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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마와의 데이트 (124/181)

제마와의 데이트

데이트 당일, 제마는 또 다른 샤넬 드레스를 입고 왔는데 전시회 때와는 다르게 스커트는 더 짧아졌고 가슴이 확연히 강조된 도발적인 빨간색 의상이었다. 링컨 리무진을 타고 온 제마를 자신의 페라리에 태운 태호는 예약한 맨해튼의 노마드 호텔 1층의 식당으로 향했다.

차는 발렛으로 맡기고 안으로 들어간 둘은 태호의 이름을 대고 예약한 자리에 앉았다. 둘은 이 식당에서 유명한 치킨 요리를 시켰다. 제마는 레드와인도 한잔시켰다.

“오빠, 나 어디 달라지지 않았어?”

“네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좀 소름 돋으려고 한다.”

“농담으로 받지 말고.”

“달라졌지. 눈가의 주근깨가 다 없어졌으니. 화장으로 없앤 거야 아니면 시술이라도 받은 거야?”

“레이저 시술을 받았지. 정말 아프더라.”

“그거 아프다고 하더라. 고생했네.”

“그거 말고 또 달라 보이는 거 없어?”

잠시 제마를 쓱 훑어본 태호는 말을 이었다.

“의상이 지난번보다 훨씬 과감해졌네. 너 이런 옷도 입을 줄 알았어? 매번 청바지만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옷 정말 잘 어울린다.”

그리고 태호는 전시회때 제마가 입고 나온 옷도 얘기하며 찬사를 이어갔다.

“고마워. 근데 뭐 더 없어?”

제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가슴을 강조하듯 얘기했다.

“내 머릿속에는 너 고 3 때 약간은 소심한 모습하고 대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모델 일이 안 풀려서 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다가 지금 완전히 자신감 넘치고 섹시하고 도발적인 네 모습을 보니까 이게 내가 알던 제마인가 싶다. 그런데 지금 네 모습이 훨씬 보기는 좋아.”

제마는 오늘 무슨 맘을 먹고 나왔는지 훨씬 더 도발적이었다.

"오빠는 성욕도 없어? 나처럼 예쁘고 섹시한 여자를 보면 하반신부터 끓어오르지 않아?"

제마는 눈을 더 반짝이며 태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네가 말을 안 하면 끓어오르다가 네가 입을 연 순간 차갑게 가라앉아."

"그럼 앞으로 말 안 하고 옆에서 다소 곶이 앉아만 있을까? 이렇게?" 몇 개 안되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려는 제마를 보고 태호가 기겁해서 말렸다.

"아 제발. 우리 차분하게 있다가 밥 나오면 밥 먹자."

기겁해 하는 태호를 아랑곳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제마.

"그 여자랑은 어떻게 된거야?"

"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거지."

"깨진 거야?"

"사귄 적이 없어서 깨진 것도 아니야."

"재미있는 관계네?"

"좀 애매한 관계였지."

"왜 깬 거야?"

“지금 이런 애매한 상태를 유지하다가는 내가 낚일 거 같아서.”

“뭘 낚여.”

“걔랑 사귀게 될 거 같다고. 그리고 사귄다는 소리가 퍼지면 얼마 안 되어서 결혼해야 될 수도 있어. 걔랑 결혼이라니 난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

“사귄다고 다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걔도 예뻐 보이던데?”

“그 집 아버지가 너무나도 보수적이라 걔랑 나랑 정말로 사귀면 바로 결혼 시켜버리려고 할걸? 안 그래도 서현이는 자기 아빠가 결혼 빨리 시키려고 한다고 매번 징징거리는데.”

“뭐 결혼 빨리할 수도 있지. 그런데 이제 보니 정말 나쁜 남자네. 서현이라는 애 순정을 박살 내고, 내 첫 키스까지 가져갔으면서.”

태호는 순간 움찔한 후 제마에게 물어봤다.

"그게 네 첫 키스였니? 잠깐잠깐. 그렇게 그 키스에 의미 두지 마라."

"뭐라고? 내 첫 키스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태호는 당황하며 양손을 들어 흔들었고, 제마는 입으로는 태호를 몰아세우듯 얘기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태호가 당황하는 게 귀여웠기 때문이다.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첫 키스인지 몰랐다는 거지. 근데 미국 애들은 이미 고등학생 때 섹스까지 다 하는거 아니었어?"

"하는 애들도 많긴 한데 안 하는 애들도 있는 거지. 특히 보수적인 우리 집은 더더욱 어렵고, 난 아빠가 난리 쳐서 프롬 (졸업파티)도 못 갈 뻔 했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또 난 눈이 매우 높아."

누구 덕분에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제마다.

"너 나랑 이렇게 밥 먹고 있는거 보니 너 눈 높은 건 모르겠고, 너희 아빠가 좀 깐깐하시긴 하겠더라. 사회생활하는 딸마저 9시에 집에 오나 안 오나 감시할 분위기?"

"우리 아빠 별난 거 따지면 끝이 없어. 아무튼, 그래서 난 아직 처녀야."

"컥" 놀래서 기침을 하는 태호.

주문한 와인을 받은 제마. 제마가 화장을 했어도 어리게 보이긴 하는지, 웨이터가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한다. 제마가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자 웨이터는 실례했다며 자리를 피했다.

"와인 마실 줄 알아? 어떻게 와인을 배웠어?"

"집에서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종종 마셨어. 단 집에서만 마셨지. 집에 와인도 꽤 많아. 아빠가 사다 모으셨어"

"적당히 마셔. 그거 먹다가 훅 간다." 홀짝홀짝 마시는 제마를 보고 태호가 경고하듯 말했다.

"남의사. 오빠는 왜 안마셔?"

"운전해야 되어서."

"쳇. 대충 근처에서 자면 되지."

"너처럼 예쁜 애를 두고 어디서 자냐? 무섭게."

"내가 그렇게 예뻐?"

"예뻐, 말만 안 하면."

깔깔 웃는 제마.

곧 이어 에피타이저 부터, 메인요리로 주문한 치킨이 나오고, 나중에 디저트로 메뉴에 없는 밀크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자 거의 두 시간이 지났다. 둘은 근처 브로드웨이까지 걸어갔다. 3월의 뉴욕 저녁은 매우 쌀쌀했기에 태호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제마를 덮어줬고 제마는 팔짱 낀 태호의 왼팔에 더 가슴을 밀착하며 양팔로 꼭 붙잡았다.

*

라이온 킹 전용 극장.

“Nants ingonyama bigithia baba (나아주평야 발발이 치와와)”, 로 시작하는 라피키의 (개코원숭이) ‘서클 오브 라이프’는 그 순간 관람석을 순식간에 아프리카의 대지로 옮겨 버리는 마법을 발휘했다.

곧 이어 무대 정면에서는 찬란한 해가 떠오르고 무대 뒤에서는 다양한 동물들도 분장한 배우들이 나타나 줄지어 무대로 향하면서, 태호와 제마를 바로 사파리의 동물들 한가운데에 훅하니 던져버렸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익숙한 넘버와 무대의 화려한 동물 가면과 아프리카에서 방금 도착한 듯한 의상 등은 태호와 제마에게 세시간 동안 라이언킹 뮤지컬이 왜 최고의 뮤지컬인지 증명했다.

그렇지만 이 뮤지컬을 보고 있는 태호와 제마는 각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태호는 뉴욕에서의 엘리와의 추억과 지금 옆에 있는 제마가 보여주는 풋풋함에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제마는 태호와 함께 있는 이 순간 하나하나를 놓치기 싫은 듯 태호의 손을 꼭 잡고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뮤지컬을 감상하고 있었다.

태호는 어리고 약하게만 보였던 제마가 언제 이렇게 훌쩍 여인으로 성장했는지 흐뭇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미안했다. 제마의 이런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뮤지컬이 끝난 후 둘은 차를 타고 태호의 아파트로 이동하지 않고 그대로 롱 아일랜드의 저택으로 향했다. 밤에 길 눈도 어둡고 바닥을 어떻게 긁고 다닐지 모르는데 이 페라리를 끌고 그 롱아일랜드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힘들게 서현을 피했더니 지금은 제마를 맞닥뜨렸으니 말이다.

옆에는 자는 척을 하는 것인지 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마는 기어코 앞 블라우스 단추는 두어 개 더 풀어 가슴선이 훤히 보이는 자세로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는 부담감에 차 바닥을 긁지는 않을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을 했을뿐더러, 옆에는 달빛보다 환한 피부를 가진 섹시한 미녀가 가슴 섶을 풀어헤치고 무방비 상태로 풀어져 있는 모습은 도저히 편하게 운전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태호는 어릴 적 배운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밤길을 2시간 넘게 차를 몰고 제마를 집에까지 데려다 줬다. 그리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저택 게스트 룸에서 뻗어 버렸다.

“마틴, 앨리스. 안녕하세요.”

다음날 아침, 비록 늦게 도착했지만 다른 식구들이 기다리기에 같이 식사하게 되었다.

"그날 중요 중역 회의만 없었으면 가족과 함께 갔을 텐데 못 가게 되어 미안하구나. 그래도 내 나중이라도 잊지 않고 찾아갔다. 그림들은 정말 대단했어. 왜 뉴욕 예술계가 확 달아오르고 있는지 왜 이쪽 친구들이 지갑을 활짝 열고 그림 살 궁리만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더군.

그쪽을 잘 모르는 내 귀에도 들리더라고. 하하. 집에 걸린 네 그림이 갑자기 백만 달러 체크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제 천만 달러인가? 오늘도 이렇게 왔으니 밥값은 하고 가야지? 하하"

"어떤 그림이 제일 끌리셨어요?"

“황금의 마리아. 난 빛의 마리아도 좋아했지만 이번에 새로 만든 황금의 마리아는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뉴욕에는 그 가격이 얼마인지를 놓고 아직도 말이 많던데. 태호, 정확히 얼마인가?”

“윌슨이 신신당부를 했는데 비밀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만약 세어나가면 곤란한 사람이 여럿이라.”

“약속은 지키겠지만, 뭐 새어나가도 상관없지 않나? 곤란해질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 얼굴 두꺼운 코언이? 아니면 바늘도 안 들어갈 시오니스트 론이?”

“두 사람 다 잘 아시나 봐요?”

“맨해튼에 앉아 있으면 안 듣고 싶어도 들리는 걸 어쩌겠나.”

“황금의 마리아는 천삼백만불에 팔렸고, First는 천오백만불, Faceless를 그리는 앙리 보나는 천만달러에요.”

“휘유. 대단하군. 삼 일 만에 웬만한 회사 일 년 순수익을 올렸어.”

“그러니 뉴욕이 지금 난리죠.” 엘리스가 태호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커피를 마시며 잠에서 좀 깨고 보니 태호가 여기 와서 그린 그림들이 거실에 다 걸려 있었다.

“내가 태호 그림을 워낙에 좋아해서 옮겨왔어.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도 이 그림들을 보고 싶어하고 해서.”

엘리스는 두리번거리는 태호를 보고 그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아보고 바로 얘기했다.

“참, 얼마 전에 출판한다는 책은 어떻게 됐어?” 앨리스가 물어본다.

“몇 일 뒤면 서점에 나올 거에요. 전시회 준비한다고 바빠서 에이전트에다가 다 맡겨놨더니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더라고요. 그리고 초판으로 나온 책 몇 권이 차에 있으니까 나중에 사인까지 해서 드릴게요.”

그렇게 세 사람이 전시회와 아트 바젤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잠시 엘리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틴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태호에게 말했다.

“태호군. 제마와 사귀는 건 반대하지 않지만, 선은 지켜주길 바라네.”

“네? 저희는 마틴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가볍게 시작을 하지. 그러다가 더 가까워지면 자기가 여보 되고 아이 아빠 되는 거 아니겠는가? 둘 다 몸 건강한 젊은이들이니 금방 불타오를 테고, 그러다 보면 주위의 축복 받지 못한 채 아이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난 그걸 일이 내 딸아이에게 일어난다면 난 절대 그걸 용납할 수 없네. 무슨 말이지 알겠지?”

“저 마틴. 혹시 이 얘기 마틴 얘기는 아니죠? 많이 들어본 스토린데.”

“당연히 아니지 않은가!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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