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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뉴욕2 (feat 서현) (136/181)

우울한 뉴욕2 (feat 서현)

"무슨 걱정 있어? 자자, 누나에게 얘기해봐. 누나가 도와줄게."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잠시. 내가 그 사람이라면 날 어떻게 하려고 할까."

"근데?"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 일단 널 달래려 할 거야. 너 거기에 넘어가면 바보다. 그리고 혹시 그 사람 둘째야? 형이 있어?"

"어."

"나에게는 더 안 좋은 케이슨데···. 생각을 해보니까 그 사람 허풍이 있잖아. 너랑 결혼하려고 하는 이유도 뻔하겠지. 네가 가진 재산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니까? 왜 재벌들은 자기 집안 안에서도 지분 가지고 싸운다며? 지분 싸움에 네가 도움이 크게 될 거니까 너랑 엮으려고 하는 걸 테고. 그런데 내가 시원하게 망쳐버렸네. 내가 그 사람이라면 보복하려고 할 거 같아."

"보복? 무슨 수로?"

"내가 가진 약점이 뭐냐?"

"네 약점? 글쎄. 나같이 예쁜 여자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거 보면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신체적으로는 튼튼합니다, 마님. 그런 거 말고."

"모르겠는데? 뭐가 있어?"

"나 군대 면제야. 정확히는 회피하고 해도 할 말이 없어. 편법으로 면제를 받았지만."

"내 주위에 군대 간 남자가 없어."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무마할 수 있어. 왜냐하면, 주위에서 돈으로 권력으로 막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 하지만 난 한국에서 돈도 권력도 사람도 없어. 공격을 당하면 그대로 다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뭐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재벌 집 차남을 들이받았네? 약점도 뻔한 내가? 허, 참. 생각해보니 나도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이 욱하는 성질이 남아 있었어. 아 젠장!"

태호는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설마 그렇게 하겠어?"

"당연히 그렇게 될 거 같은데? 야야. 이 얘기는 그만하고 딴 얘기하자."

그렇게 둘은 12시가 넘도록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서현은 집에 전화해 일직서는 기사 아저씨를 불렀고 1시 넘어 태호를 집까지 에스코트 해주고 집에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모처럼 서현이네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아침을 먹었다.

"그래 어제는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니? 서 기사는 왜 불렀고?" 김 관장은 서현에게 물어봤다.

"엄마, 오빠가 들어도 돼? 정현 씨 얘긴데?"

"어디 가서 안 떠들 테니까 얘기해."

"오빠 약속 지켜야 한다. 아빠도 옆에 있는데?"

"그래. 무슨 얘긴지 궁금해서라도 들어야겠네."

서현은 어제 태호에게 들은 얘기를 쭉 식구들에게 했다.

"쯧쯧, 멍청한 놈들."

"아빠, 누가 멍청하다는 거예요?"

"둘 다."

"태호는 왜요? 나 보호해주려고 한 건에."

"그게 보호하려고 한 거니?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뛴 거지? 가진 것도 없는 녀석이 있는 집 차남을 여자 앞에서 대 놓고 면박을 줘? 깡은 좋구나. 하긴 그 녀석 깡은 좋았지. 네 엄마랑 거래하는 거 보면 보통내기는 아니야."

"아빠. 걔가 가진 게 없긴. 생존 작가 중 작품가 1위인 애를. 이번에 찍은 영화는 아카데미상도 받을 거 같다던데? 그런데 걔도 나중에 아빠랑 똑같이 얘기하면서 후회하더라. 나랑 엮이는 통에 욱해서 그랬다고."

"주제 파악은 하는 녀석이군."

"아빠, 아빠가 얘기해 주면 안 돼? 태호 공격하지 말라고?"

"무슨 공격? 그 녀석이 조폭도 아닌데. 걔가 약점 잡힌 게 있니?"

"군대 문제로 공격당할 걸 걸 걱정하더라고."

"쯧. 알았다. 내가 얘기해 보마. 정현 그 녀석이랑은 어떻게 할 거냐?"

"끝이에요. 태호 얘기 들어보니까 프랑스 유학도 어학연수도 제대로 못 한 듯한 엉망인 발음에 이렇게 태연히 거짓말하는 거 보면 여자 정리했다는 것도 거짓말일 수 있다는데?"

서현 아빠는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얼마 전 복잡한 여자 관계가 다 정리가 안 되었다는 비서실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았다. 내 알아보마."

서현의 바램과는 다르게 정현은 그 쪼잔한 성격만큼이나 행동이 재빨랐는데, 아침부터 인터넷 신문을 중심으로 태호의 군대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며 혜성처럼 등장한 화가 권태호가 군 복무를 회피할 목적으로···."

제2의 스티브 여 사건이라는 기사가 조간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오후쯤에는 온 인터넷을 뒤덮었다.

다성에서 GL에 이런 공격을 그만둬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미 일은 커질 대로 커져 손쓰기 힘든 상황까지 번졌다.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자 주류 언론에서도 이를 주요 뉴스로 다뤘다.

그 다음 날에는 신문 사설에까지 태호의 이름이 등장해 공인이 이렇게 군대를 회피하면 안 된다는 강한 힐난조의 글이 지면을 차지했다. 태호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쓴 유일한 언론으로 KBC 정도밖에 없었다.

그 뒤 병무청에서는 태호의 행위는 불법이 아니기에 처벌할 규정은 없으며 다시는 이런 편법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법 개정이 하루아침에 발의되고 적용되지 않지만, 만약 소급 적용이 되면 태호는 영락없이 군대에 가야 하기에 급하게 한국 일정을 정리하고 뉴욕 편 비행기를 예약했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날, 서현에게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태호는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에 그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자신도 알아야 복수를 할 것이 아닌가?

"그놈은 군대는 갔어?"

"그 집 남자들은 다 해병대 출신이야."

"내가 잘못했네. 군대도 안 갔다가 오고. 사실 변명의 여지도 없어. 내가 회피한 게 맞으니까. 하지만 그놈한테 이런 식으로 당하는 건 정말 화가 나네."

서현은 감동했지만 쿨한 척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미국 국적을 딸까? 아니면 프랑스 국적을 딸까? 아르노 회장이 프랑스 국적도 따게 해줄 거 같던데."

"농담하지 말고"

"미국 국적 따야지. 영주권 있으니. 아, 이번 일로 당분간 한국 못 들어 오겠네."

못 들어온다는 태호의 말에 서현은 이번 사태의 여파를 피부로 느낀 듯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서현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아. 내 국적 정도로 네 불행을 막았으면 남는 장사지."

*

얼마 뒤 태호는 뉴욕으로 출국했다.

문제는 태호의 군대 문제는 국적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수술 뒤, 자택에서 기력을 회복하던 태호의 할아버지는 식구들이 숨기려고 했으나 나중에 군대 문제로 손자가 쫓겨가듯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얘기를 방송 등을 통해 들었다. 그 충격에 얼마 후 풍이 왔고,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뇌경색에 이은 뇌사, 그리고 바로 심정지가 왔다.

태호는 군대 갈 각오를 하고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병무청에서의 장례식 이후 출국 불가 및 입영 통지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고, 온 집안 식구의 만류에 가지 못했다.

군대로 인해 이제 막 만개한 태호의 경력마저 엉망이 되면 할아버지 죽음도 우습게 되어버린다며 엉엉 우는 숙영의 통곡에 태호도 한국으로 갈 수가 없었다.

고작 1년 반을 얻고자 한 대가로 그가 한국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태호가 가슴 아팠던 것은 회피한 게 사실이고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다는 자책감이었다.

그 자책감에 파묻혀 태호는 뉴욕의 집에서 술과 물감과 캔버스로 씨름하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처절하고 극도로 우울한 시간이었다.

태호가 뉴욕에 돌아오기로 한 지 사흘이 넘도록 출근도 연락도 없어 걱정하던 제마는 태호의 문자를 받고 태호의 집에 찾아갔다.

태호는 예정보다 훨씬 일찍 뉴욕에 돌아왔으며 뉴욕의 집에 칩거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는 제마였다. 집에는 술병과 음식 쓰레기, 깨진 거울, 물감과 칠해진 캔버스가 너저분하게 집 전체에 뒹굴고 있었다.

그림은 한결같이 푸른색 계통의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평소에 태호가 잘 그리지 않던 자화상과 나이든 노인의 초상화, 죽어가는 사람, 자살하려는 사람, 심지어 태호가 신성시까지 하던 빛의 마리아도 푸른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림 곳곳에 비행기와 공항 여권 등등이 그려져 있었고, 태호의 자화상의 눈은 핏발이 서 있고 또 어두웠다. 절망에 가득 차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초라했다. 마치 고작 이런 모습을 보이려고 한국에서 그런 야단법석을 떨었냐는 추궁이 담긴 눈빛이었다.

이렇게 휘몰아치는 감정들은 관객의 기분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이 우울증 환자라면 자살을 생각할 것 같고, 정상인 사람도 집에 걸어 놓고 오래 보면 우울증이 걸릴 거 같은 그런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림들이 자그마치 30점이 넘게 집안에 굴러다녔다.

제마 앞에 나타난 태호는 허옇고 푸석푸석한 얼굴에 다크서클이 광대뼈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머리카락은 기름기에 절어 있어 마치 참기름 바른 김처럼 번들거렸다.

제마는 눈물을 흘리며 태호를 뒤에서 안았다. 한국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호의 엉망이 된 얼굴과 저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서글퍼졌다. 그리고 이 그림들을 다 그린 태호가 겪었을 아픔이 예리한 칼끝처럼 자신의 가슴뼈에 깊숙이 박히고 주위를 후벼 파는 듯했다.

"제마, 괜찮아. 이젠 괜찮아."

"하지만 저 그림들은 그렇게 얘기를 안 해. 너 곧 죽을 사람처럼 하고 있어."

"내가 죽긴 왜 죽어. 이렇게 그린 건 내 의식 같은 거야. 난 잊고 싶은 기억이 있으면 그림을 그려서 잊어."

"이젠 정말 괜찮은 거야?"

"말했잖아. 괜찮다고."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는 태호.

"슬슬 정리해야지."

"그림은 버릴 거야?"

"아니. 이 그림도 내 일부야. 지금 당장 공개하기는 부끄럽지만, 나중에, 나중에 정말 다 정리가 되었을 때 그때 공개하려고 해."

"알았어. 그럼 이 그림들부터 치우자. 난 정말, 이 그림들 우울하다 못해 무서워."

태호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윌슨의 갤러리에 전화해 집에 그림을 정리할 직원과 청소 용역 직원들도 함께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주말에 미술관에 가서 설명하겠다며, 그림은 절대로 공개하지 말라는 요청했다.

갤러리 직원들과 청소 용역 업체 직원들은 난장판인 태호의 집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림을 수습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렇게 저녁 즈음이 되어서야 청소가 끝났고, 태호와 제마는 근처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제마의 집에 차로 이동했다. 제마는 차를 주차하고 난 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태호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어차피 집에 갈 차도 없잖아."

그리고 태호를 빤히 쳐다보는 제마. 그리고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살짝 내밀려는 찰라, 태호가 두 손으로 제마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이마에 키스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내일 보자." 하며 차에서 내려 길가에 택시를 잡으러 갔다. 여긴 정말 택시도 잘 다니지 않는데 말이다.

"바보. 멍청이. 그냥 집에 태워 달라 하지." 제마는 태호가 뛰어간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짓다 곧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출근한 태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국에 가기 전부터 해오던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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