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트 바젤2 (116/181)

아트 바젤2

목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아트 바젤을 기다리는 VIP 패스 홀더들이 전람회 앞에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이들이 타고 온 개인 자가용 비행기만 근처 공항에 100대 넘게 주기 되어 있을 정도로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최소 천만장자 이상이었다.

서로를 알지는 못하겠지만 태호가 봤다면 꽤 재밌었을 장면이 여기에서 연출되어 있었다. 아르노 회장의 비서는 VIP 패스를 들고 일찌감치 줄을 서서 디지털카메라를 손보고 있었고, 그 뒤에는 마크와 태호가 나란히 줄을 서서 시시덕 거리고 있었으며, 그 옆에서는 데이비드 식구들이 뉴욕 패션의 아이콘을 만난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더 뒤에는 김유미 관장이 미술관 직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과 나란히 줄을 서 있었다. 김유미 관장은 체면을 생각하면 여기서 줄을 서고 있을 사람은 아니지만, 관광객 모드를 발동하며 이 같은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했다.

김 관장보다 더한 부자들도 몇 명 더 있었다. 론 로더도 뒤쪽에서 줄을 서 있었고 케네스 그리핀과 스티브 코언도 그림이 실망스러우면 앞으로 다시는 윌슨이 자신에게 편지도 못 쓰게 하겠다고 이를 갈며 줄 서는 것을 감수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아트 바젤이 열리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섹터로 뛰듯이 달려갔다. 빨리 가야 그림을 선점할 수 있다. 대략 한두 시간 뒤면 괜찮은 그림 중에 남아있는 그림은 없을 것이다. 태호를 제외한 마크와 데이비드네 가족들이 태호의 그림을 먼저 보자고 했다. 자신의 그림은 나중에 보고 먼저 살 그림을 둘러보자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2층으로 이동한 태호와 일행은 매우 좋은 위치에 놓인 윌슨의 부스에서 세 작품이 나란히 전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First. 일명 황금의 마리아. Faceless를 그리는 앙리. 이렇게 이름이 붙은 세 작품이 블록버스터 영화 포스터처럼 작품 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옆 벽에도 사랑 6 연작과 윌슨이 들고 온 다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 남은 공간에는 윌슨이 거래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5~6점 전시되어 있었는데 비교하기가 민망하게 차별 전시해 놓고 있었다.

태호는 먼저 부스에서 대기하고 있던 윌슨과 제시카에게 인사를 한 후 데이비드 가족과 마크를 소개했다. 곧 그림으로 다가가 이 작품들이 어떤 동기로 제작된 작품인지 데이비드 가족과 마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데이비드 가족과 마크만이 아니었다. 젊었을 적 정말 예뻤을 거 같은 세미 정장 차림의 늘씬한 프랑스 미녀가 방긋방긋 웃으며 태호의 설명을 듣고 있었고, 그 뒤에도 윌슨과 윌슨이 초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태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실 이런 아트페어는 갤러리가 주축이 된 거대한 시장이다. 이 거대한 시장 바닥에 자신의 작품이 어물전 생선처럼 거래되는 걸 좋아하는 작가는 사실 없다. 어떤 작가는 ‘배 아파 낳은 자식 입양시키는 것 같은 고통’이라고도 하는데 태호는 일절 그런 게 없었다.

무덤덤하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개만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10분 정도에 걸쳐 설명이 끝나자 백악관 기자회견 하듯 일제히 주위 컬렉터들이 인사를 건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중에서 제일 빨랐던 건 이 프랑스 여자였다.

"반가워요, 태호 씨. LVMH 아르노 회장님의 비서 나딘 쁘띠입니다. 오늘 회장님이 직접 오시고자 했는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못 오시게 된 걸 아쉬워하시면서 절 보내셨어요. 회장님께서 안부도 같이 물어보셨습니다.” 나딘은 고급 진 파리 발음으로 태호에게 인사를 건넸고, 태호도 불어로 화답했다.

“회장님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다음 주 파리에서 촬영 일정 때문에 며칠 머물 예정이니 시간 되시면 만나 뵈었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시고요."

“고마워요 태호 씨.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회장님께서 First라는 그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에 온 것이고요. 그럼 다음에 뵙죠.”

나딘을 시작으로 윌슨이 초대한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눴고 나중에 윌슨이 즉석카메라를 가져와 그 자리에서 모인 사람들과 수십 장의 사진을 찍으며 팬 서비스를 톡톡히 했다.

“태호 군,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요.”

“아, 김 관장님. 안녕하셨죠?”

“늘 태호 군의 작품을 구하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터라 그리 잘 지내는 건 아니랍니다. 이제 대학도 졸업하고 시간도 넉넉하니 우리 쪽 제작 요청도 소화할 수 있는 거죠?”

“이제 막 졸업을 하고 여기로 날아온 터라 아직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어서요. 준비되는 데로 미술관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 관장은 태호와 인사하고 아까부터 눈에 띄던 제마를 눈여겨봤다. 서양인 치고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눈가에 주근깨가 좀 있고 얼굴형이 갸름해 보였지만 워낙에 헤어스타일이 보이쉬 해서 인상은 깊었지만 크게 예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우리 서현이와 자주 연락하고 그래요. 걔가 태호 군 전화를 많이 기다리는 것 같으니.”

태호는 김 과장의 질문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후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픈하고 난 후 한 시간 동안 태호는 자신을 만나러 온 모든 사람과 인사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동안 윌슨은 협박에 가까운 구매 요청을 받고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도 계속해서 가격을 물어보는 다른 VIP 때문에 턱이 아플 정도로 손님 응대를 한 윌슨은 몇 시간을 떠들고 신경을 썼더니 저녁에는 탈진했다. 결국, 모든 초대를 거절한테 호텔로 돌아가 몸져누워버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하루 동안 받은 연락처와 명함들이 100장을 넘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3개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을 사겠다고 확답을 했다는 얘기다. 원하는 그림은 세 개였지만 원하는 거래 방식도 다양했는데, 사실 철저히 현금 장사를 하는 아트 페어 특성상 거래 방식이 다양할 수가 없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카소나 모네 같은 작품들을 넘기고 그 가격만큼 가격을 제외한다든지, 아니면 1:1 맞교환도 제시하는 등 그림도 다양했고 방식도 다양했다.

윌슨은 한 명 한 명 전화를 걸어 현금 외에는 거래가 힘들다는 양해를 구했다. 오로지 현금. 현금만 가능하다고 안내했다. 하지만 그렇게 떨어져 나간 고객은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3개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을 사겠다고 확답을 했다.

그다음으로는 작품당 가격을 백만 불 이하를 부른 사람들에게 양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예상은 한 듯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이며 다음에 태호의 작품 중 좋은 작품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는 멘트를 잊지 않았다.

윌슨은 직원을 하나 더 구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할 정도로 예비 고객 군이 늘어난 셈이었다. 이들에게는 들고 온 다른 작품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수가 많이 줄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약 20명. 윌슨은 이제 본 게임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쉴 새 없이 전화를 돌리며 가격을 흥정하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피곤해져서 문자 메시지를 발송하기 시작했다.

콜 하는 가격은 계속해서 올랐지만 누구도 자신을 문자 메시지에서 빼달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들 묵묵히 마치 장기 레이스를 펼치는 인디 500 레이서들처럼 간간이 비드를 할 뿐이었다. 경매에 넘길까 고민까지 하던 윌슨은 이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문자를 발송했다.

아르노 회장의 비서 나딘은 이번 구매 건이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고 가격도 하염없이 올라갈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무슨 이베이 옥션도 아니고 자그마치 사흘을 질질 끌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늘어지자 나딘도 본사에 연락해 회장의 판단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본사에서 온 연락은 예상 가능한 최종 가격을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지시였다. 나딘은 한껏 치장하고 전시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윌슨에게 찾아가 최종 예상 가격을 물어봤다.

“마담 나딘. 이건 순수히 예상 가격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윌슨 씨, 이 업계에 오래 종사하신 분이니 아무것도 모르는 저보다는 훨씬 신빙성이 높겠지요. 볼 파크 (Ball Park, 야구장에서 육안으로 판단하는 관중 수, 대략 오차 20~30% 이내) 넘버라도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을 또 할 줄 몰랐는데, 미쳤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전에 모마와 그림을 거래할 때도 그 가격이 나올 줄은 몰랐죠. 괜찮으시죠?”

“경청하고 있어요.”

“황금의 마리아가 개인 컬렉터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농담으로 타고 왔던 비행기 팔아서 그림을 들고 가고 싶다는 분들도 계시죠. Faceless를 그리는 앙리는 미술관 분들에게 인기가 좋은데 모마, 빌바오, 그리고 한국의 다움이 경쟁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First가 제일 인기가 적은 편이고 그림값도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긴 한데 지금은 삼백만 달러 수준으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삼백만 불이라는 얘기에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표정 관리를 하며 가격을 더 세게 불렀다.

“제가 4백만 불에 구매하도록 하죠. 여기서 계약을 끝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담 나디. 미안하지만 제 생각엔 3백만은 시 작가에 불과합니다. 분명히 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올라갈 수밖에 없고요."

“윌슨 씨. 그럼 삼백만 불은 어떻게 된 금액인가요?”

“마담 나딘이 이 시장을 알면 이해가 더 쉬워질 텐데, 여기에 와서 그림을 구매하시는 분들은 사실 수백만 달러를 그림에 소비 또는 투자하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지금 가격은 제가 보기엔 맛보기 정도지요.

저 세 그림 중 하나라도 팔리면 그림을 구매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작품이라도 잡기 위해 더 높게 금액을 부를 겁니다. 이건 마담 나딘이 갖고 싶은 물건을 못 샀을 때의 보복 구매 심리를 이해하셔야 해요.

나는 황금 마리아의 거래가 끝나면 앙리를 팔 거고 그다음에 First를 팔 겁니다. 이렇게 되면 First의 금액이 예상을 크게 빗나갈 정도로 높아질 가능성이 있어요. 천만 불 주고 그림을 사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오백만 불짜리 그림은 싸게 느껴질 겁니다.”

나딘이 경악을 하거나 말거나 윌슨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이 방법은 판매 방법을 놓고 고민하다 제시카와 매튜와 얘기하다가 나온 아이디어로 어떻게 보면 경매의 정석이지만 며칠 문자와 네고 등으로 지친 윌슨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다르게 물어보죠. 황금의 마리아의 최대 가를 얼마로 예상하십니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천만 불도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승인된 금액으로 적어도 한 작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런 문자 거래를 계속하실 생각이신가요?”

“하하, 나도 지쳤습니다. 그만둬야 하는데, 그게 안 되네요. 결정을 내릴만하면 가격을 올리시는 분들이 있어서.”

“빨리해주셨으면 정말 좋겠어요. 저도 기다리다 지쳤답니다.”

“가능하면 속도를 올려보도록 하죠.”

윌슨은 좀 더 독촉하는 분위기로 문자를 보냈지만 달라진 건 가격이 올라가는 속도였지 아무도 손을 털고 나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그림 가격은 태호가 세웠던 작년 기록을 걷어차 버리고 우상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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