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작3
촬영은 중반을 넘어 종반을 향하고 있었고 이제는 뉴욕에서의 촬영만 남았다. 태호는 프랑스에서 넘어온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디너 파티를 열며 환영했다.
다음날 바로 촬영에 들어갔는데, 앙리와 아내 조에가 처음 살롱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조에가 치명적인 매력을 풍기며, 그림 실력은 파리에서 제일이지만 흉측한 외모 때문에 나이를 들도록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본 그래서 숙맥인, 앙리의 혼을 쏙 빼놓는다.
첫눈에 반한 앙리는 조에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하다 나중에는 몰락하게 되는, 스토리상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이자 조에가 파리 제일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살롱에서 한껏 뽐내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볼 것이 많은 신이기도 했다.
태호는 촬영 날 현장에서 나탈리를 보고 살짝 넋이 나갔다. 저 작은 체구의 배우에서 나오는 성적 매력이 이 큰 살롱 전체를 가득 채우고 남아 분위기를 끈적끈적하게 했다. 저 매력을 카메라가 다 담을 수나 있는 걸까 생각할 때 언제 왔는지 제마가 옆에서 태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입에 벌레 들어가겠어.”
순간 화들짝 놀란 태호가 어버버 거리며 옆에 제마를 쳐다봤다.
“언제 왔어?”
“한 2분 되었나? 너 거의 5분 동안 입 벌린 채 있었던 거 알아?”
“그랬나?”
“넋을 놓고 보더라?”
“아무리 분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저런 느낌 내기가 쉽지가 않을 텐데. 정말 자연스럽게 나와서 놀랐어.”
“나도 저런 분위기 낼 수 있다 뭐.”
“잘 상상이 안 되는데?”
“보여줘?”
“아니. 다음에.”
태호는 촬영 현장을 말없이 바라봤고 제마는 다음에 제대로 자신의 섹시함을 드러내겠다고 다짐했다.
촬영 중 잠깐 쉬는 시간이 되자 태호는 카메라를 꺼내 나탈리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다양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나탈리에게 몰아세우며 다양한 포즈를 요구하던 태호는 나중에는 주드로까지 불러 자신이 꾸민 살롱을 배경으로 영화 포스터라도 찍을 기세로 셔터를 눌러댔다.
태호가 두 배우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자 촬영은 잠시 중지되고 다들 태호가 하는 것을 지켜봤다. 감독인 래리도 영상을 다루는 사람들인 만큼 사진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태호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더니 아마추어는 아니라고 생각한 듯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사진을 찍고 나서야 태호는 홀 전체를 사진에 완전히 다 담을 수가 있었고 나서야 작업을 중지했다. 1층 작업실로 내려온 뒤 메모리에 담긴 사진을 쭉 다운 받아 DVD로 옮겼다.
그러는 동안 사진 중 괜찮은 사진을 몇 개 골라 그 자리에서 고성능 잉크젯 프린터로 A2 용지 크기로 프린팅을 했다.
태호가 다시 4층으로 올라왔을 때는 촬영이 다시 진행 중이었는데, 태호는 다시 휴식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 감독에게 다가가 아까 출력했던 자료들을 건넸다.
“오. 이건 정말 괜찮은걸? 이것도 나쁘지 않아. 영화 포스터로 사용해도 될 정도인데?”
래리는 연신 감탄을 하더니 파일을 넘겨 달라고 요청했고 태호는 DVD를 넘겼다. 사진을 본 나탈리도 크게 만족해하며 사진을 달라고 하기에 태호는 다시 DVD를 제작해야 했다.
주드로는 나중에 분장을 지우고 나면 다시 찍어달라고 했기에 촬영이 종료된 이후 분장을 지우고 훤칠한 모습의 주드로를 다시 찍었다.
살롱에서의 장면이 끝나자 영화의 마지막인 앙리가 Faceless를 그리며 죽어가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앙리는 마치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푸석한 피부에 떡진 머리와 거적 같은 옷을 걸치고 마지막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 앞에 서 있었다.
죽음이 짙게 내리어진 몸이었지만, 앙리는 죽은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천사와 악마의 환영을 보면서도 온 힘을 다해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종종 피 가래가 섞인 기침을 하고 기침을 하다 흔들려 튄 물감을 다시 정성스레 수정한다. 촬영장에는 들리지 않지만,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이 마치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듯하고 장면 전체가 앙리의 삶의 목적이 마치 이 그림 하나를 남기기 위해서인 듯 숭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렇게 3분에서 5분, 길면 7분 정도의 시간을 분노, 회한, 죄책감으로 가득 찬 앙리의 마지막 생의 모습을 담담히 담았다. 그리고 촬영은 끝이 났다.
태호는 주드로가 어떻게 그리든지 간에 촬영이 중단될 때마다 다가가 그림을 수정했다. 옆에 조수들까지 전부 기다리고 있다가 주드로가 그린 부분 전체를 지워버리고 밑 작업을 한 후 태호에게 건넸다. 태호는 그 위에 다시 붓칠하여 Faceless를 다음 촬영에 필요한 부분까지 그렸다. 필요하면 앙리의 모습으로 분장해 태호가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촬영이 끝나자 제작진 모두가 힘들게 촬영한 주드로를 격려하면서도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호와 8명의 조수 전원이 달려들어 완성한 그림이었다. 완성도도 놀랍지만 이렇게 빠르게 작업을 해 대작을 완성한 태호와 조수들의 실력도 경이로웠다.
뉴욕에서 촬영을 마친 제작진은 영국으로 돌아가 영화 후반 작업에 돌입할 것이다. 영상을 편집하고, 음악과 음향을 넣고, CG 등 필요한 특수효과를 입힐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시간은 짧게는 9개월에서 길면 1년이 걸리는데, 종종 상영 날짜를 맞추기 위해 더 걸리기도 한다.
*
영화 촬영은 종료되었지만, 태호는 쉴 틈이 없었다. 그림을 보거나 주문하려는 미술관 관계자들과 개인들로 윌슨의 갤러리는 미어터졌고 덩달아 태호의 살롱을 찾는 사람들도 같이 늘었다.
주문과는 별개로 인터넷에 공개된 살롱을 보러 정말 많은 사람이 작업실에 문을 두드렸다. 일부는 살롱에서 최고급 파티를 개최하자는 사업 계획서를 들고 오는 사람들부터 영화나 화보를 찍기 위한 문의를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영화 개봉 때까지는 어떠한 촬영을 할 계획이 없습니다."
태호는 그림을 확인하고자 하는 미술관 관계자들의 출입만을 허용했다.
처음 들어보는 박물관의 직원인 듯한 사람들로부터 주문이 들어오는데 사인을 넣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진 공개 이후 예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많았다.
태호는 그런 주문을 듣는 즉시 거절을 했는데 끈질기게 요구하는 경우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나중에 보면 대부분 개인 갤러리에서 위작을 유통하기 위한 주문이었기에 직원들에게 절대로 위작 제작에 참여하지 말아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더불어 그림 주문으로 생긴 수입을 아낌없이 직원들에게 풀었다. 위작을 제작하는 것은 범죄 행위고 이에 참여하는 경우는 대부분 돈이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
살롱이 소개되고 난 후 미술계는 태호가 그린 그림이 위작이냐에 대한 논란부터 저런 그림을 굳이 태호 정도 되는 위치의 화가가 그렸어야 했느냐는 윤리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이슈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태호는 일절 대응을 삼가고 비서를 시켜 비난하는 사람들의 명단만을 추려 놓고 있었다. 나중에 이 사람들과 비즈니스는 지금 상황을 꼭 고려하겠다고 다짐하며 말이다. 그래도 태호가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바로 위작을 만들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리는 데 있었다.
먼저 태호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가격도 만만치 않게 비쌌을 뿐만 아니라 위작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그림 구석에 정말 수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태호의 사인을 넣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같이 작업한 조수들의 명단도 넣었다.
그림 곳곳에도 여러 가지 위작 방지를 위한 장치를 했다. 예를 들어 19세기 의상에 Theo 로고를 넣는가 하면 발레리나의 의상실 탁자에 루이뷔통과 닮은 핸드백이 버젓이 놓여 있었고, 손톱에도 문신처럼 Theo 로고를 넣었다.
물론 그냥 지나치듯 보면 보이지는 않아 관람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거의 숨은그림찾기 수준으로 마음먹고 찾으면 보일 정도였다.
여기에 철저히 가장 최근 유행하는 혹은 19세기에는 전혀 없었던 물감만을 사용했다. 그림에서 티끌만 한 피그먼트라도 검출할 수 있으면 이 작품이 아무리 빨라야 20세가 후반에 제작된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위작 논란이 끓어오를 때쯤 미술관은 거의 모든 구매 계획을 백지화했지만, 개인 컬렉터들은 그렇지 않았다. 태호의 살롱이 마치 모델하우스라도 된 듯, 자신의 집 일부를 살롱처럼 꾸며놓고 태호에게 잔뜩 주문을 걸었다.
태호는 한국의 ‘호’ 개념을 도입해서 그림의 크기에 따라 비용을 책정했는데 Faceless의 크기와 유사한 100호짜리 캔버스를 백만불 정도의 가격으로 책정했다. 가장 먼저 주문을 한 사람은 스티브 코언으로 이천만 불의 계약을 체결하면서 태호가 영화를 위해 그려놓은 Faceless 쌍둥이 그림까지 손에 넣었다. 그 뒤로 론 로더가 천오백만 불 계약을 그리고 마크도 삼백만 불짜리 계약했다.
비싸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자기 것부터 먼저 그려달라고 떼를 쓴 후 돌아갔다. 마크는 이제 진지하게 집을 살 궁리를 했다. 순전히 그림을 보관하고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호텔에서 생활했던 마크다.
이번 주문 덕분에 태호도 재정적 측면에서 한시름을 놓았다. 비서 등 사무직 직원 둘을 제외하고도 8명이나 되는 조수는 태호에게 은근한 부담이었다. 숫자는 많았지만 그림 솜씨가 아까워 고용했고 한동안 성장하도록 여러 측면에서 도왔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제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지난 8개월간 거의 찍어내야 할 정도로 제작할 작품들이 많았는데 그 물량을 고스란히 처리한 것이었다. 이젠 직원을 더 뽑아야 할 정도로 제작할 작품이 많았고 밀려드는 주문에 몇 년은 주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태호는 조금 더 독자노선을 추구하기로 하고 이번 SS 시즌을 마지막으로 마크와의 협업 시 두 달을 고스란히 투자하기보다는 카츠키처럼 이 주 정도로 협업 기간을 단축하기로 했다. 더불어 이번 기회에 마크에게서 Theo의 디자인을 책임져 줄 사람을 찾기로 했다.
벨라를 빼 오던 다른 누군가를 찾던지 말이다. 이유는 영화 촬영 이후 한동안 안 받았던 초상화 주문을 다시 받기 시작했는데 초상화도 주문이 늘 조짐이 보이면서 점점 LVMH의 다른 디자이너에게 손을 벌이는 데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벨라를 Theo에 보내 달라고? 너도 예전처럼 안 온다고 하면서 벨라를 빼가면 난 어떻게 일하라고?”
“우주의 기운을 받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기운 너나 실컷 받아. 벨라는 안돼!”
“다른 디자이너는? 쓸만한 사람 하나 줘.”
“정말 주고 싶어도 없어. 차라리 네가 찾아봐.”
“나 벨라 찾는 것도 힘들었거든. 그 짓을 또 하라고? 그냥 있는 사람 하나 줘. 못 구하면 내가 가서 옷 디자인을 해야 할 판이라고.”
“그것도 나쁘지 않아.”
“농담 하지 말고!”
“나도 알아봐 줄 테니까 너도 여기부터 알아봐. 너 인사과에 얘기했어? LVMH 그룹 내에 있는 디자이너에게 먼저 잡 오퍼를 먼저 해봐.”
할 수 없이 태호는 그룹 내 공고를 냈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호시탐탐 마크의 작업실에서 빼갈 디자이너가 없는지 살펴봤다. 며칠 뒤, 마크의 조수인 루카스가 포트폴로오를 들고 나타나 태호 앞에서 펼쳐 보였다.
“이거 지난 몇 년 사이 여기서 일한 인턴들 포트폴리오인데 한번 보고 괜찮은 애들 봐봐. 우리가 하도 인턴을 까다롭게 골라서 다들 기본 실력은 있으니까.”
한참을 뒤져보던 태호는 포트폴리오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건 누구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