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바오 전시회 (feat 출판) (122/181)

빌바오 전시회 (feat 출판)

태호는 연초에 시작한 소설을 크리스마스가 직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여름에 이탈리아의 메디치가에서 본 앙리의 자화상이 마지막 퍼즐이었던 듯 그 이후에는 앙리의 일대기를 눈으로 보듯이 글로 옮겨낼 수가 있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 글을 쓴 결과로 태호도 글 쓰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인지는 글을 써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태호는 소설 같은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었기에, 쓴 글을 전문 작가에게 보내 수정 및 퇴고를 맡겼다.

한달 뒤 작가는 글 스토리 중에서 앞뒤가 맞지 않아 수정이 필요한 부분들을 제외하곤 각종 맞춤법부터 문장의 구조까지 고쳐야 할 부분들을 싹 다 뜯어고쳐 태호에게 들고 왔다. 그 뒤로도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수정의 수정을 거친 후 완성이 되었고, 태호는 출판을 도와줄 에이전트를 고용해 원고를 넘겼다.

글에는 태호가 깨달은 앙리 보노의 일생이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태호가 앙리의 작품을 접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풀어냈다. 앙리가 어떤 여인을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고, 그 여인이 어떻게 앙리를 배신하였으며, 그 배신 때문에 앙리가 어떤 불행을 겪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들이 소설이 독자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었다.

책의 20% 차지하는 마지막 80페이지는 소설의 앞 내용과 크게 달랐다. 거기엔 앙리 보노가 생의 마지막에 Faceless를 어떻게 그리게 되었는지를 거의 일 단위로 쪼개 묘사했다.

앙리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과 심리에 대해 상세한 묘사와 설명을 곁들여졌다. 외모에 대한 묘사는 마치 옆에서 지켜본 듯했고 심리에 대한 묘사와 설명은 마치 앙리 보노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그 뒤의 에필로그에는 앙리가 죽고 난 뒤, 시신이 파리 대학에 가 해부용 카데바로 이용된 후 매장되는 장면과 그림이 카사노공작의 손에서 미셸 주교 그 뒤 파리 성당의 외진 장소에 숨겨지듯 옮겨지게 된 이유를 요약해서 기술되어 있었다.

Faceless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이 책을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따분한 책일 수 있었다. 불륜, 치정, 이혼, 외도 같은 닳고 달은 클리쉐에 찌들었고, 미국에 와서는 수위가 더 높은 근친상간, 강간, 살인, 마약 등 한술 더 뜨는 막장에 단련이 된 태호가 보기엔 그냥 19세기 말에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얘기였다.

단지 이 소설이 특이한 점은 세계 3대 예술품이라는 Faceless에 대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글이라는 것이었지, 그 외 어떤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출판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로는 소설이란 형식을 빌려서라도, 자신이 아는 앙리 보노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고, 두 번째로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고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다는 헛된 자신감에 찼기 때문이다.

다행히 글을 완성하고 난 후 데이비드에게 보내 리뷰를 부탁했다. 나중에 보니 엘리스와 제마까지 다 읽어본 듯했고,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정식으로 출판되면 사인까지 해서 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한달정도가 지나자 에이전트를 통해 출판을 요청한 업체 다섯 군데 모두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동소이하지만 결국은 초보 작가에 대한 표준 계약서 수준의 딜이 왔다. 여기까지는 이해를 했다. 하지만 마케팅 관련 영역에서 태호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태호는 나름 인지도 있는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마케팅에 뭔가 플러스 알파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에이전트가 오히려 위로하며 마케팅 활동이 활발할수록 태호만 힘들고 귀찮아지니 차라리 없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결국 펭귄사와 계약을 하게 되었고, 계약금 등의 태호에겐 푼돈인 돈도 받았다. 태호는 비록 아쉬움은 가득했지만, 출판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 안 보이는 곳으로 미뤄놨다.

*

태호가 출판을 한다고 씨름을 하는 사이 계절은 바뀌어 3월이 거의 코앞에 다가왔다. 다움에서 보낸 미술품은 빌바오에 진작에 도착해 전시를 기다리고 있었고, 빌바오도 윌슨도 태호도 이 첫 전시회를 준비하고 손님을 초대하는 등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윌슨이 공식적인 일 처리는 다 하지만 가족을 미국에 부르기 위해 항공편과 숙박을 준비하는 것은 비서가 있어도 태호가 어느 정도 감당을 해야 했기에 태호도 바빴다. 그리고 한국발 핵폭탄이 뉴욕에 떨어졌다.

“너도 온다고?” 태호는 놀라서 물어봤다.

“내가 가면 안 돼?” 서현은 섭섭함을 한껏 담아 대답했다.

“관장님만 오실 줄 알았거든.”

“석사도 끝나서 시간도 좀 있고. 뉴욕에 가보고 싶었는데 혼자는 못 가봤는데, 엄마랑 가니 이것도 문제가 없고. 왜? 내가 가면 안 될 거 있어?”

“아니, 그런 게 어딨어. 너 지금까지 계속 뉴욕 놀러 오고 싶어했잖아. 이제 소원 풀겠네?”

“그게 다야?”

“뭐가 더 있어?”

“아니, 내가 뉴욕에 간다는데 네가 준비해야 할 게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준비?”

“관광가이드를 한다든가 식당을 예약해 둔다거나 이런 것들.”

“내가 좀 많이 바빠서 시간 내기가···”

“그럼 너 내가 미국까지 갔는데 뉴욕 구경도 안 시켜줄 생각이었어? 진짜 섭섭하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랑 다니면 아무래도 오해할 사람이 있어서.”

“누가 오해하는데? 그러면 더 좋아. 오해하면 되지. 오해하라고 해.”

“그게, 내가 아무래도 만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

“아, 그러세요? 누구랑 사귀는 건데?”

“전에 얘기했던 걔.”

“권태호. 너 그런 거짓말이 나한테 통할 거 같아? 너어, 지난 일 년간 나랑 통화하면서 네 여친에 대해 얘기한 적 한 번도 없었어. 처음에는 나를 배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만보니까 그게 아니야.

엘리인가? 걔랑 오래전에 깨진 거잖아. 그 뒤로 사귄 사람도 없었고. 그러면서 나한테는 말 안 한 거고. 가서 보자고.”

서현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태호는 서현의 이런 성질머리 때문에 사귈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건데 얘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끔 보면 고1 때 봤던 성격이 뛰어나왔다. 어찌 되었든 다급해진 태호는 제마에게 연락을 했다.

“오. 태호. 웬일이야 전화를 다 주고.”

“내가 종종 통화하지 않았나?”

“아, 그래서 지난번 스위스 여행 갔다 온 이후로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지요?”

“통화는 했잖아.”

“내가 늘 걸었고 몇 마디 안 하고 끊었지.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를 다 했을까? 오빠야.”

“오빠? 이건 어디서 배운거니?” 태호는 헛웃음을 참으며 물어봤다.

“요새 뉴욕에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모델이 있는데 알고 보니 한국 애더라. 어쩌다 보니 친해졌어. 걔한테 물어보니까 오빠라고 말해주면 한국 남자들이 좋아한다던데?”

“허. 너 걔한테 잘못 배운 거야. 너 이번에 내 전시회 때 오니?” 태호는 얼른 주제를 바꿨다.

“가는데? 엄마랑 오빠랑. 아빠는 바빠서 못 가고. 왜?”

“올 때 좀 예쁘게 하고 와라. 한껏 꾸미고.”

“갑자기 왜?”

태호는 제마에게 서현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며 가만히 있으면 꼼짝없이 코 뀔 수도 있다면서 도와달라 했다.

“왜 그렇게 피하는 거야? 둘이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되었다면서.”

“성격. 친구로 지내기엔 괜찮은데 계속해서 사귀고 만나면서 그 성격 받아줄 생각은 전혀 없어. 피곤해.”

“알았어. 접수 완료. 그럼 내가 어떻게 꾸미고 가는지 봐 오빠~!”

태호는 왠지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거 아닌가 고민했다. 이때가 전시회 한 달 전이었다.

*

제마는 태호와의 통화가 끝난 이후 뛸 뜻이 기뻤다. 지금까지 한국에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는 줄 알고 선을 지키며 조신하게 있었지만 그게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 우리 맨해튼 가자. 전에 엄마가 얘기하던 거 해야겠어!”

“딸, 너 그게 안 한다고 했잖아. 아프다고 그렇게 싫어하더니?”

“지금 아픈 게 문제가 아니야.”

“갑자기 왜?”

“그런 게 있어. 그리고 옷도 사줘.”

“옷? 옷은 왜? 너 또 그 누더기 같은 옷 살 거 같으면 네가 혼자 가서 쇼핑해. 엄마는 그런 옷들 보기만 해도 싫으니까.”

“그거 말고 정장이나 투피스 같은 옷들 있잖아. 태호가 뭐라더라?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스타일이라고 했는데?”

“그게 뭐니?”

“돈 많은 집에서 교육 잘 받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들이 하고 다니는 스타일이래.”

“그게 너잖아.”

“내가 입는 옷 스타일 말고··· 아, 맞다. 샤넬 옷 중에 그런 게 많다고 했어.”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하면 쉽잖니. 네가 샤넬 정장을 입겠다고? 언제?”

“태호 전시회 때?”

“갑자기 왜?”

“태호가 그렇게 입고 와 달래.”

“이해가 안 되네. 둘이 사귀니?”

“아니. 근데 사귀어 보려고.”

제마는 레이저 시술을 받은 후에 곧바로 근처 샤넬 매장에 가서 옷을 사려고 했으나, 레이저 시술이 너무 아픈 통에 꺼이 꺼이 울면서 그날 쇼핑은 포기했다.

시술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맨해튼의 샤넬과 티파니 매장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샤넬 옷과 가방, 티파니 보석과 귀걸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치장을 했다. 머리와 화장은 전시회 당일 아침에 엘리스가 가는 동네 미장원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전시회 당일 날 아침, 제마가 제대로 꾸민 것을 본 적이 없는 엘리스는 제마가 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옆에 있는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제마가 꾸미면 예쁠 거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골드와 크림색의 4포켓 트위드 샤넬 정장은 큰 키는 아니지만 완벽한 비율과 핏을 가진 제마에게 이상적으로 잘 어울렸다.

싱싱한 금발에 우윳빛 피부와 밝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계란형의 요밀 조밀한 얼굴은 묘한 색기가 묻어 나왔다. 풍만한 가슴과 길지 않은 스커트 밑으로 쭉 뻗은 다리는 나오미 캠벨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데이비드와 엘리스는 제마의 이런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태호의 전시회는 빌바오의 달팽이처럼 생긴 구관 꼭대기 층에서 열렸는데, 이 장소는 200x년 백남준 회고전과 2011년 이 우환 회고전이 열렸던 장소다. 태호의 전시회가 이곳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한국 작가의 개인전이 된 것이다.

빌바오와 윌슨은 이 전시회를 위해 많은 양보를 하고 추후 작품을 대여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그림을 빌려 왔다. 심지어 모마에 가있는 연작도 윌슨이 가지고 있는 빛의 마리아를 일 년간 대여하기로 약속하고 가져올 수 있었다.

여기에 태호가 어릴 적 그려만 놓고 태호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어 공개하지 않았던 작품들도 뉴욕의 한 수장고에서 나와 전시를 위해 빌바오로 옮겨졌다. 그렇게 작품을 모아놓고 보니, 태호의 길지 않은 생에 이렇게나 많은 그림을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마스터피스라 불러도 좋을 작품들이 전시실을 가득 채웠다.

윌슨은 물론 로스와 미술관 큐레이터들도 이번 전시회가 역대 급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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