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런웨이 - Dictator
제마가 이번 패션쇼 무대에 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마크가 제마에게 기회를 줄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을 했기에 태호는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왕따를 당한 엘리 생각이 나 태호도 제마 주위를 주의 깊게 봤다. 하지만 이것도 태호의 기우였다. 마크 사단의 말벌 같은, 여왕벌에서 강등당했다, 벨라가 살뜰히 제마 챙기는 것을 본 모델들이 알아서 조심했기에 제마는 별문제 없이 루이비통의 이 거대한 무대에 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제마는 무대 경험이 상당히 많았다. 축구로 치면 리그1 경기는 없었지만 리그2까지의 무대는 그래도 제법 섰기에 모델로서의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충분히 있었다.
부족한건 큰 무대를 선 경험과 작은 키를 커버할 또 다른 어떤 무기였다. 지난 두 달간 거의 하루 종일 워킹 연습을 하고 태호도 시간이 될 때마다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밀며 제마를 훈련을 시켰더니 짧은 시간이지만 제마는 표정 연기부터 워킹까지 일취월장했다.
여기에 마크는 제마를 보고 필을 받아 상당히 많은 옷을 제작했다. 그 중 이번 쇼의 시그니처라고 부를 수 있는 옷 세 벌을 다 제마가 무대에 입고 서게 했다.
특혜지만 정말 이 바닥은 디자이너 맘대로 돌아간다. 아무도 이의를 제시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다른 디자이너인 태호도 제마와 그렇고 그런 관계이니 말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마크의 입사 초기 때 반기를 들거나 이견을 제시했던 디자이너나 다른 직원들은 순식간에 자리를 비웠다. 마크가 용납해도 아르노 회장이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태호는 다른 직원에게 부탁해 패션쇼 무대를 기준으로 비교적 눈에 안 띄는 자리 둘을 달라고 한 후 그걸 앨리스와 마틴에게 보냈다. 제일 안쪽 자리를 줄 수도 있지만, 첫 무대에 제마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런 내용이 적힌 손 편지를 쓴 후 제마네 집에 보냈고 뉴욕의 자신의 비서에도 문자로 연락해 두 사람을 챙기라고 지시를 했다. 앨리스는 물론 마틴까지 전날 밤 제마에겐 알리지 않은 채 전용기 편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실제로 쇼에 들어가면 벨라 같은 스태프가 바쁘지 태호가 바쁘지는 않다. 따라서 바쁠게 없는 태호는 호텔에서 로렐 부부를 에스코트 해 패션쇼 관람석으로 데리고 왔다. 마틴은 태호가 일러준 대로 꽃다발도 하나 준비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제마의 루이비통 데뷔 패션쇼를 기다렸다.
쇼가 시작되자 무대가 어두워지면서 모델들이 하나둘 무대로 나와 한 손엔 핸드백을 든 채 캣워크를 시작했다. SS시즌 의상이라 옷이 전체적으로 가벼워 모델들의 힘찬 발걸음에 옷은 하늘거리고 가방은 앞뒤로 흔들렸다.
캣워크 그 특유의 리듬감은 모델들 모두에게서 느낄 수 있기에 언뜻 모델 전체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가방을 앞뒤로 힘차게 흔드는 모델도 있고 흔들림이 상대적으로 적은 모델도 있다. 걸음걸이나 시선 처리 그리고 모델의 분위기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모여 모델의 캐릭터를 형성한다.
유명한 슈퍼 모델들은 자신의 캐릭터를 들어내는 런웨이 걸음걸이가 있다. 표정과 걸음걸이에서 특유의 거만함이나 어떤 권력과 권위를 느낄 수도 있고, 무대 전체가 자신의 공연 무대인 듯 경쾌한 걸음걸이로 모든 시선을 잡을 수도 있다.
어떤 모델은 걷는다기보다는 스케이트를 타듯, 아니면 뱀이 무대를 미끄러져 오듯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워킹을 선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타고난 외모나 왕족이나 귀족을 연상시킬 정도로 확고한 이미지가 있다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훨씬 유리하다.
제마는 짧은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에 은빛 번쩍이는 모노그램 베르니 스피디 미러 토트백을 들고 젠체하듯 엉덩이와 어깨를 흔들면서 비교적 캐쥬얼한 방식으로 걸었다. 여기에 과장된 팔 움직임을 더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하도록 했다.
빼어난 외모, 스윙하는 움직임, 권력자가 자신의 신하들을 노려보는 듯한 힘 있는 시선, 거기에 약간의 삐뚤어진 성격을 담은 듯한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고양이의 걸음걸이가 아닌 표범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이 같은 장점이 모델치고는 작은 키라는 핸디캡을 무난히 덮었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이 곧 제마를 부르는 별명이 되었는데 바로 독재자 (Dictator)였다.
태호는 제마가 나올 때마다 입은 옷을 보고 마틴을 쳐다봤다. 마크의 옷은, 다른 디자이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끔 젖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제작하기도 하는데, 태호는 불을 켜고 제마가 그런 옷을 못 입게 했다.
다른 때는 모르겠지만, 첫 무대고 부모님도 오시는 무대에서 금지옥엽 딸이 나체로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마틴이 달려가 마크의 멱살을 잡던지 아르노 회장의 멱살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혹은 필요하면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다행히 제마가 입은 옷들은 비교적 정상적인 옷들이었다. 마틴과 앨리스는 딸의 자신 있는 표정에 한껏 감동한 모습이었다. 이보다 더 밝았던 적이 있었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행복해했다.
무대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태호는 앨리스와 마틴을 데리고 무대 뒤로 가 제마에게 놀라게 했다. 깜짝 놀란 제마가 단숨에 달려와 앨리스와 마틴을 끌어안으며 기쁨을 표했고, 태호는 옆에서 모든 것이 잘 끝난 것에 만족해하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아빠, 엄마. 뒤풀이 파티하고 가면 안 돼?”
“뒷풀이 파티가 뭐니? 오늘 밤에 우리 돌아갈 수 있도록 다 예약 잡아 놨는데?”
태호도 뒤풀이를 생각을 못했다. 설마 마틴과 앨리스가 오늘 밤 제마를 데리고 돌아갈 거라고는 예상을 못 했기 때문이다. 패션위크가 끝날 때면 톱 모델이나 디자이너, 셀럽들이 참석하는 수많은 파티가 파리에 열렸다.
비교적 공개된 파티도 있고, 정말 누가 참석하는지 알 수도 없는 비밀스러운 파티도 있는데, 시즌마다 비슷한 파티가 열리기 때문에 파티가 있다는 정보 자체는 공개된 상태였다.
태호는 술 먹고 사고 칠까 두려워 그 많은 초대를 받아놓고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 기껏해야 마크가 가자고 떼를 쓰기에 뉴욕에서 두어 번 참석한 게 다였다. 더군다나 파리에서는 쇼가 끝나자마자 바로 뉴욕으로 날아왔기에 참석해본 파티도 없었다.
“혹시 초대가 온 데가 어디야?”
“L’Arc Paris이라고 되어 있던데? 이게 뭐야?”
“패션위크 뒤에 있는 공식적인 파티가 열리는 곳. 여기서 일차하고 보통 다른 데 가서 2차 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잘 알아?”
“나도 늘 받거든.”
“많이 갔나 봐?”
“한 번도 안 갔는데?”
“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피곤하고. 마크랑 파티를 가면 직진 못하는 이상한 애들이 꼬여서 싫고. 벨라랑 가면 재미는 없는데 주위에서 벨라한테 치근덕거리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피곤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가면 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그 사람들은 다 날 알아봐. 이상한 기사 뜨기 딱 좋은 환경이지.”
제마는 그래도 가고 싶다는 듯 마틴과 태호를 쳐다봤다.
“아빠! 가면 안돼?” 제마는 마틴의 팔짱을 끼고 조르듯 말했다.
마틴은 제마의 얼굴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포기했다.
“좋다. 그 대신 태호랑 같이 가야 돼.”
“제가 왜요?”
“그럼 제마 혼자 보낼 건가?”
제마는 반짝이는 고양이 눈을 하며 태호를 쳐다봤다.
“차라리 마틴과 앨리스도 같이 가죠? 비행기 하루 늦추고요. 거기 가면 오늘 패션쇼에서 봤던 모델들 다 나올 겁니다.”
마틴은 정말 솔깃해하며 거의 넘어올 뻔했으나 앨리스가 옆에서 도끼눈을 하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냥 둘이 가서 재밌게 놀다가 와요.”
앨리스는 태호의 등을 떠밀며 둘을 붙여 놓았다.
태호는 앨리스를 보고 제마를 보다가 할 수 없다며 승낙했다.
“알았어. 대신 1차만 하고 나오는 거다.”
마틴은 끝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앨리스에 이끌려 돌아가야 했는데, 헤어지기 전 태호를 슬쩍 불러 지난번에 했던 것과 똑같은 경고를 다시 했다.
“지난번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자네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
“그냥 같이 가시죠? 거기 아주 끝내준다고 들었습니다.”
“나라고 참석 안 하고 싶겠나?”
그러면서 마틴은 눈으로 앨리스를 슬쩍 가리켰다.
“아무튼 믿고 가네. 믿고 간다고!”
L’Arc는 패션위크 때는 포토존까지 마련되어 있는 탓에 아무렇게나 입고 들어갈 수도 없다.
주섬주섬 태호는 이번에 마크가 태호의 그림을 바라며 만들어준 그런지 스타일의 정장을 입었는데 체크무늬에 팔다리가 7부 정도 되는 몸에 꽉 끼는 듯한 옷이었다.
다행히 스판 재질이라 움직임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크는 옷에 맞는 와이셔츠에 벨트까지 챙겨서 줬다. 그 바쁜 와중에 말이다.
제마는 패션쇼 무대에서 두 번째로 입고 나온 의상을 입었는데 흰색보다는 회색빛에 가까운 원피스인데 씨스루처럼 안이 훤히 비치는 재질의 천을 여러 겹 겹 덴듯한 옷이었다.
거기다 옷의 디자인은 마치 공작새의 깃털이 위에서 아래로 쫙 펼친 듯했는데, 공작새 깃털의 패턴이 들어간 액세서리로 화려하게 장식을 한 옷이었다.
악세서리는 단단히 부착을 한 게 아니어서 걸을 때마다 흔들리며 빛을 반사했는데 나이트에 가면 정말 돋보일 것 같은 옷이었다. 태호는 제마의 옷을 보며 또 골치가 아파져 왔다. 오늘은 주위에 얼마나 많은 벌레가 꼬일까?
L’Arc에 택시로 이동한 둘은 초대장을 보여주자 건물 밖의 별도의 파티장으로 안내되었다. 클럽 옆 센느강에 정박한 큰 보트를 통째로 개조해 만든 VIP 전용 파티장으로 뒤편으로 에펠탑이 한눈에 보였다.
한쪽에는 DJ가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는데 음악을 잘 모르는 태호가 들어봐도 꽤 괜찮은 하우스와 테크노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둘은 플라스틱으로 된 칵테일 잔을 쥐고 이동하다가 빈자리를 잡은 후 핑거푸드 같은 간단히 먹을 것을 주문했다. 일부러 DJ와 음악에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았는데도 음악 소리가 커서 대화가 힘들 정도였다.
“안 추워? 다행히 바람은 오늘 별로 없네. 그래도 강가로 추울 거야.”
“아니야. 괜찮아. 춥진 않아.”
마크와 벨라에게는 여기 온다고 알려는 놨는데 그들이 올지는 잘 모르겠다. 태호와 마찬가지로 피곤에 절어 있는 그들은 보통 쇼가 끝나면 호텔에서 자기 바빴으니 말이다.
“오늘 나 어땠어?”
“런웨이 한 10년은 구른 베테랑 같았어.”
제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그 정도로 잘했어. 오늘 큰 무대에 처음 선 사람 같지 않았어.”
“정말?”
“내가 거짓말할 필요가 있나?”
“나 두 번째 나올 때 런웨이 끝에서 턴할때 살짝 스텝 엉켰는데 안보였어?”
“너 말고도 거기서 스텝 다 엉키더라. 좀 미끄러웠나? 오히려 네가 잘한 거야.”
태호는 예스맨이 되어 제마가 듣기 좋아할 말들만 골라서 했다. 여기서 어디가 안 좋았네 어쨌네 해봤자 상대방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실제로 제마는 첫 쇼치고는 매우 잘했다. 그 옆에 있는 다른 특급 모델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키가 좀 작아 보이지는 않았어?”
“힐 높은 거 신지 않았어?”
“그냥 보통 꺼 신었는데.”
“별 차이 모르겠던데? 거의 차이 없었어. 그리고 네가 입은 옷들은 더 크면 그게 더 안 어울리겠더라.”
“다행이네.”
제마는 태호가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러 애쓰고 있다는 것까지 눈치챘지만, 그것도 좋았다.
둘은 오늘 패션쇼에 대해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음식이 나오자 잔에 샴페인을 채운 다음 치어스를 했다.
“앞으로 제마의 모델로서의 성공을 기원하며!”
둘은 그렇게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주위를 돌아보니 옆에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서 있었는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