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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구하기1 (133/181)

디자이너 구하기1

“그건 조지. 재작년 인턴이었는데, 정말 최고의 재능이었어. 우리가 잡으려고 했는데,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샤넬에서 낚아챘어.”

“그건 세실리아. 5년 전 인턴이었는데, 걔도 잘했지. 우리 쪽 하고는 안 맞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마크하고 안 맞았어. 어디 갔는지는 몰라.”

“카이라. 러시아 출신의 디자이너. 정말 잘했지. 잡으려고 했는데 나가서 자기 브랜드 차렸어. 루블루라고 들어봤어?”

태호가 괜찮다고 고른 모든 포트폴리오를 제작한 디자이너들은 이미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럼 가능한 디자이너는 누구야?”

“지금 인턴 하는 애들?”

“그럼 처음부터 걔들 포트폴리오만 주지 그랬어.”

“네가 정말 특이하게 안 되는 애들만 골라서 그래.”

루카스는 폴더 3개를 골라 태호 앞에 펼쳐 보였다.

“이건 크리스천, 이건 덱스터, 이건 사라. 덱스터는 호주 출신에 로열 멜버른 공과 대학 졸업했고, 저쪽에 있는 크리스천은 메릴랜드 출신인데 학교는 영국에서 나왔어. 사라는 파슨스 출신이고 이번에 졸업했어. 셋 다 실력은 괜찮은데 네 눈에 찰지는 모르겠다.”

“저 크리스천은 머리 모양부터 맘에 안 드는데?”

태호는 구시렁거리면서 세 명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살펴봤다. 그래도 셋 중에서 크리스천이 그나마 좀 나아 보였기에 그 녀석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 녀석은 여기서 왜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하는 거지? 뽑히기는 의상 디자이너 인턴으로 뽑혀놓고? 루카스! 얜 왜 여기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하는 거야?”

"걔가 그걸 더 자신 있어 하더라고. 그래서 작업실에서 겉돌고 있어."

*

크리스천은 얼마 전 영국에서 졸업하고 꼭 같이 일해보고 싶었던 마크 제이에게 인턴 신청을 했고, 그 신청이 받아들여졌을 때는 날아갈 듯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뉴욕에 도착하자 자신이 맞닥뜨린 건 전투적인 좀비들이 밤낮 쉬지도 않고 미친 듯이 일하는 작업실 현장이었다.

온종일 마크와 주변 디자이너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하루가 다 갔다. 물론 옆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야 많았지만, 하루에도 몇 벌의 옷이 디자인되었다가 폐기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실력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에서의 그 고생을 하며 제작한 옷들은 그냥 연습 혹은 아마추어 작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의 디자인 한 것보다 훨씬 나은 의상들이 수준 이하라며 하루에 수십 번을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각개전투를 해왔다면 마크는 매일 매일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대전은 못 치러도 국지전 정도는 치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눈치를 살피며 자신도 제작에 참여할 기회가 올지 지켜봤다. 아무리 자신이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지원했다지만 한 달이 다 지나고도 자신에게 단 한마디 의견을 묻는 사람조차 없다. 심지어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벨라조차 말이다. 점점 자신이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인턴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는지 고민하던 어느 날 허여멀그리한 동양인 하나가 작업실에 나타났다. 직원들과 다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봐서는 다들 안면이 있어 보였다. 자신과도 인사를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마크와 티격태격하기에 파트너인가 싶었지만, 제마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는 것으로 봐서는 마크의 파트너는 아닌 거 같았다. 가만 보니 벨라하고도 꽤 친한 거 같기도 했다.

다음날 책상 위에서 포트폴리오를 쌓아두고 보더니 자신을 보고 뭐라 뭐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좀 떨어져 있고 워낙에 사람이 많아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눈치로는 자기와 다른 인턴을 두고 얘기를 나누는 거 같았다.

나중에 누구인지 들었을 때는 기절할 듯 놀랐다. 그 유명한 Faceless 복원 화가이자, 생존작가 중 제일 비싼 그림 값을 자랑하는 태호였다.

루이뷔통 디자이너는 단지 협업으로 하는 부업일 뿐인데 워낙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그림 실력이 좋아 마크는 가능하면 태호를 자신 옆에 오래 두고 작업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같이 작업하는 기간은 일 년에 길어야 두 달 정도라고 한다. 물론 본업을 생각하면 두 달도 짧은 건 아니지만, 마크가 디자인이 안 될 때면 태호가 옆에 없는 걸 매우 아쉬워한다고 들었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왔을 때도 놀랐지만 태호를 정확히 알고 나면서 더 놀랐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두고 뭔가 저울질을 한 거 아닌가 하는 기대감에 살짝 설레었는데 태호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어 곧 실망했다. 아무래도 여기 생활을 곧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

태호는 인턴들 실력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으나 마크가 옆에서 자신을 들들 볶는 바람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지난 일 년간 못다 해본 디자인을 다 몰아서 하려는 듯 일을 아주 미친 듯이 몰아주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마크에게 인턴 좀 테스트해봐도 되는지 물어봤다.

“인턴인데 되겠어?”

“이 바닥이 언제 나이 따졌다고 그래. 나이 먹어봤자 얼마나 달라진다고.”

“뭐 틀린 것도 아니긴 한데··· 뭘 테스트하겠다는 거야?”

“실력”

“Theo 브랜드용으로?”

“예스.”

“충분할까?”

“해보면 알겠지.”

“좋아. 그럼 해봐.”

마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호는 세 사람을 불렀다.

“내가 요즘 디자이너를 알아보고 있어요.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난 Theo라는 LVMH 산하 브랜드의 사장이기도 해요. Theo는 최고급 브랜드를 지향하고 초상화 제작 및 의상 제작을 하는 회사에요. 관심 있어요?"

“우리가 뭘 하면 되죠?”

대답은 사라가 했지만, 덱스터나 크리스천도 일생의 기회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화가예요. 알아요?"

"잘 알아요. 우리가 의상 디자인을 하긴 하지만 설마 뉴욕의 태호를 모를 정도로 예술에 무지하진 않아요. Theo는 처음 들어보지만요."

사라가 호감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태호는 Theo의 사업을 간단히 소개한 후 제안했다.

"난 초상화 제작에 필요한 의상이나 액세서리를 만들어 줄 디자이너가 필요해요. 고객이 오면 그 고객에게 맞는 몸에 걸치는 모든 걸 제작해야 합니다. 아! 속옷은 안 해도 돼요. 그림에 드러나는 부분만 제작하면 되니까."

"하하."

"도전하시겠어요?"

"물론이죠."

세 사람 다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봉투에는 5천 불이 들어있어요. 재료비와 이 일을 하는 인건비가 포함된 금액이고요. 혹시 모자라면 얘기해요."

태호는 각자에게 봉투를 전달하며 말했다.

“기한은 이번 무대가 끝날 때까지예요.”

셋은 그 바쁜 와중에도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의상을 디자인하는데, 정말 눈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

한 달 후, 늘 그렇듯 마크는 지난 일 년간 보지 못했던 엄청난 무대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태호는 패션쇼 다음날 정오쯤 인턴 세 명과 제마의 모델 친구 3명을 불러 점심을 같이 먹고 아무도 없는 마크의 작업실에서 런웨이를 열었다.

태호는 세 사람이 바쁜 시간을 쪼개 의상을 제작하고 핸드백 같은 액세서리를 만드는 것을 알았지만, 특별히 그쪽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바빠서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이 세 사람의 의상을 보니 자신이 너무 신경을 안 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모두 다 고생했어요. 세 사람 다 정말 훌륭한 옷을 제작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호가 정말 만족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세 사람 중 둘은 태호가 초상화에 필요하다는 의견을 잘못 해석했는지 극한의 아방가르드한 옷들을 선보여서 태호가 목덜미를 잡게 했다. 평범한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게 옷이 아니라 잡아먹는 옷을 제작해서 들고 왔기 때문이다.

사라는 집에 커다란 바비 인형이 있다면 딱 입히고 싶은 귀여움을 한껏 살릴 수 있는 옷을 제작했다. 무릎 위까지 오는 원피스 치마였는데 다양한 꽃무늬가 줄무늬처럼 층을 이루고 있었다. 몸매가 좋은 여자에겐 무척이나 어울렸지만, 색이 워낙 강렬해서 일반인이 입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덱스터의 옷은 코르셋을 연상시키는 장식이 있고 다리의 노출을 강조하는 듯한 짧은 붉은색 원피스였다. 의상은 아름다웠지만,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크리스천만 초상화에 어울리는 옷을 제작해서 선보였다. 실크를 온몸에 감싸는 옷이었는데 그 옷의 주름에 신경을 정말 많이 썼는지 그 주름 하나하나가 빛에 반짝이면서 가리고 싶은 몸매는 가리고 살리고 싶은 몸매는 살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다.

"승자에게는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옷은 잠시 두고 가시겠어요? 힘들게 제작했을 텐데 마크에게 소개하고 싶네요."

이는 순전히 고생한 세 사람에 대한 태호의 호의였다.

"옷은 꼭 돌려 드릴게요. 처음에 드린 5천 불로는 지금 만들어 온 옷의 반의반도 못 살 거 같네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은 가져가도 보관할 곳도 없는 짐이 될 것 같아서였다.

태호는 나중에 크리스천만 조용히 불러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진짜야? 내가 이겼다고? 정말 정말 고마워!"

크리스천은 좋아하면서도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겠냐는 식으로 묻지 않고 뜸을 들였다. 사실 크리스천은 태호의 제안은 기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난처했다.

"태호. 미안한데 두 달 전 신청했던 프로젝트 런웨이에 도전자로 뽑혔더라고. 얼마 전에 연락이 왔어. 이거 끝나고 결정하면 안 될까?”

태호도 들어본 적이 있던 프로였다. 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프로그램이라 그의 말을 이해는 가지만 태호는 나빠진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우승하는 게 Theo의 디자이너가 되는 그것보다 나은가?"

태호의 퉁명한 목소리에 크리스천이 당황했다.

"아,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야!"

빈정이 상한 태호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그 프로그램 끝나고 결정해. Theo의 디자이너에게 맞는 성적을 거두길 바랄게."

크리스천의 프로그램에 대한 부담감은 배로 증가했다. 우승이라도 하지 못한다면 태호의 제안은 없던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얼마 뒤.

프랑스로 넘어가기 전 마크는 태호와 함께 세 사람의 옷을 확인했다.

"어느 회사 인턴인지 실력이 나쁘지는 않아."

마크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초상화에 어울리는 의상은 크리스천의 옷이네. 너도 이거 뽑았지?"

"어."

"난 크리스천의 옷보라는 덱스터의 옷이 더 좋아. 루이뷔통에 더 어울리기도 하고. 하지만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보면 크리스천이 더 나을 거야."

"어째서?"

"내 눈에는 그의 디자인이 더 수준이 높아 보이거든. 이 실크로 몸매를 감싸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디자인이 기존 의상인 코르셋을 재활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고차원이니까."

이미 감정이 상한 태호에게 크리스천을 다시 콜 하라는 마크의 말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다.

"나도 그 녀석을 못 알아보긴 했지만 별 영향은 없어. 이런 재능이 한두 명도 아니고. 하지만 너로선 놓치긴 아쉬울 거야. 사실 네 조건에 완전히 부합하는 디자이너니까. 이런 디자이너 구하기 쉽지 않다."

마크는 그러다 생각이 났는지 프로젝트 런웨이를 언급했다.

“너 프로젝트 런웨이가 평가위원으로 나가보지 않을래? 나한테도 계속 제안이 왔는데 지금까지 거절했거든. 올해도 전화가 왔는데 일단은 대답을 미뤘어. 네 생각이 나서. 어때? 나가볼래? 혹시 알아? 네가 가서 크리스천보다 더 괜찮은 디자이너를 발견할지?"

"가서 뭘 하면 되는 건데?"

"조지가 나중에 전화로 설명해 줄 거야."

조지는 태호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고 태호는 잠시 고민한 후에 참석하기로 했다. 크리스천 정도 되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 참가하는 것을 봐서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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