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뉴욕1 (feat 서현)
병원에 도착한 태호는 아빠를 따라 서관 3층에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서관 입구에서 중환자실까지 이동하는 동안 태호가 이동하는 동안 태호 아빠와 태호를 제외하고는 마치 모든 게 정지된 것만 같았다.
병원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태호가 지나가는 것만을 지켜봤다. 태호가 입은 슈트는 자세히 보면 옷에 들어간 자수와 섬세하게 들어간 스트라이프만으로도 단순한 검은색 슈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최고급 슈트답게 풀 캔버스로 제작되었다.
캔버스란 상의의 바깥과 안감 사이에 들어가는 천인데 전통적으로는 말총으로 지금은 합성 소재로 만들어져 정장의 모양을 잡아주는 기틀 같은 역할을 한다. 크리스천은 남자 정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기에 슈트 제작을 위해 일부러 정장을 제작하는 테일러를 초빙해 공동 제작한 슈트였다.
태호는 크리스천은 정성과 마케팅을 생각해 최근 가능하면 크리스천이 제작해 주는 의상을 입고 다니는 편이었고, 오늘처럼 한국에 들어오거나 행사에 나갈 일이 있는 날은 늘 크리스천의 옷을 입었다. 물론 마크는 이 일로 엄청나게 삐쳤다.
중환자실 근처에 가자 할머니와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한 할아버지가 애처로웠던지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숙영의 두 눈이 뻘겠지만 이런 할머니를 옆에서 달래고 있었다.
태호가 근처에 서 있자 그제야 태호를 본 할머니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태호를 쓸어안았다. 순간 태호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두 눈이 벌게졌지만 참고 할머니를 안았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아니다. 이렇게 오면 된 거지.”
“할아버지는 괜찮으시다. 수술 잘되었대.” 옆에서 숙영이 말했다.
그렇게 모인 식구들은 점심을 같이 먹었고 태호는 저녁 시간 면회시간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저녁 면회시간에는 할아버지가 의식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 거의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이기에 전신 마취를 하면 간혹 못 깨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할아버지가 정신을 차리자 식구들 전부가 안도했다.
태호는 미술관 행사만 간단히 참석하고 돌아갈 계획을 변경해 할아버지가 퇴원할 때까지 병원에서 병간호를 도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퇴원을 하셨는데 서울에서 지내시라는 아들 내외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집이 편하시다며 대구로 내려가셨다. 그제야 태호도 시간이 되어 출국 전에 지인들과 연락하고 술 한잔 나눌 시간이 되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서현이 물어봤다.
“너 보려고 시간은 비워 놨는데 무슨 일 있어?”
“아빠가 강권하는 바람에 만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만나서 보니 나름 나쁘지는 않거든. 그런데 네가 보기에 어떤가 궁금해서.”
“네가 맘에 들면 그만이지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해?”
“왜 남자들이 보면 아는 거 있지 않아? 이 사람은 성실하다 아니다. 느낌으로.”
“네 아빠가 다 알아서 괜찮은 사람 소개해주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어. 좀 허풍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이 사람도 있는 집 아들이다 보니 허풍인 건지 진짜인지 구분도 안 되고. 만나줄 수 있어?”
*
태호는 일반 캐쥬얼 정장을 입고 약속 시각에 맞춰 이태원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비손으로 향했다.
식당 근처에서 서현을 기다렸는데 시간에 맞춰 나갔는데 정작 초대한 사람은 없기에 짜증이 살짝 날 찰나에 서현이 들어섰다.
"아, 미안. 시간 맞춰 출발했는데 근처에서 길이 너무 막혔어."
"괜찮아. 나도 지금 왔어."
"들어가자. 내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어."
"직접 예약했어?"
"아니, 그 사람이 예약했지. 뭐 비서가 했겠지만."
"비서가 있어? 재벌 집 아들인가 보네?"
"그 을지로 1가에 본사 있는 재벌 집 둘째 아들."
"와. 대단한데."
태호는 진심이라고는 병아리 눈곱만큼도 없는 감탄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우리랑 나이대가 비슷해? 꽤 차이가 날 거 같은데?"
"우리보다 한 5살 정도 많아."
"매너는 좋아?"
"어설프게 있는 집이랑 다르게 에티켓은 좋아."
"여자 관계는?"
"엄마 말로는 제대로 공부했고 사업 수완도 좋은 사람이고 하더라. 여자관계는 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긴 했는데 지금은 다 정리하고 깔끔하데."
"난, 이 결혼 찬성일세."
"난 심각해. 좀 진지해지면 안 돼?"
그리고 곧 얼마 뒤 서현이 얘기했던 그 사람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는 자신을 최정현이라고 소개하며 슬쩍 서현 옆에 앉았다. 그러자 서현은 바로 일어서서 태호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그가 무안해하거나 말거나 지금까지 서현은 그와 지금까지 확실히 선을 긋고 행동했다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애써 무안함을 감춘 그는 바로 태호에게 말을 걸며 이 상황을 넘기려고 애를 썼다.
“GL 그룹 경영 기획실에서 일합니다. 태호 씨는 혹시 어떤 일을 하시는지?”
“뉴욕에 있는 조그만 의류 회사에 다닙니다.”
“의류 회사면 보통 어떤 일을 하시나요? 그쪽이 워낙에 분야가 넓지 않습니까?”
“다양한 일을 합니다. 일단은 의상 디자인을 위주로 하는 회사인데, 고객 요청이 있으면 요청에 맞춰서 핸드백도 만들고 신발도 제작하고요. 또 그림도 그리기도 하고요.”
“무척이나 다양한 일을 하시네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Theo라고 런칭한지 얼마 안 된 회사에요. 아마 찾아보셔도 안 나올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정현은 태호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판단하였는지 좀 더 과감하게 나갔다.
“내가 태호보다 한 5살은 더 많은 형인데 말 놔도 되나?”
순간 태호는 어이가 없었고 그의 빠른 태도 전환에 놀랐다. 사람을 파악하려고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정말 무례했다. 태호는 그런 표정을 감추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초면에 말을 안 놓습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어서요.”
'이놈 봐라?'라는 표정을 짓고는 정현은 말을 이었다.
“천천히 알아가면 되겠죠. 형으로 둬도 모자란 사람은 아닐 겁니다.”
정현은 쿨 한 척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혹시 어떤 관계이신지?”
“예전에 썸 타던 친구였어요. 지금은 그냥 남사친이지만.” 서현이 대답했다.
“아, 그러시구나.”
정현이라는 사람은 서현에 대해 조사한 것이 전혀 없는 듯 태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태호는 의아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가만히 그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정현은 태호가 뉴욕에서 온 걸 알자 자신의 프랑스 유학 때의 얘기를 하며 자신의 잘난 척을 매우 재미없게 했다.
파리의 유력 TV 채널과 다큐멘터리까지 찍었고 파리 패션위크 기간에 패션쇼까지 참여한 경험이 있는 태호에게 그의 얘기는 매우 가소로웠지만, 자신이 특별한 거지 저런 잘난 척 정도는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잘난 척하면 태호가 끝판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별 생각 없이 하는 잘난 척이 저렇게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는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한참을 그가 떠드는 얘기를 듣다 보니, 파리 제4 대학에 유학한 듯 그쪽 지리를 얘기하는데, 태호가 듣기에 뭔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 학교가 이사를 갔나요? 그 위치가 아닐 텐데?”
태호는 초면에 실례인 줄은 알았지만, 정현의 얘기가 기도 안 차서 무의식적으로 한마디 했다.
정현은 인상을 살짝 굳히며 시간이 좀 지나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 뒤로도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태호도 화장실에 가는 중 화장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현을 만났다. 그는 태호를 보자 으르렁거리듯 말을 걸었다.
"어디 근본도 없는 집 자식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겁대가리 없이 굴면 너나 네 가족이 한국에서 살기 쉬울 것 같아?"
태호는 순간 머리를 띵 얻어맞은 듯했다. 그리고 곧 속에서 불같은 것이 훅 올라오는 오는 것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 말 그대로 서현이 엄마에게 전해 드리죠."
태호는 핸드폰을 들어 단축키를 눌렀다. 어제 데이터를 옮기면서 어렴풋이 봤던 기억이 남아 바로 연결할 수 있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라 김 관장과 통화가 되었다.
"관장님. 저 태홉니다. 네 안녕하세요. 지금 서현이랑 같이 있고 또 최정현이라는 분이랑 같이 있는데 혹시 아세요···? 잘 아시는구나. 네 그분이 저에게 한국에서 살기 힘들게 해주겠다고 협박을 하네요. 그래서 관장님이 아시는 분이랑 같은 사람인지 확인 좀 하려고요."
갑자기 핸드폰을 빼앗아 전원을 꺼버리는 정현.
"너 미쳤어? 어디서 관장님을 사칭해?"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내가 미쳤는지는 근본 있으신 당신이 내일 확인해 봐."
다시 핸드폰을 빼앗은 태호는 서현에게 돌아가 말했다.
"서현아 나갈 건데, 같이 갈래?"
태호는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물어봤고, 곧 정현도 들어와, "서현 씨 우리 자리 옮기시죠?"라며 약간은 다그치듯 물어봤다.
서현은 좀 당황한 듯 잠시 고민한 듯하더니 정현에게 다음에 보자고 얘기하고 태호를 따라 나가버렸다.
"관장님에게 전화해서 나 너랑 같이 있고 아까 전화와 관련된 내용은 너한테 다 얘기하겠다고 전해줄래?"
"어 알았어. 지금 전화할게." 서현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태호의 말을 전했다.
"우리 어디 가서 한잔하자. 내가 그분 덕분에 아~주 놀랐어. 좀 가라앉혀야 해."
근처 이자카야로 향한 두 사람은 사케 한 병과 안주를 보이는 대로 주문했다.
"일단 한잔하고 얘기하자."
서현은 이렇게 식식거리는 태호를 본 적이 없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술이 나오고 한 잔씩 따라 놓고 태호는 자기 잔을 비운 이후에 아까 화장실 앞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서현도 각 잔을 채우더니 쭉 원샷을 했다.
"크···. 술이 쓰네. 어쩐지 그 사람 만날 때마다 좀 싸하더라고."
태호는 그 정현이라는 사람이 했던 얘기를 곱씹으면서 어느 정도나 허풍이 들어간 건지 찬찬히 설명을 해줬다.
"난 이해가 안 되는 게 그걸 네 엄마 아빠가 몰랐을까?"
"글쎄. 듣고 보니 나도 이해가 안 되네. 웬만큼 비서실에서 체크할 텐데."
"슬쩍 물어봐봐. 네 엄마는 몰라도 아빠가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으실 거 같은데. 만약 그 정도로 잘 숨겼다면 연기를 잘한 거고. 하긴 그것도 능력이긴 하다. 크크."
"그러게, 확인해 봐야겠다. 아무튼, 오늘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인생 꼬였을 수도 있겠다.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결혼할 생각은 있었나 보지?"
"너 우리 아빠 알잖아. 내가 그 사람을 왜 만났는데? 아빠가 하도 날 괴롭히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만난 거야."
"그래, 알았다. 그건 그렇고 나갈 때 좀 태워줘. 너 기사 아저씨 부르고."
"쫄았어?"
"허. 너도 재벌에게 협박당해봐. 안 쪼나."
"흐흐. 걱정하지마. 내가 아빠한테 얘기해서 별일 없게 해줄 테니까."
"어이구. 고맙기도 하네요. 병 주고 약 주고."
한잔 더 쭉 들이키는 태호.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곧 한숨을 쉬면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