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르의 존 갈리아노 (feat 영화소품)
존 갈리아노는 전에 헨렌 베르니 의상을 만들 때 태호의 첫 번째 디자이너가 되어 주었기에 안면이 있었고, 태호가 상당히 고마워하는 사람이었다.
“이게 누구야? 내 쇼에는 절대로 오지 않는 태호 아니야? 자네 이번에는 파리에 있네? 뉴욕에 있는 줄 알았더니.”
영국인이지만 이탈리안 핏줄인 존은 웃는 얼굴로 그러나 입에는 가시를 달고 태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뉴욕에서 하면 꼭 갈게요. 아 그리고 존, 이쪽은 제마 로웰. 이번에 데뷔한 모델이에요."
태호는 제마와 존을 서로 인사시키고 존과 함께 온 그의 동료 디자이너들과 인사했다.
"이번 SS 시즌은 마크 요청으로 왔고요. 존은 이번 무대도 역시 성공이라고 기사가 뜨던데.”
“내 쇼야 늘 환상적이지. 그게 어디 가는가?”
“이번에는 좀 특별했다고요. 어떻게 그렇게 전 연령대의 보통 사람들을 모델로 세울 생각을 했어요?”
“그것 때문인가? 요새 그 모델들을 세운 거로 말들이 많아. 거기다가 네 말대로 이번 무대는 대성공이 아니라 무대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는 혹평만 가득한걸.”
“난 당신 패션쇼에 관한 기사를 읽고 정말 감동했어요. 왜 디자이너들은 다 키만 멀대같이 큰 백인 여자들을 모델로 쓰고 그것도 무표정으로 무대를 돌게 하죠?
그건 정말 몰개성 그 자체에요. 가장 다양하고 개성 있어야 할 모델들이 가장 개성이 없어요. 차라리 마네킹이나 로봇에 옷 입히고 돌리지 그래요? 그냥 런웨이 앞으로 쭉 갔다가 돌아오면 되는데.
존처럼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모델을 세우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요. 내가 볼 때 존이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데 크게 일조한 거로 생각해요. 그게 디자이너가 할 일이죠. 적어도 자신을 예술가로 불리길 원한다면요. 적어도 존은 그런 시시한 디자이너는 아니잖아요?”
존은 태호의 열변에 감동한 듯 태호를 포옹한 후 말을 이었다.
“고마워.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네가 얘기해주니 훨씬 더 힐링이 되는 거 같아.”
“존, 그리고 무엇보다 옷이 아름다웠어요. 그 중 한 벌은 정말 다음 작품에 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더라고요. 딱 내 취향 적격이었어요.”
“최고의 칭찬이군. 어떤 옷이 눈에 띄었는데?”
“그 금발에 노란색 구두를 신은 모델이었는데 옆에 있던 남자 모델이 군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어요. 난 그렇게 하늘거리는 옷을 옛날부터 지나치게 좋아했다고요.”
“No. 34 인 거 같은데. 그 옷이 가장 아름다운 옷 중 하나이긴 하지.”
“이번 쇼에서 본 몇몇 옷들은 클림트 느낌이 좀 나긴 하던데 맞아요?”
“맞아. 누구 눈을 속이겠나?”
둘은 한동안 디오르 무대와 루이뷔통 무대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존은 제마를 슬쩍 보더니 물어봤다.
“여자친구인가?”
“아마 오늘 이후엔 그렇게 기사 뜰 거 같긴 해요.”
“그냥 단순히 예쁘장한 얼굴이 아닌데? 어떻게 찾은 거야?”
“친구 동생이에요. 모델 지망생이었는데, 뉴욕에서 잘 안 풀려서 여기 왔는데 상당히 잘했어요.”
“여기가 작업실이면 한번 워킹이라도 시켜볼 텐데.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지. 그래 잘 놀다 가고. 다음에 올 때는 나도 마크처럼 하나 챙겨줘.”
“하하하, 알았어요.”
“아, 자네 여자친구랑 다음 기회에 내 작업실에 와.”
“뉴욕이요? 파리요?”
“내 뉴욕에 갈 때 연락하지.”
존과 한동안 얘기를 나누고 있자 주위에는 존을 알아보고 언제 말을 붙여볼까 기다리는 사람이 한가득하였다. 그에 반해 태호와 제마를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태호는 정말 아는 사람들에겐 핫 스타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미비했기에 그런 듯했다.
뉴욕이었다면 아는 사람이 그래도 있을지 모르지만, 파리에선 아니다. 덕분에 둘은 느긋하게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태호와 제마의 파리에서의 데이트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그렇다고 제마의 데뷔가 조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파리 패션위크를 정리한 엘레, 보그, 마리끌레르, 코스모폴리탄, 글래머 등 패션 잡지에서는 마크의 루이뷔통 패션쇼를 정리하는 기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사진이 바로 제마의 사진이었다.
거의 대표 모델처럼 나왔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크가 제마를 보고 디자인한 옷들이라 제마에 제일 잘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
태호와 제마는 뉴욕으로 건너와 일상을 이어갔다. 태호는 책 판매량을 보고 좌절했고 시나리오에 별 반응이 없는 데에 절망했다.
제마는 잠시 쉬다가 맨해튼의 마크 작업실로 출근을 시작했는데 점심때쯤 가서 저녁 늦게 퇴근하는 몸 망가지기 딱 좋은 생활을 이어갔다.
제마는 한동안 집에서 출퇴근하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서 브루클린에 원 베드룸을 하나 얻어서 독립했다. 마틴은 맨해튼 어퍼 이스트에 집을 하나 얻어 주려 했는데 앨리스가 눈치를 줘서 브루클린에 얻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태호 집에서 멀지 않았다.
태호는 자신의 시나리오마저 시장에 먹히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영화화하던 영화가 대박이 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던 해야 하는데 둘 다 꽝이니 답답했다.
직원들에게 채색을 지시해 놓은 것은 슬슬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림이 마무리되던 날, 카라바지오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작품 13점과 쌍둥이를 벽면에 쫙 걸어놓자 옛날 운동장으로 쓰이던 학교 건물의 5층이 순식간에 바티칸의 성당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림 제작 기념 뒤풀이로 와인과 안주 등을 잔뜩 사 온 다음 남아있는 초등학생들 의자에 대충 앉아 고생한 직원들과 같이 그림을 봤다. 술이 한참 들어가자 갑자기 그림을 자랑하고 싶어진 태호는 윌슨부터 데이비드까지 문자를 보내 완성한 그림이 있으니 와서 보고 가라고 했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뒤 도착한 건 윌슨이었다. 윌슨은 걸려있는 그림에 놀랐고 벌어진 술판에도 놀랐다.
“도대체 이게 다 뭔가? 언제 그린 거야?”
“3개월 전에 시작했는데 오늘 다 마무리했죠.”
살짝 달아오른 태호가 윌슨에게 설명했다. 저조한 책 판매량과 기대를 걸었던 시나리오에 대한 연락이 없어 난 짜증을 와인으로 풀고 있었기에 비교적 많이 마신 상태였다.
“이 그림들은 어떻게 봐도 카르바지오군. 왜 그린 거야?”
“영화 소품으로 써볼까 해서 그렸어요.”
윌슨은 전에 태호가 쓴 소설은 사인까지 담긴 책을 받았기에 자신도 읽어봤고 참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걸로 만족을 못 하고 시나리오까지 쓴 줄은 몰랐다.
거기에 소품으로 쓰겠다면서 그림까지 제작하다니? 물론 이런 훌륭한 그림들이 탄생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태호의 집착이 다소 걱정이 되기 시작한 윌슨이었다.
“시나리오는 언제 완성한 거야?”
“한 석 달 되었어요.”
“연락은 안 왔고?”
고개를 끄덕이는 태호다.
“시나리오를 냈다고 바로 연락 오는 게 어딨어? 어디 어디 보냈는데?”
윌슨이 들어보니 에이전트를 통해 정말 이름 있는 회사들에만 시나리오를 보낸 거 같았다.
“혹시 저 그림, Faceless 닮은 그림은? 사진으로 보냈나?”
고개를 끄덕이는 태호.
“저 그림까지 보고도 연락이 없다는 건 이상한데? 이건 내가 알아보지. 사진은 파일로 있지?”
윌슨은 사진 파일과 에이전트 연락처를 챙겼다. 그리고 돌아가기 직전, 태호에게 한국에 다녀올 것을 주문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한 한 달쯤 쉬다가 와. 머리도 좀 식히고. 너무 이쪽에 몰입하면 될 일도 안 될 거야. 이건 언제까지 여기에 둘 건가?”
태호는 윌슨의 말대로 한국에도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일주일 정도만 여기 두죠. 그리고 한국 갔다가 올게요. 그동안은 윌슨이 뉴욕 곳곳에 전시 좀 해줘요.”
원하는 답이 나오자 윌슨은 씩 웃으며 태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이 그림들로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해놓을 테니 여행 잘 갔다 오게.”
모마의 짐과 빌바오의 제이슨까지 그림을 보고 돌아갔는데 찬사와 비평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비평은 비난에 가까웠다.
“이게 자네의 카르바지오 대한 해석의 결과인가?” 제이슨이 물어봤다.
“부분 부분은 그렇죠. 전체는 아니지만”
“엄밀히 따져서 카르바지오를 흉내 낸 정도의 그림이야. 품질이 고르지도 않아. 몇몇 부분은 딱 봐도 태호 네가 그린 것이란 걸 알 수 있어. 하지만 몇몇은 수준 미달인 부분도 보이지. 자네도 다 신경 써서 수정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맞나?”
“맞아요.”
“뭐랄까, 직원들과 훈련 삼아 그린 그림인가?”
태호는 결국 시나리오를 쓴 얘기를 꺼내며 영화 소품으로 써볼까 해서 그렸다고 했다. 직원들 훈련도 겸해서 말이다.
“자넨 정말 엉뚱한 짓을 잘해. 내가 이 그림들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했다지만 이건 내 기준에서야. 일반 관객이 보면 달라 보일 거야. 영화 소품으로 쓰이기엔 차고도 넘치지. 직원들은 좀 더 훈련 시키면 더 괜찮은 작품들이 나올 테니 꾸준히 해보게.
참, 책 보내줘서 고마웠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최고의 소설이었어. 내가 상상하던 모든 모습을 그 소설에서 봤으니까.”
제이슨보다 하루 뒤에 온 짐도 로스와 의견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태호 작품이라고 하기엔 조잡하지만, 영화에 쓰이기엔 차고 넘친다는 것. 태호가 만족할 만한 얘기였다.
*
늘 그렇듯 일등석을 예약한 태호는 공항에 갈 때는 캐쥬얼 차림으로 가지만 가방에서 각종 세면도구와 면도기 그리고 슈트를 챙겨서 탔다.
처음에는 항공사를 가리지 않고 타는 편이었으나 점점 땅콩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의 서비스 수준이 올라가 미국 항공회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국적기만 이용하게 되었다.
일본 항공사들의 서비스도 물론 땅콩항공이나 아시아나에 못지않았지만, 도쿄를 거쳐 가야 한다는 단점 때문에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땅콩 항공을 이용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면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했다. 입가심으로 브랜디나 코냑을 한잔하고, 그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이 드는데 전날 일부러 일을 더 많이 하는 방법으로 잠을 줄여서 탔다.
비행시간이 14시간이 좀 넘기 때문에 아무리 잠을 청해도 14시간을 다 자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밀린 영화도 보고 들고 간 책을 보기도 하고 비행기에 비치된 잡지를 보기도 하지만 시간은 아무래도 더뎠다.
도착 한 시간 전 정도가 되면 태호는 세수하고 면도를 한다. 보습제 등 로션을 바르고 들고 간 슈트로 갈아입었다. 신발은 들고 간 슈트에 맞춰 들고 타는 편인데 처음에는 정장 구두를 들고 탔으나 요즘은 점점 슈트와 코디가 된 스니커즈를 신고 가는 걸 선호했다. 슈트가 점점 더 캐쥬얼하게 변해갔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도착하면 보통 태호가 제일 먼저 비행기에서 내렸다. 10번 비행기를 타면 9번은 자신이 1등으로 내리는데, 이번은 승무원이 자신을 막아섰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일등석만 타고 다니는 편이긴 한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네요."
태호는 찡그려지는 얼굴을 가까스로 펴며 승무원에게 말했다.
"왜 이러는 거죠?"
일등석에서 자신을 전담했던 승무원이기에 태호는 재차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승무원은 태호만 겨우 들릴 정도로 대답했다.
"회사 사장님 질녀가 타고 있습니다. 먼저 내리지 못하면 난리가 납니다."
그 묘한 갑질에 기분이 나빠진 태호의 얼굴은 더 무표정하게 변해갔다. 그 갑질녀가 먼저 내리고 그 뒤에 태호가 내렸다.
제마가 잘 쓰고 다니는 얼굴을 덮는 듯한 선글라스를 태호도 보고 맘에 들어 쓰고 다니고 있는데, 이번에도 내리자마자 선글라스를 쓰고 입국장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마크가 챙겨준 슈트를 입은 태호는, 그 큰 키, 하얀 피부, 잘빠진 몸매에 아방가르드한 슈트를 입고 걸으니 공항이 마치 런웨이로 바뀐듯했다.
얼마 뒤 앞서 가던 갑질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꼈졌다. 입도 살짝 벌린 채였는데 태호는 철저히 무시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