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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바오 전시회2 (123/181)

빌바오 전시회2

태호는 한국의 식구들은 물론 두 교수와 예랑 같은 한국의 지인들, 마크와 벨라 등 루이비통 일을 하면 알게 된 친구와 지인들, 예일대 대학 친구들, 뉴욕에서 만난 예술인 지인들과, 옛날에 자신의 첫 번째 한복 시리즈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연정아, 가장 최근 황홀경의 모델이 되어준 크리스티나까지 초대를 했다. 물론 연정아나 크리스티나까지 뉴욕에 온 건 아니었다.

태호가 아직 가지고 있던 그림 중에는 엘리의 그림도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윌슨의 보관소에서 나와 미술관의 한쪽에 아름답게 전시되어 있었다. 엘리의 사진을 보니 옛날 풋풋했던 추억이 소록소록 올라와 태호의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했다. 그것도 잠시 태호는 고개를 저으며 그 감정에서 벗어났다.

윌슨은 뉴욕과 미국 전역에 있는 자신의 고객 모두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또 작년 아트 바젤에서 자신에게 연락처를 남긴 고객들에게도 한명 한명 전화를 해 연락이 닿는 고객에 대해 초청장을 보냈고, 그림을 구매한 스티브 코언과 론 로더에게는 자신이 직접 방문해 초청장를 전했다. 파리의 아르노 회장에게는 라딘 쁘띠에게 연락을 한 후 초청장을 보냈다.

전시회 개막일 아침, 태호는 마크가 제작해 준 정장을 입고 한국과 뉴욕에서 자신의 전시회를 방문해준 식구와 친구, 그리고 지인들과 인사를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후 데이비드 식구들이 보였고, 마크와 벨라도 그들 옆에 있었다. 더 뒤로 뭔가 찝찝하다는 표정의 김 관장과 자신만만한 얼굴의 서현이 보였다.

태호는 먼저 벨라와 팔짱을 끼고 있는 데이비드에게 다가갔다. 가보니 엘리스는 보였는데 그 옆에 제마는 안보이고 처음 보는 여자가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태호는 엘리스에게 다가가 볼키스를 하고 마크와 데이비드와도 포옹했다. 벨라와도 볼키스를 한 뒤 일행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려고 했다. 그 순간 엘리스 옆에 있던 오늘 처음 보는 여자가 태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태호. 나야! 제마.”

"제마라고?"

순간 태호는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다시 보니 정말 제마였다. 얼굴에 주근깨가 자글자글하던, 늘 보이쉬 하게 입고 다니던 제마는 없었다.

늘씬하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단아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 조금은 퇴폐미도 있는 여성이 자신을 제마라고 소개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제마는 태호에게 다가와 볼키스가 아닌 입술에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 뒤 오늘 전시회를 축하한다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 순간 층에 있던 모든 사람이 태호를 주시했다. 태호의 부모님은 아들이 웬 아가씨와 키스를 하는 게 영 낯설었고 태호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자의 연애에 놀라워했다.

마크는 쟤들이 사귀는 사이였나 하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했고, 데이비드는 동생이 얼마 전부터 얼굴을 레이저로 갈고 비싼 옷과 보석으로 치장할 때부터 뭔가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의 반전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둘의 키스를 보고 있던 서현은 억장이 무너졌다.

키스를 하는 순간 태호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남은 정신을 가다듬고 데이비드와 일행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뒤로 김 관장과 서현에게 다가갔다. 김 관장은 찝찝하다는 표정에서 멍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서현은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김관장과 서현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태호의 머릿속은 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의 태호의 행동은 그냥 직진이었다. 태호는 제마에게 다가갔다.

“제마, 잠깐 우리 부모님께 인사하러 갈래?”

“좋아.”

태호의 말에 당황할 만도 할 텐데, 제마도 무슨 생각인지 태호의 팔짱을 끼고 태호가 이끄는 데로 향했다. 오히려 인사를 제안한 태호가 놀랄 지경이었다.

“엄마, 아빠. 이쪽은 제마 로렐. 여자친구고. 데이비드 아시죠? 룸메이트 여동생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제마는 태호네 식구들 전체에 볼 키스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태호의 할아버지와 영호는 힐까지 신어 18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이 금발의 미녀가 볼 키스를 하자 당황하면서도 좋아하며 얼굴이 헤벌쭉 풀어졌고, 숙영은 아들의 여자친구가 마치 상견례 나온 예비 며느리인 양 인사를 하니 그거대로 정신이 없었다.

태호는 이 정도까지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 저 관찰력 좋은 서현을 속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 있는 전부를 속일 수밖에. 내일부터 무슨 찌라시가 맨해튼에 돌지, 롱 아일랜드 아줌마들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돌지 알 수가 없지만, 오늘은 일단 '고'였다. 고고고! 태호는 그 정도로 여자 친구로서의 서현이 부담스러웠다.

전시회는 성황리에 시작되었다. 뉴욕에서 돈 좀 있고 목소리 좀 크다는 사람들은 한 번씩은 들렀다가 갔고, 일반 시민 중 이 전시회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도 상당히 늘어났다. 한편 키스의 후폭풍은 거셌다기보다는 여러 가지로 다양했다. 태호네 집은 데이비드네 집안에 관심이 많았고, 데이비드는 태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태호야, 고마워.”

“뭐가 고마워?”

“우리 집 못난이를 네가 데려가기로 한 거.”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뉴욕 시민들 다 보는 앞에서 키스까지 해놓고?”

“아, 그게 얘기하면 긴데···”

태호는 서현과 있었던 일과 자신이 제마에게 부탁한 일에 관해 얘기를 해줬다.

"대시를 했다기보다는 뭐 기대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잘 해줬지. 내가 당황했으면 연극도 들통나는 거라 자연스럽게 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그 서현이라는 네 친구하고는 왜 안 사귀는 거야?"

“난 그 집안도 부담스럽고, 서현이 성격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러냐? 제마는 성격이 비단결처럼 좋으니까 걱정하지 마. 둘이 아주 잘 어울려. 그렇고말고.”

“시끄러!”

자신의 전시회를 위해 멀리 미국까지 와준 김 관장에게 태호는 전화를 걸어 감사를 표했다. 전시회에 관한 얘기를 어느 정도 한 뒤, 김 관장은 며칠 전부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는 딸 아이 걱정에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에 제마에 대해 슬쩍 물어봤다. 태호는 이 집 사람들 특성상 우습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있는 제마 부모님에 대해 사실대로 얘기해 줬다.

“제마는 롱 아일랜드의 로웰 가문 막내딸이에요. 아버지가 마틴 로웰이라고 로웰 회사 회장이세요.”

김관장은 재빨리 메모지에 기록한 뒤 옆에 있던 비서에게 건네며 입 모양으로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태호는 서현에게 연락이 안 된다며 바꿔달라고 하자, 김 관장이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으니 나중에 통화하라며 메시지는 전해주겠다고 했다.

이틀 뒤, 서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태호는 전시회에 와줘서 고맙다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본론은 뒤로 미룬 채 다른 얘기만 계속해서 했다. 그러자 서현이 먼저 제마 얘기를 꺼냈다.

“여자친구 예쁘더라.”

“그러게. 나도 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

“하지만 말이야. 왜 내가 아니고 걔야?”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첨 만난 게 고등학교 1학년 때야. 같이 알고 지낸 지 거의 8년이 넘어. 그런데 넌 고1 때 썸타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나보고 사귀자고 하지 않았어. 왜 그런 거야?”

감정이 북받치는지 서현은 울먹이며 물어봤다.

“어렸을 때야 정말 우리 둘 다 어렸고, 또 네 아빠 엄마 무서워서 그랬고. 내가 미국 오고 나서는 엘리 사귀다 깨지고 나서는 롱디를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넌 한국에 있고, 난 미국에 있는데. 넌 네 아빠 무서워서 미국에 놀러 오지도 못하고. 난 나대로 바빠서 한국에 들어가기 힘드니. 사귀자고 말할 수가 없었지.”

서현은 그 말에 더 크고 서럽게 울었다.

“걔랑 깨지고 나랑 사귀면 안 돼? 내가 미국에 눌러앉을게. 엄마 아빠가 뭐라 하던 짐 챙겨서 미국에 눌러 앉아버릴게. 너랑 같이 살게. 나 밥하는 것도 배워올 수 있고 청소 빨래도 잘 할 수 있어. 그렇게 네 옆에 있을게. 그러면 되잖아 응? 태호야!”

서현은 울면서 애원하듯 태호에게 매달리듯 말했고, 태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몇 분을 그렇게 있다가 서현이 말했다.

“나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하나만 나랑 하나만 약속해.”

“뭔데?”

“그 여자랑 깨지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난 그러면 바로 너 보러 짐 싸들고 뉴욕으로 날아갈 거야.”

"... 어. 그럴께."

그제서야 서현은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기다릴 거니까 빨리 걔랑 깨고 나에게 연락해."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뭐가 고마워?"

"나 좋아하고 있었던 거잖아."

"흥. 아니야. 누가 널 좋아한다고 그래. 남에게 뺏기긴 싫어서 그런거야."

"가지긴 아깝고?"

"너 자꾸 그럴래?"

"미안 미안. 그럼 이만 돌아가. 다음에 한국에서 보자."

"그래 알았어. 잘 지내."

"너도"

*

한편 뉴욕 사교계에는 뉴욕의 명망가 로웰가의 막내딸이 몰라보게 예뻐졌는데, 태호와 사귄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엘리스와 마틴은 딸의 연애를 별 말없이 지켜봤고, 데이빗과 로이는 동생의 연애를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너무 천방지축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던 여동생이 이제야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양인이라는 핸디캡도 태호 정도의 명성 앞에서는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사실 피부색만 놓고 보면 태호가 데이비드보다 더 하얬다.

태호와 제마는 전시회 개막 이후 처음으로 전화하고 있었다.

“나 잘했지?”

태호는 허탈한 듯 헛웃음만 나왔다.

“어, 매우 잘했어.”

“그럼 보상이 있어야지.”

“무슨 보상?”

“전시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상.”

“흠··· 뭐 해줄까?”

“밥 사줘.”

“그래 밥.”

“그리고 영화.”

“그러면 데이트잖아.”

“소녀가 그날을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갔는지 낭군께서 아시오면 소녀에게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오빵.”

“아 몰라. 오빠는 데이비드가 니 오빠지 난 아니야. 그리고 데이트는 안돼. 밥은 오케이. 데이트는 노. 안 그러면 데이비드 옆에 끼고 밥 먹을 거야.”

“걘 어차피 안 갈 거야. 그러니 우리 둘이네. 그럼 다음 주 금요일 7시로 알고 있을 테니까 좋은 곳에 예약해줘. 그리고 나 뮤지컬도 보고 싶어. 남자 친구랑 보러 가겠다고 지금까지 안 보고 아껴뒀던 거니까 잘 준비해줘, 오빵.”

“아 몰라. 하든지 말든지.”

“오빵, 그러면 그렇게 나오면 데이빗이 쳐들어갈 거 같아 샷건들고.”

“아, 오라 그래!”

“히히. 그럼 그날 간다.”

태호는 어찌 되었던 서현을 떨어트리는데 제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틀림이 없었기에 맨해튼의 한 식당을 예약하고 라이언 킹을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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