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한국행
태호는 비행기에 들고 타는 손가방 이외에는 짐을 안 챙겨가는 편이다. 미주로 출발하는 비행기 게이트가 이민 가방으로 늘 정신이 없는 것과는 반대였는데, 휴대하는 여행용 가방 하나, 슈트 가방, 그리고 신용카드가 들어간 지갑이 보통 챙겨가는 짐의 전부다.
하지만 이번에 챙겨가는 짐이 좀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가방에 들어 있는 네 개의 루이뷔통 백은 바로 세관에 잡혔다.
“신분증과 가방 영수증 부탁드립니다.” 태호는 주섬주섬 여권을 꺼내 보내줬다.
“영수증은요?”
“제가 루이뷔통 디자이너입니다. 이 가방들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했죠.”
태호는 준비해 둔 사진을 꺼내 세관 직원에게 보여줬다.
“이런 사진들은 공식적인 문서가 될 수 없습니다. 재직 증명서 같은 공식적인 증빙이 필요합니다.”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찍은 사진들로 작업실에서 몇 장 찍어둔 사진들이었는데, 깐깐한 세관 직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진 이외에 어떻게 루이뷔통 직원인 것을 증명하라고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제가 루이뷔통 뉴욕 본사 소속이긴 한데 그래도 알 수도 있으니. 혹시 영어 되세요? 지금 아마 야근하고 있을 양반들이라.”
“가능하면 한국 본사로 하시죠. 외국 기업이면 증빙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디자이너 가방 하나에 싸게는 천만 원에서 비싸게는 삼천만 원까지 거래되는 것을 생각하면, 고급가방의 세율인 50%를 적용 시 거의 수천만 원을 세금으로 내야 했기에 자존심을 굽혔다.
“루이뷔통 코리아입니다.”
“루이뷔통 본사 직원인데요. 혹시 인사과 직원과 연락할 수 있을까요? 지금 공항인데 세관 직원분들이 루이뷔통 직원이라는 증빙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어떤 증빙이 필요한 것인지 상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제가 권태호입니다. 루이뷔통 디자이너인데, 루이뷔통 직원인 것을 증빙할 자료를 공항 세관에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인사과 직원분들이 있으면 연결 부탁드립니다.”
“알아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10분 정도가 흐른 뒤에 인사과 직원이 연결되었다.
“루이뷔통 안연정 과장입니다.”
“권태호라고 합니다. 루이뷔통 본사 디자이너인데, 지금 인천공항 세관이에요. 루이뷔통 직원인지에 대한 증빙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누구 시라고요?”
“권태호요. 얼마 전 파리에서 SS 시즌 디자인도 마크 제이랑 같이했는데 모르세요? 그리고 LVMH 산하 Theo라는 브랜드 CEO이기도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워낙에 공항 세관에서 본사 직원 사칭이 많아서 내부 방침에 따라 이런 증빙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태호는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혹시 옆에 본사 직원 있나요?”
“지금 본사에서 파견 나오신 분들은 모두 회의 중이셔서 오후에나 통화 가능하실 거예요.”
“그러면 거기 누구든지 본사에서 나온 직원 있으면 꼭 전해 주세요. 디자이너 태호가 본사 직원 증빙하나 못 받고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간다고요. 내 본사에 전화해서 한국에 전화하라고 할 테니까.”
“본사 인사과와의 네트워크가 지금 구축 중입니다.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과장님이 무슨 잘못이겠어요. 이놈의 회사 시스템이 그따위인걸. 아, 본사 직원에게 이 말도 전해 주세요. 오늘 일은 내 꼭 잊지 않고 다음에 아르노 회장이랑 밥 먹을 기회 있으면 전해 주겠다고요. 그림 끊습니다.”
태호는 세관에 다음에 증빙 자료를 들고 가방을 찾으러 오겠다고 하고 공항을 떠났다.
그날 밤, 뉴욕의 출근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건 태호는 한국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증빙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다음부터 이런 일이 사전에 방지할 방법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삼일 뒤 특급 우편으로 영문 한글 사본 이렇게 두 개를 받아 들고 공항에 가 가방을 받아왔다. 뉴욕에서 한글 서류까지 만들어 보냈다. 증빙서류에는 태호는 루이뷔통 소속 디자이너가 맞으며 패션쇼를 위해 직접 가방을 디자인하기도 한다고 적혀있다.
한편 루이뷔통 코리아는 유통만을 위해 한국에 법인이 설립되어있을 뿐 본사 직원들이 임원급으로 파견을 나와 경영되는 회사이기에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다 알지를 못했다.
마크 제이야 워낙 유명해 알지만, 마크 밑에서 같이 일하는 태호가 누구인지, 얼마 전 설립된 Theo라는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누가 CEO인지 알지 못했다. 일부러 찾아보기 전에는.
처음에 로컬 직원에게 메모를 건네받았을 때 대표이사인 패트릭은 또 웬 중2병 환자 같은 놈이 협박하는 거냐며 기분이 상했지만 맨 마지막 멘트가 맘에 걸렸다. 그래서 본사에서 같이 파견 나온 재무담당 이사 필립에게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패트릭, 정말 태호를 몰라?”
“우리 쪽 디자이너들이 한둘이야? 어떻게 다 알아.”
“그럼 무라카미 카츠키는?”
“이름은 언뜻 들어본 거 같아. 우리가 일본 시장 공략한다고 일부러 접촉한 거로 아는데.”
“카츠키를 그 정도로 알고 있다면 태호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군. 그럼 Faceless나 빛의 마리아는 알아?”
“Faceless는 당연히 알지만, 빛의 마리아는 처음 들어보는군.”
필립은 태호가 누구인지에 대해 찬찬히 설명해줬다. 지금 Theo라는 신규 회사 CEO가 태호라는 사실까지 말이다.
“젠장, 그 메모가 진짜였다니.”
“무슨 메모?”
패트릭은 필립에게 얼마 전에 인사과 직원에게 받은 메모를 건넸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시스템이 안 되어있는데 어찌 알아. 우리는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별도 법인데. 본사 직원이 누군지 어찌 아나? 신경 쓰지 마.”
“회장님에게 가서 여기대로 꼰지르면?”
“그 양반이 그런 거 따지던 사람이었던가? 그냥 장사만 잘하면 장땡인 사람인데. 한국 시장 좋잖아. 앞으로 매출이 늘어나는 게 보일 텐데.”
“그렇겠지?”
“그냥 모른 척해. 별 탈이야 있겠나?”
이렇게 둘은 기억에서 이번 일을 지웠고, 나중에 둘은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인도네시아 법인으로 발령이 났다. 명백한 좌천이었다. 인도네시아도 매출이 증가하는 시장인 것은 맞지만, 사람들의 구매력에서 큰 차이가 보이기에 인도네시아보다는 한국이 훨씬 중요한 시장이었다.
한국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은 태호는 어떤 연락도 없는 한국 루이뷔통을 기억 속에 문신 새기듯 저장해 놨다가, 나중에 아르노 회장과 저녁 식사를 할 기회에 공항에서 일어난 일을 농담 삼아 얘기했다. 그리고 의도한 대로 아르노 회장은 이를 절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소에 이런 농담을 하는 태호가 아니었기에 말이다.
*
태호는 이번 일을 기준으로 자신의 위상이 참 별 볼 일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인지도가 없어 행동의 제약이 없는 것을 반가워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남들의 시선을 즐기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마치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허전한 무언가 같았다.
어렵게 구한 네 개의 가방 중 두 개는 할머니와 엄마에게 상납 되었다.
“우리 손자밖에 없어.” 할머니는 태호 엉덩이를 두드리며 고마워하셨고, 엄마는 ‘잘 쓸게’ 한마디로 퉁쳤다.
하나는 서현 손에 들어갔는데 작년에 멀리 뉴욕까지 전시회를 축하해 주러 왔는데 선물 하나 제대로 준 게 없어서 태호가 챙겨 간 것이다.
한국에 가져온 가방 네가 중, 나머지 가방 하나는 혜린의 몫이었다. 혜린은 곱창을 먹다 말고 눈물을 글썽이며 태호에게 고마워했다.
*
태호는 원래 계획된 스케줄의 반도 소화하지 못한 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태호가 서둘러 출국을 하게 된 이유는 2명의 영화제작자에게서 비슷한 시기에 영화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비욘드 더 씨를 제작한 래리 패터슨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프로듀서 캐더린 케네디였다.
래리 패터슨은 영국 출신의 프로듀서이자 조감독으로 태호의 소설을 우연히 접하고 저자를 알아보다가 빛의 마리아의 제작자인 태호가 글을 썼다는 것을 알았다. 곧 시나리오까지 챙겨서 읽은 뒤 영화 시나리오보다는 태호의 소설에 흥미를 느껴 영화화를 고민 중인 케이스였다.
반대로 캐더린은 시나리오와 태호가 제작한 그림을 보고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생각한 경우였다. 그는 설명하는 게 입이 아플 지경인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제작자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부분 영화를 제작한 사람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 공식을 정확히 꿰고 있으며 만진 영화 대부분을 흥행 성공시킨 사람이다.
윌슨이 이 소식을 전해왔다. 윌슨이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이름있는 영화제작자에 태호가 쓴 소설과 시나리오가 있다는 걸 알리게 된 게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였다.
윌슨은 두 프로듀서가 제작하는 영화의 장단점을 나열하기 전에 그들이 제작한 영화를 볼 것을 제안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대부분을 본 태호는 그쪽은 바로 건너뛰어 버렸고, 래리 패터슨의 최근 영화 두 편을 챙겨봤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영화는 영화 장면이 전체적으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 정도로 영상미는 굉장히 훌륭했지만 스토리의 힘은 좀 약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비욘드 더 씨를 보고 나서 충분히 흥행에서도 통할 영화를 만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가 무엇보다 이 사람이 맘에 든 이유는 원작에 충실히 하려고 하는 성향 때문이었는데 그의 최근 두 편의 영화는 합격점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영화의 특성상 소설에서 어긋나는 극적 장치를 넣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원작을 거의 헤치지 않는 선에서 그런 장치들을 잘 넣을 줄 알았다.
태호는 먼저 래리를 뉴욕으로 불렀다. 자신이 영국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작품들이 다 뉴욕의 자신의 작업실에 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 온 래리는 키가 훤칠한 미중년이었는데 선한 외모와 깔끔한 영국 악센트를 사용했다.
“이 그림들이 그 유명한 Faceless 작품들이군요.”
래리는 태호의 전시회가 거의 끝나기 직전에 뉴욕을 방문해 태호와 빌바오 미술관에 왔다.
“혹시 영화 소품으로 필요한 그림도 그려주실 수 있는 겁니까?”
래리는 태호의 그림을 보니 머릿속에서 수많은 아이디어가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스케줄 등을 모두 다 고려해봐야겠지만 최대한 맞춰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태호는 자신의 그림을 아예 마케팅으로 활용하자는 안을 냈다. 영화 개봉에 맞춰서 홍보 행사로 배우들이 여러 국가를 돌며 사인회 등의 사전행사를 하는 것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그림들을 홍보용으로 각국의 미술관에 전시하자는 의견이었다.
“이건 윈윈 이군요. 제가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