태호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회원들에게 설명했다. 개인사이긴 하지만 작품에 사연을 담는 즉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었기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회원들은 태호에게 벌어진 불행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동양의 천재를 잡을 기회라며 눈을 반짝였다.

"혹시 태호에게 시민권을 빨리 부여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현재 영주권자이긴 합니다."

한 회원이 손을 들며 말했다.

"내가 한번 알아봐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밥 회원님."

그러자 후원회 회장이자 전직 3선 하원의원인 오스틴 스미스가 말했다. 오래된 회원이고 최고 연장자이다 보니 제이슨에게도 편하게 말했다.

"나도 밥과 알아보지. 태호 같은 인재를 위한 프로세스도 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제이슨. 16개의 작품 중 뭘 반드시 잡아야 하나? '빛의 마리아 블루'라는 작품은 잡고는 싶지만, 가격이 얼마가 나갈지 상상하기도 싫어."

"아마 이런 우울한 빛의 마리아는 다시는 그리지 않을 겁니다. 개인이 집에 둘 목적으로 구매하기엔 우울한 그림이라 큰 인기는 없겠지만, 희소성 때문에 높은 가격으로 구매할 컬렉터가 나올 여지는 많습니다."

"그래서 얼만가?"

"최소 천만 달러. 최대 천오백만 달러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신 나간 금액이군."

"태호 작가를 얘기할 때 흔히 듣던 말이지요."

"근거는?"

"지난 바젤에서 그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오스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겠네. 그 작품을 잡으려면 후원회에서 얼마를 모금해야 하겠는가?"

"사실 미술관에 여유자금이 얼마 없습니다. 그래서···. 천만 달러는 필요합니다."

"그렇게나 많이?"

오스틴이 놀라 되물었다.

"흠···. 가지고 있는 그림을 일부 넘기는 건···. 어떠한가?"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다만 장기 대여는 가능하겠지요. 그것도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닙니다."

"그런가? 그렇겠지. 후원회에서도 돈을 모을 방법을 알아보지. 아무래도 젊은 자산가들을 후원회로 초대해야겠어."

"저희도 알아보겠습니다."

*

제마는 그림을 본 충격에선 벗어났지만, 얼굴은 반쪽이었다. 며칠 동안 태호 걱정이 너무 심했던 까닭이다.

태호와 썬 갤러리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제마가 태호를 태워 왔기에 둘은 한 차로 움직였다.

"커피 마시러 갈까?"

제마가 물었다.

"아니. 난 집에 가고 싶은데···."

"안돼."

"왜 안된다는 거야?"

"지금 혼자 있으면 안 돼."

"난 괜찮아."

"내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지 않는걸?"

"괜찮대도?

제마는 처연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태호를 보며 말했다.

"그냥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

자신도 엉망이지만 자신 때문에 제마도 엉망인 걸 아는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커피 마시러 가자."

제마의 BMW는 맨해튼의 한 전망 좋은 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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