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트 바젤1 (115/181)

아트 바젤1

윌슨은 이번 아트 바젤이 지금까지 유럽에서 받은 냉대를 훌훌 털고 새로운 고객을 만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태호가 전해준 그림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거 같은 느낌에 머리가 멍해지기까지 했다.

그림 두 점을 그려 달라고 했더니 결국 세 점을 그려서 왔고, 하나하나가 아트 바젤에 꺼내놓기 아까울 퀄리티의 그림들이었다. 머릿속에서 이 상황을 몇 번을 시뮬레이션해봐도 만약 서로 팔라고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가격은 예상하기를 포기했다. 비록 연작이지만 작년에 올린 천만 달러 상당의 수입은 생존 작가의 매출액 중 전 세계 탑을 찍은 금액으로 앞으로 적어도 몇 년간은 다시 나오지 않을 금액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 가격이 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윌슨은 일단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태호의 그림을 살만한 사람들에게 보냈다. 먼저 LVMH 아르노 회장, 마크 제이, 빌바오와 모마 미술관, 다움 미술관 같은 태호의 지인이나 기존 거래처부터 에스티로더의 창립자의 아들 론 로더, 캐피털 인베스트먼트 그룹의 창업자인 케네스 그리핀, 헤지펀드의 제왕 스티브 코언 같은 과거에 큰돈을 주고 그림을 구입한 적이 있거나 한창 그림을 공격적으로 구매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잘 찍은 그림 사진을 보내 이번 아트 바젤에 출품할 것이라는 안내를 했다.

그러고는 미술품 전문 배송업체를 통해 태호의 그림들을 포함한 갤러리와 거래를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내고 스위스로 향했다.

론 로더는 자신의 미술관으로부터 들어온 몇 장의 사진이 담긴 소포를 열어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런 식의 편지를 워낙에 많이 받는 그이지만 보낸 이가 요즘 잘나가는 태호의 딜러 제프리 윌슨이라는 걸 보고 주저 없이 우편물을 열어봤다. 내용물은 정말 자신의 구미를 당겼다.

“아트 바젤이라. 무슨 생각이지? 돈을 올려 받으려면 차라리 경매를 하던가 하지. 사람 오고 가게 하다니. 에바, 아트 바젤 티켓 받은 거 있는가?”

“네 회장님.”

“6월 둘째 주 수목 스케줄 비우고, 아트 바젤에 갈 수 있게 준비해 주게.”

같은 일이 케네스 그리핀에게도, 그리고 스티브 코언에게도 일어났다. 아트 바젤에 웬만하면 나타날 일이 없는 초 거물들이 태호의 새 작품을 보기 위해 스케줄을 조정하고 전용기를 타고 스위스 바젤로 향했다.

LVMH 아르노 회장은 윌슨이 보낸 사진을 보고 감탄의 감탄을 했고, 특히나 태호의 초상화에 루이비통 로고가 문신처럼 있는 것을 보고 마치 태호가 보낸 협업에 대한 청구서라고 생각을 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실제 태호와의 협업도 만족스러웠던 아르노 회장은 일정상 직접 방문은 못하기에 비서를 보내 천만 달러 이하로는 재량껏 그림을 구매하라고 지시했다.

천만 달러는 실존 아티스트 작품에 대한 최고 구매가이지만 이미 태호와 루이비통은 한배를 탄 사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그것도 내심 그림 3점을 다 구매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마크 제이는 뉴욕의 자기 사무실에서 한참을 대기한 우편물을 파리에서 받아보는 바람에 아트 바젤 시작일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 우편물을 개봉했다. 그리고 비서를 통해 바젤로 가는 항공편을 예약했다.

막 바빠지는 시기지만 스위스 바젤을 당일치기로 갔다 오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태호에 대한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면 나에게도 알려줬어야 할 거 아니야!”

배신감에 치를 떠는 건 마크뿐만이 아니었다. 빌바오의 제이슨도 사진을 받아보고 정말 오래간만에 화가 골수까지 뻗는다는 게 이런 거라는 걸 깨달을 정도로 화가 났다.

다 키워 놓은 아들이 부모 봉양할 생각은 안 하고 어느 부잣집 데릴사위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이를 예상이나 한 듯 우편물 안에는 윌슨이 보낸 손 편지도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건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사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제이슨은 여기에 누굴 보낼까 고민하다가, 자신이 직접 날아가 확인하기로 했다. 만약 개인 컬렉터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리면 다시 보기 힘든 그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마의 짐은 윌슨의 사진을 보고 난 후 재무 담당 이사 와 한참을 싸웠지만, 끝끝내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방향을 바꿔서 후원회에 요청하기로 맘을 먹은 짐은 후원회 회장인 론 로더에게 연락을 했고, 결국 둘은 같이 스위스 바젤로 향하기로 했다.

다움 미술관의 김 관장은 해마다 이맘때는 늘 아트 바젤을 찾는 게 일이자 취미 중 하나였기에 기존 일정을 소화하면 되었지만, 이번에는 출국 전에 남편에게 구매 가능 금액을 확인받았다.

“무슨 생존 작가 그림이 50억이나 해? 당신 전에 그 녀석 그림 4-5억 정도에 사지 않았어?”

“10년 전 일이고, 지금은 4-5억에 태호 사인도 사기 힘들어요.”

“그래도 그렇지.”

“여보, 그냥 서현이 태호랑 결혼 시키는 건 어때요? 그럼 그림값으로 서현이 상속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데?”

“안돼. 양 회장네 둘째랑 혼사 논의가 진행되는 거 알잖아.”

“그래도요. 서현이 그렇게나 좋아하는데.”

“둘이 사귀는 거 맞아?”

“당신도 기사 봤잖아요.”

“그건 2년 전이고. 내가 볼 때 서현이 혼자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 녀석은 별 관심 없고.”

“젊었을 때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건 일상이에요.”

“양 회장 네 둘째랑 진행되는 거 보고 판단하지.”

“그림은요?”

“알아서 진행해.”

“고마워요, 여보”

그렇게 김 관장도 50억 장전하고 스위스 바젤로 향했다.

*

6월 둘째 주 수요일, 윌슨은 사무엘 켈러와 자신의 부스에서 태호의 그림을 같이 보고 있다. 아트 바젤의 디렉터인 켈러는 작년까지 윌슨의 갤러리는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른 설치 현장은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태호의 그림만 무슨 고전 명화 쳐다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켈러 옆에는 모마의 짐과 빌바오의 제이슨이 서로 으르렁거리지도 않은 채 얌전한 새색시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둘은 머릿속에 주판을 튕기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마저도 잊고 있는 듯했다.

아트 바젤의 공식 오픈이자 VIP만 들어올 수 있는 행사는 목요일부터다. 두 사람은 미술관 관계자 패스를 달고 들어와서 태호의 그림을 먼저 구경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데, 모마의 후원회장인 론 로더는 후원회장이지 미술관 관계자가 아니기에 이 자리에 없었다.

지금 밖에서 태호의 그림이 실물도 사진처럼 마찬가지로 경이로운지 짐의 판단을 듣기 위해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작가가 유럽에 없고 뉴욕에 있다는 게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그의 그림이 빌바오에 많다지요?” 켈러가 제이슨을 보고 말했다.

“우리가 발굴한 것이나 다름없는 작가니까요.”

“태호가 운이 좋은 것인지, 빌바오가 운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작가가 빨리 발굴되어 이런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입니다.” 켈러가 윌슨에게도 말을 건넸다.

“참, 이번에 모마에서도 태호의 그림을 구매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그림들을 보니 가격은 차치하고 좋은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곧이어 켈러는 부스를 쓱 보더니 윌슨에게 말했다.

“부스는 맘에 드시나요? 처음에는 1층에 부스를 마련하는 게 맞지 않았나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2층에 마련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층이 일 층보다 더 붐비는 진풍경을 보면 그것도 좋겠죠.” 켈러가 웃으며 얘기하고 곧 자리를 비웠다.

켈러가 가자마자 짐과 제이슨은 윌슨에게 짝 달라붙어 협박에 가까운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포문은 짐이 먼저 열었다.

“윌슨, 우리 사이에 이러긴가? 우리가 얼마를 주고 태호의 그림을 샀는지 알면서 이걸 여기에 들고 오다니! 내 빌바오가 우리가 들인 돈의 반밖에 안 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입장이 난처한지 아는가?

이거 얼마에 우리에게 넘길 건가? 오백만? 알았네.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모마가 그 정도 돈이 없는 게 말이 안 되지.”

가격까지 결정해 주는 짐이었다.

이에 질세라 제이슨도 한탄과 호소와 협박을 총동원해 윌슨에게 말했다.

“이런 그림이 있으면 그냥 빌바오와 얘기하면 되지 굳이 아트 바젤까지 끌고 들어온 이유가 뭐야? 우리가 언제 너와 태호를 섭섭하게 한 적이 있어? 태호 졸업 맞춰서 우리 미술관에서는 전시회까지 해주려고 했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그 전시회 우리 모마에서 하게.” 짐이 옆에서 툭 하니 끼어들었다.

“유럽에서 태호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온 것은 충분히 이해해. 그러니 그림은 판매된 것으로 하고 뉴욕 가서 다시 그림에 대해 협상하자.”

이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불평, 불만, 한탄, 호소, 협박은 끝없이 이어졌다. 윌슨이 아마 이럴 때 되뇌기 좋은 반야심경을 알고 있었다면 계속해서 되뇌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의 정신 공격이 끝나고 나자 자기들도 좀 심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입을 다무는 두 사람이었다.

“두 분도 아시겠지만 제가 유럽 시장 특히 아트 바젤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은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여기에 온 것도 거의 10년 만이에요. 이렇게라도 개인에게 풀리는 물량이 있어야 돈도 좀 벌죠. 태호 얼마 전에 건물 질러서 돈도 없습니다."

윌슨은 고양이의 눈을 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며 계속 읍소했다.

"또, 우리 갤러리랑 거래하는 다른 작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태호 때문에 관심을 못 받는다고 떠난 작가가 한둘이 아닌데, 아트 바젤에서만이라도 태호 덕을 봐야 그들도 먹고살 것 아닙니까."

짐과 제이슨은 떼 쓰는 것은 중단하고 정말로 원하는 바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큼, 저 세 작품 다 맘에 들긴 하지만 난 저 Facecless 가 그려진 태호의 초상화를 원하오.”

“짐, 농담이 심하네요. Faceless 관련된 모든 그림은 빌바오 겁니다.”

“이미 넘칠 만큼 있으면서 뭘 더 가지려고 하는 거지? 저 금으로 된 빛의 초상화를 가져가면 되잖소.”

“저것도 빌바오에서 살 겁니다.”

“농담도 그렇게 하면 재미없지.”

“농담이 아닙니다만.”

“저 두 분”

윌슨이 끼어들었다. 내버려 두면 두 사람이 더 목소리를 높이면 싸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VIP에게도 선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두 분 이외에도 초대를 한 분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림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셔 봤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를 더 초대했나?”

“쉽게 얘기해서 최근 몇 년 사이 경매나 개인 거래를 통해 예술품 구매에 천만 불 이상을 지불한 컬렉터들에게는 다 보냈습니다.”

“이런. 허허. 잠시 실례.” 짐이 먼저 자리를 비워 전화기를 들었고, 제이슨도 잠시 떨어져 전화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전화를 한 뒤 제이슨이 먼저 찾아와 말했다.

“윌슨, 작품을 거래하기 전에 우리에게 작품 거래 가격을 꼭 알려줘. 그래야 우리도 그 돈을 만들어 거래할 수 있으니까. 이건 빌바오가 윌슨 씨에게 바라는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말이 끝나자 제이슨은 부지런히 자리를 떴다. 곧 짐도 다가와 통보하듯 말했다.

“거래 전에 꼭 알려주게. 그래야 우리도 돈을 마련해서 그림을 살 거 아닌가.”

짐도 곧 허겁지겁 떠났다. 아무래도 두 사람 다 회의를 잡는 거 같았다.

폭풍 같은 한 시간이 지나고 윌슨은 진이 다 빠져버렸다. 내일 있을 VIP 행사 때는 어떤 일이 있을지 벌써 골치가 아픈 윌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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