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화 제작1 (130/181)

영화 제작1

둘은 미술관을 나와 태호의 작업실로 이동해 태호가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 제작한 그리스도와 12사도와 Faceless의 쌍둥이 그림을 보여줬다. 둘은 그림 앞의 꽤 푹신한 소파에 앉아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그림을 감상했다.

래리는 이미 영화 시나리오까지 본 상태이기에 이 그림들이 어떤 용도로 그려졌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 그림들을 보니 차라리 그 시나리오를 영화로 제작해 보고 싶군요.”

이미 래리에게 소설의 영화화와 시나리오에 따른 영화 제작이 별도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는 정말 대부분이 다른 내용이라 동시에 제작이 되어도 내용이 겹치거나 하는 부분은 없었다. 다만 태호의 일감은 몰리겠지만 태호는 사람을 더 뽑아서 해결할 생각을 했다.

“하하. 제가 제작해 드릴 앙리 보나의 젊은 시절 그림들을 보면 그런 생각도 안 드실 겁니다.”

둘은 한동안 영화에 소품으로 필요한 그림들로 뭐가 있을지 의견을 교환한 후 헤어졌다. 그리고 한 달 뒤 저작권과 수익 배분 등에 대해 논의를 거친 후 런던에서 계약서에 사인했다.

래리가 가고 이틀 뒤 캐서린이 뉴욕으로 날아왔다. 바쁜 그는 태호를 LA로 초청했지만, 태호는 전시회와 작업실에 있는 그림들을 볼 기회라며 뉴욕으로 그를 불렀다. 남편인 프랭크 마셜과 뉴욕으로 날아온 캐서린은 태호와 미술관과 작업실을 돌며 Faceless 쌍둥이 그림을 포함한 태호의 그림을 감상하고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뒤이어 몇 가지 계약 내용에 대해 논의를 했지만 얼마 안 돼 캐서린은 태호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림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싶으시다고요? 정확히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저 Faceless 쌍둥이 그림에 대한 권리를 암블린 엔터에서 가져간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나중에 내가 저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요?”

“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그림은 가능하겠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는 건 아시죠? 나중에 내가 비슷한 그림을 그리게 되면 암블린 엔터에서는 어떤 식으로 법적 권리를 주장할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똑같은 그림만을 말합니다. 비슷한 그림을 상관없죠."

"똑같다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의 기준이 뭔지 애매하군요.”

“확대나 축소했을 때 일대일 매칭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대일 매칭이든 말든 캐서린이 내건 조건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한 건 그런 복잡한 조건이 아닙니다. 이 그림들에 대한 모든 권리는 저한테 있고 암블린 엔터에서 이 영화에 한해서만 이 그림들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그 조건은 우리의 앞으로 마케팅이나 영화에 대한 권리 행사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잠깐 우리 같이 조건들에 대해 조율을 해보지.”

이때 대화에 끼어든 프랭크였다.

“우리는 자네의 작품 활동을 방해할 의도가 전혀 없네. 캐서린, 태호의 작품 활동을 제한하는 어떤 조항이라도 계약서에 담지 말아야 해.”

“하지만 프랭크, 저 그림에 대한 권리를 가져오지 않으면 영화로 인해 높아진 인지도로 발생하는 추가 수익을 대부분 놓치게 되는 거라고요.”

“캐서린, 난 그 수익을 보고 이 시나리오를 쓴 겁니다. 시나리오를 팔아서 내가 손에 얼마나 쥐겠어요? 몇만 불? 몇십만 불? 그게 나한테 의미가 있는 돈이겠어요?”

“태호, 난 태호의 시나리오만을 보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그림까지 같이 고려해서 온 겁니다.”

“캐서린,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난 내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건 별말 안 하겠지만 내 작품들을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태호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프랭크는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캐서린, 태호.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다시 얘기하는 게 좋겠군. 감정적으로 나설 일도 아니고. 비즈니스 아닌가? 오늘 그림 소개는 고마웠네. 이건 진심이고 왜 자네를 뉴욕 최고의 예술가라고 손꼽는지 알겠어.”

두 사람은 곧 떠났고 태호는 작업실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소금을 찾았다. 당연히 소금은 없었고 근처 식품점에서 소금을 기어이 구매했다. 음식용 고운 소금이었지만 길가에 한껏 뿌리며 말했다.

"누굴 호구로 아나?"

경찰이 봤다면 경범죄로 벌금을 물 수도 있었을 정도로 많이 뿌렸다.

*

며칠 뒤 프랭크는 원점에서 재논의 중이라는 말로 일이 틀어졌음을 알려왔다. 태호는 이렇게 골치가 아파질 바엔 시나리오 쪽은 천천히 보고, 먼저 책을 영화화하자고 제안한 래리의 영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래리가 생각한 순 제작비와 광고비 (Prints & Ads)는 합쳐서 천오백만 달러였는데, 여기에는 태호가 담당할 그림 등에 대한 소품 비용은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림에 대한 권리는 오롯이 태호가 갖는 대신 그림, 제작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감당하고 추후 영화 흥행에 따른 러닝캐런티를 더 많이 받는 조건이었다.

여기에 래리는 시나리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많은 부분을 태호와 협의를 했는데 태호가 요청한 내용 중 한 가지는 출연 배우의 외모에 대한 것이었다.

"추남이거나 추남에 가까운 배우를 캐스팅하자고?"

"네. 그래야 앙리의 행동이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뭐가 말인가?"

"앙리는 지인들이 다 말렸던 결혼을 강행했어요. 아내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없었다면 결혼 후에 불륜을 일삼던 아내를 용서하는 앙리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동인이 바로 그의 외모라는 거죠."

"아이디어는 이해하는데 그러다 영화 흥행에 치명타가 될 수 있어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일단 내가 아이디어를 내 볼 테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세."

며칠 후 래리는 대안을 마련해 태호에게 연락했다.

"일단 연기력이 보장된 배우 중에 외모가 떨어지거나 그런 분장이 가능한 배우를 찾아보자고."

*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인 Faceless는 태호가 촬영장에서 직접 그리는 것으로 했다. 영화의 마지막 신 대부분이 Faceless의 제작 과정이기에 태호가 주인공으로 분장한 후 그리면 됐다. 어차피 뒷모습만 찍기에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그림을 걸 생각을 하자 떠오른 건 그림을 걸 장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만 열심히 그려서는 충분한 장면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차라리 세트장을 만들어 버릴까?"

주위에 브레이크를 걸 사람이 없다 보니 태호는 바로 영화 세트장 제작 업체 혹은 인테리어 업체를 수소문하고 용역을 맡겼다. 태호의 작업장 4층에는 과거 학교 운동장으로 쓰던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을 19세기 파리의 살롱이나 궁전으로 꾸밀 생각으로 견적을 뽑자 간단히 100만 달러 이상이 나왔다.

"뭘 만든다고?"

"영화 세트장이요."

래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세트장 제작 계획을 밝혔다.

"나도 그게 고민이긴 했는데. 개인 미술관을 빌려서 하거나 그래픽 작업으로 대체하려 했거든."

"그러면 되나요. 영화에 나올 장면 중에 가장 볼만한 장면일 텐데 그래픽으로 하면 안 되죠. 바로 티가 날 텐데요."

"그렇긴 하지. 그럼 그렇게 하지. 대신 이는 영화 제작비용에 포함되지 않네. 대신 그 돈은 다른 곳에 쓰도록 하지."

"알았어요. 참, 미술팀과 회의 좀 잡아주세요."

"무슨 일인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각 등장인물의 외모, 복장, 성격에 관해 설명해 주려고요. 들으면 영화 준비하기 수월할 거예요."

"알았네. 내 전달하지."

*

큰 틀에서 영화를 어떻게 찍을지에 대해 정리가 되자 태호, 래리, 미술감독 내정자, 이렇게 셋이서 영화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림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화가의 일대기를 영상에 담아야 하는 만큼 정말 많은 수의 그림이 필요했고 이는 전부 태호의 몫이었기에 어느 정도까지 커버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제일 중요한 건 살롱전이야. 거기서 우승하는 앙리의 모습이 담긴 장면이 들어가야 해. 그의 인생의 황금기를 대변하는 장면인데 대충할 수 없어. 그쪽을 준비해 줄 수 없을까?"

"살롱이요?"

래리는 이게 상당히 무리인 부탁인 줄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영화 세트장을 만들겠다는 열의를 보이는데 그림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많이 그려야 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찔려본 것이었다. 그걸 태호가 바로 물었다.

"어떤 식으로 꾸미고 싶으신 거예요?"

태호의 긍정적인 반응에 래리는 반색했다.

"19세기 파리 살롱의 모습을 담을 수만 있다면 난 만족하네. 자네가 안을 가져오면 큰 무리가 없는 한 따를 생각이야."

래리는 영화 제작비를 줄일 찬스였기에 웬만한 안은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살롱전에는 그림이 정말 바닥부터 벽 끝까지 빽빽하게 걸려요. 각 벽에 걸려야 하고 대형 작품도 많아야 하는데 대충 생각해도 100여 점 이상의 그림이 필요한데요?"

"안 되나?"

"흠. 안될 건 없죠. 그럼 살롱도 하나 만들어야 하겠네요?"

"그래 주면 나야 좋지."

래리는 태호가 총대를 메어 주겠다고 하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반대로 태호는 어떻게 해야 살롱을 만들 수 있을지 골몰했다.

"기존 초상화 작업은 마무리를 짓고 추후 6개월간 최소한의 초상화 주문만 받으세요. 우리는 살롱전에 들어갈 작품들을 제작할 겁니다."

살롱전 작품 제작에 들어감과 동시에 4층 일부는 앙리가 Faceless를 작업하던 빈민가의 집처럼 꾸미고 나머지는 루브르궁의 살롱처럼 꾸밀 생각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가뿐히 150만 달러가 넘게 들었지만, 태호는 계약서에 고민하지 않고 사인했다. 4층을 어떻게 써야 고민했는데 이렇듯 사용 방안을 제시해 준 래리에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였다.

태호는 아카데미 그림은 이렇게 그렸으리라는 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크다 못해 거대한 대작들을 거침없이 스케치해 나갔다. 그중 몇몇 작품들은 너무나 크기가 커 복도로 옮길 수가 없었기에 나중에 유리창을 떼어내고 옮겨야 할 정도로 큰 작품들도 있었다.

태호가 스케치를 하고 어떻게 채색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면 조수들이 달라붙어 채색을 시작했다. 채색이 마음에 안 들면 태호가 그 자리에서 수정 방향을 제시하거나 직접 붓을 들어 고쳐버렸다.

그렇게 8명의 직원이 다 유화 제작에 몰두하자 태호도 중요한 그림들은 직접 채색을 했다. 같이 작업하던 조수들도 혀를 내두르며 질려 할 만큼 배는 빠르고 정확한 붓 놀림이었다. 그림이 완성되면 인테리어 공사가 완료된 4층으로 가지고 가서 작은 그림은 아래에 큰 그림은 위쪽에 걸었다.

거대한 종교화부터 인물화, 역사화까지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잔뜩 받아 이제는 흘러넘치는 그림들을 하나둘 걸 때마다 태호의 작업실 4층은 루브르궁으로 변해갔다. 과거 학교 운동장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멋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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